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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범

파일:Kb6cSEtUpy.150x200.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이경태(李敬泰)[1], 이수선(李首先)[2]
출생 1917년 8월 12일
평안남도 평양시 강변리(江邊里) 50
사망 1973년 5월 9일
본관 경주 이씨
종교 개신교 장로회
학력 난징 국립중앙대학 법학원(法學院) 법정계(法政系)
독립운동 경력 한족동맹(韓族同盟) 회장[3]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 한교전지공작대대원
(韓國光復軍 第三徵募分處 韓橋戰地工作隊)
중화민국 제 3전구 정치부 대일 광파선전대
(中華民國 第三戰區 政治府 對日廣播宣傳隊) 소교(소령)
광복 후 경력 미군정 CIC 요원
내무부 치안국 교육과장 경무관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290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3. 독립운동4. 일본 경찰로부터 체포됨5. 난징 탈출6. 광복 이후7. 치안국 교육과장8.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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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자 내무부 치안국[4] 경무관이다. 한족동맹(韓族同盟)과 한교전지공작대(韓橋戰地工作隊) 지하공작 활동과 한국광복군 대원으로 활약하였다.

2. 생애

1935년 6월 숭실중학교 신사참배반대시위사건으로 잡혀 병보석 중 국내를 탈출하여, 베이징의 화잉전수학교(華英專修學校)를 거쳐 1940년 9월 난징 국립중앙대학(南京國立中央大學校) 법학원(法學院) 법정계(法政系)진학하였다.

1935년 6월 숭실중학교 신사참배반대시위사건으로 잡혀 병보석 중 국내를 탈출하여, 베이징의 화잉전수학교(華英專修學校)를 거쳐 1940년 9월 난징 국립중앙대학(南京國立中央大學校) 법학원(法學院) 법정계(法政系)진학하였다.

정봉주의 사위이며 정영의 남편이다.

3. 독립운동


한족동맹(韓族同盟)은 일본군 점령지 내에 있는 난징중앙대학교(南京中央大學校) 한인유학생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비밀결사조직으로 중국 문학을 전공하던 3학년(1943년 기준) 학생 송지영(宋志英)그리고 법학을 전공하던 이일범(李一凡)·조일문(趙一文) 독립운동에 관련하고 한국 유학생의 독립노선 모색에 앞장 섰던 주동인물이다.

난징중앙대학은 각지의 우수 학생 모집하고 입학생들의 경제적 부담 면제를 위한 조치로서 한인 유학생들의 학비를 비롯한 기본적 비용들이 면제하고 장학금을 지불하였다. 이에 각지에서 입학지원자가 몰려 한 때 입학생 수가 천여 명에 달하였다.[5]

1940년대 국립중앙대학 출판물 중, 한인 입학생/재학생 기록
성명 적관 전공학과 입/재학기록 졸업시기 본명
리게카이(李圭海) 조선 문학원 중국문학계 1940.9. 이규해
리게타이(李敬泰) 일본 법상학원 정경, 경제계 1940.9. 이일범
야마모토 테츠(山本哲) 조선 농학원 농학계 1941.2. 박철원
야마모토 시에이(山本志泳) 조선 문학원 중국문학계 1941.9. 송지영
나카하라 스스무 (中原進) 일본 법상학원 1942.2. 조일문
미하라 세이이치(三原誠一) 조선 보습반 1942.2.
야나기 교로쿠(柳享祿) 조선 보습반 1942.2. 유향록
키야마 후쿠로쿠(木山福祿) 조선 법상학원 정경, 경제계 1944.5. 이복록
다나카 준이치(中田順一) 조선 선천 의학원 1944.5. 1945.6. 정영호
츠키에 토오루(月江徹) 조선 의학원 1944.5.

1940년 이전부터 충칭(重慶)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엄밀히 연락을 취하여 지하공작을 전개하였다.송지영(宋志英)·이일범(李一凡)·조일문(趙一文)·박철원(朴哲遠)·이정선(李正善)·신영묵(申榮默)·박익득(朴益得) 등과 접선이 된다.

중화민국 정부 난징 특파원 링즈난(凌志男)상교[6]의 지령으로 한·중 혼성된 구국청년군에 지원하는 애국청년들을 전후 4~5차례 걸쳐 비밀리에 초모후송는데, 매차 그 수효가 수 10명에 달하였다.

1940년 2월 난징 거주 교포인 정윤관(鄭允官)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각지의 공작대원에게 분배, 전달하였고, 그 해 7월 7일 난징에서 일본인 출입 음식점에 시한폭탄을 장치하여 일본인 5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7]
파일:k1052525028.1.jpg
상하이 동화극장(일본인 조계내 위치) 고노 켄로쿠 설계의 일본식 영화관·극장으로 1936년 완공. 일본 패전 후, 중국 해방극장으로 운영되었다.

그 후 후방에서 계속 밀파되는 유기석 소교[8] 등 5 ~ 6명의 공작원은 난징, 상하이 등지를 중심으로 모병, 첩보, 민심교란, 투탄파괴 등 공작사명을 띠고 상시 난징지구에 은신하고 활동했으며, 난징 동화극장(東和劇場) 및 국제무용청(國際舞踊廳)에 투탄사건 등 그 공작원들의 임무수행을 위한 협조 또는 은신처 제공 등 일체에 관해서는 전술한 왕하이칭(王海靑), 링단루(凌澹如), 렌시위안(任世源)씨 등이 전담 협조했었다.
① 애국 청년 규합 공작
② 일본군 동태 탐사
③ 초모 인원 후송 공작
등의 임무를 전개하고 있었으며, 특히 초모된 애국 청년들의 후송 임무는 왕하이칭·쑤징허(蘇景和) 등, 중국인 동창이 책임을 지고 충칭(重慶)과 시안(西安) 및 제3 전구 지역을 왕래하고 있었다.

이 무렵 쑤징허(蘇景和)은 신영묵·박익득(朴益得)을 안내하여 시안 광복군 제 2지대에 도착하여 난징(南京) 지구 지하 공작 상황을 이범석(李範奭) 지대장에게 보고하였으며, 이범석 지대장은 다시 임시정부 및 광복군 총사령부에 전보(轉報)함으로써 조일문·이일범 등은 난징(南京) 주재 공작 특파원에 임명되었다.

난징 국립중앙대학 총장 퇴출 운동(1943.5)과 아편 반대 소각 시위(1943.12)가 터진다. 1943년 5월, 난징중앙대학 학생운동은 교장 판중윈(樊仲雲)의 퇴출을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이유는 학생들의 식비를 착복하고 허술한 식사를 제공했다는 것이었다. 1943년 5월 31일 새벽 천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식당에 집합하여 대오를 만들고 이허로(頤和路) 왕징웨이(汪精衛) 공관에 이르러 부패 교장의 파면을 청원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국 학생들은 불행한 사태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미리 어떤 한 한국학생과 연락을 취하여 일본군 헌병대 쪽과 소통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왕징웨이(汪精衛) 정부는 학생들과의 담판을 거쳐 교장을 파면하고 동시에 학생 간부들을 체포하고 학생운동을 진압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고 적관을 일본으로 기록하기도 했던 한인 유학생들은 불안과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4. 일본 경찰로부터 체포됨


1943년 6월 중순[9], 충칭(重慶) 임시정부에서 밀파되어 중경에서 파견된 한국독립당 소속 김병호(金柄豪) [10]가 송지영의 거처로 찾아와 한국독립당 상하이ㆍ난징 지구 공작 임무를 맡아 줄 것을 제의했고 이에 송지영은 쾌히 승낙하였다.[11] 당시 김병호는 국내에 갔다가 돌아온 후 난징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베이징으로 떠났다.

김병호(金柄豪)가 상하이(上海)의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므로써 송지영도 임시정부의 비밀 공작원이라는 사실이 탄로나고 말았다. 송지영도 상하이에서 체포되었고 고문으로 인하여 이일범, 조일문, 이정선 등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시 난징(南京)에 있던 일본 헌병대와 영사관 경찰에서는 이같은 사태를 중대시하고 난징중앙대학에 재학중이던 모든 한국인 학생의 숙소를 수색하고 이들의 신변을 압축하였다.[12]

5. 난징 탈출

송지영, 이일범은 각각 17년 형을 선고받고, 조일문은 난징 중앙대학 궈꽝완리(國光萬里) 교수의 노력으로 난징특무기관(南京特務機關) 근무를 조건으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이일범의 매부 정윤관은 궈꽝완리(國光萬里) 교수를 일화 20만엔에 매수, 그를 통하여 일본 중지파견 헌병사령부(中支派遣 憲兵司令部) 특고과장 중좌(特高課長 中佐/성명미상)를 일화 100만엔에 매수하여 처남 이일범을 헌병총사령부 통역으로 근무하는 조건으로 석방시켰다. [13]

1944년 3월, 박철원(朴哲遠)으로부터 난징대 사건 발생의 소식을 상세하게 전해들은 유기석은 왕진 의사로 위장하고 난징(南京)에 잠입한다. 지하조직망의 재정비, 혁명 동지와의 연락 및 초모 공작을 위하여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난징(南京)으로 잠입, 이일범·조일문· 유익배(柳益培)·김해일(金海一) 등과 비밀히 접선하여 완난(晥南) 징시안(逕縣)으로 탈출로를 알려주었다.[14]

1944년 4월 초[15], 매부 정윤관 도움으로 박시춘(朴時春)이 인솔하는 서울신협가극단원 43명을 초청하여 일본군의 긴장을 느슨해짐을 틈타 특무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조일문과 함께 일본군 군사기밀을 가지고 탈출했다고 한다.
나카하라 스스무[16]는 적군 연락부에서 1주일 동안 몰래 탐지하다가 결국 한 무더기 중요한 기밀자료를 훔쳤는데, 칭따오靑島에서 샤먼厦門 연해에 이르는 적군 방어지도나, ‘광호光號 작전계획[17], ‘현재의 적 정황도’, ‘중국에 있는 조선인 반일분자 활동정황조사’ 등이 포함되어있다. 적에게 이것은 심각한 타격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전략부서, 방어계획 그리고 군사사업이 모두 누설되었기 때문이다. 적이 다년간 계획한 해상과 지면의 배치는 한 번에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태평양전쟁과 중국대륙에서의 항일 전쟁이 무기한으로 연장되면 작전계획의 발각으로 말미암아 적의 세력은 더욱 피동적인 지위에 처하게 될 것이다.

조일문과 이일범 두 사람은 적의 손으로부터 상급의 비밀자료를 훔친 후 4월 어느 토요일 오후에 쉬저우徐州나 카이펑開封 등지의 조선 친구 20여 명과 함께 몰래 난징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노정에 따라 우후蕪湖, 완지灣址, 시허西河 등지를 거쳐, 적의 거점을 돌아서 순조롭게 마두 봉쇄선에 진입했다.
...
(중략)
...
그들이 난징을 떠난 후, 다음 날은 일요일이라 적은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다. 월요일이 돼서야 헌병대나 연락부 등 기관은 많은 조선 관적의 인원이 출근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비로소 놀라 깨닫고 바로 검사를 했으며 한 무더기 기밀문건과 지도 등이 사라져 버렸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으며 적당한 조치를 취할 줄도 몰랐다. 그들이 전보로 각지의 수비군에게 뒤쫓고 뒷조사를 하라고 명령했을 때, 우리들의 친구는 일찌감치 안전한 지대에 도착했다.[18]
파일:한족동맹 이일범.jpg
Washington Registry Intelligence Field Files, 1942 - 1947 (Entry UD 108)
1945년 5월에 미 전쟁성에 생산된 문서로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보고에서는 한족동맹(Korean National League) 간부들을 일일이 나열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일범에 대해서는 한족동맹 조사위원회. 27세 남경중앙대 법학과 졸업. 일본 헌병대에 통역병으로 근무했다고 적혀있다.

이일범(李一凡) 1945년 3월 이후 중화민국 제 3전구 정치부 소속, 대적 광파선전대(廣播宣傳隊)[19] 소교[20]로 배속되어 일본군 포로 심사, 대일선전문을 작성 방송함으로써 일군에게 염전 및 반전사상을 고무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었다.

6. 광복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하자, 징모 제 3분처에서는 간부 20명을 중심으로 적군지역에 대한 초모 확대반 5개조를 조편성하여 파견계획을 완비하던 중 적이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여 총사령부 지시에 의한 적 점령지구 내의 교포 생명/재산 보전 및 한적 장병 수용 임무를 구축하고자 각 지구에 선발대를 파견하였으며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
우후지구(蕪湖地區) 박승학
난징지구(南京地區) 이일범, 박철원, 피문성
상하이지구(上海地區) 김룡, 박시준
항저우지구(抗州地區) 전호인, 정영호[21], 유익배

등이 파견되어 소임직무를 완축하였다.[22]

1946년 3월 4일, 상하이시에서 미군정에서 제공한 L.S.T.상륙정을 타고 3월 13일, 부산항에 귀국했다고 한다.[23]

7. 치안국 교육과장

파일:이일범 치안국.png

1947년 봄, 이순용[24]의 추천으로 미군정 CIC 요원으로 활동하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내무부 치안국 교육과장으로 특채되었다.[25]

1947년, 공산당이 합법적으로 활동하던 시대라 공산당 관련 조직을 검거하기 위해 김문호[26]와 공조로 조선상사주식회사 부사장 최창성, 사업부장 김찬도를 체포했고 북조선노동당 자금조달책인 서울시 미국인 시장 고문 박길용를 체포하여 북한 김일성이 남로당에 지원한 자금에 대한 수사를 했었다.

파일:조선민족청년단 서울시단부 발기인총회 19470520.png
1947년 5월 20일, 조선민족청년단 서울시지부 이사겸 사업부장을 역임한다.

파일:1948경교장 김구.png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장석윤치안국장으로 지프차 열쇠를 받아 부산까지 철수하게 된다.[27] 다시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게 되자 이순용을 통해 미 육군성 파견대로 정찰 임무를 수행했었다.[28]

파일:대남간첩단사건 이일범 기소.png

1952년 1월 특무부대 김창룡의 공작으로 당시 남로당 홍민표가 불법적으로 소지하고 있던 기관총과 탄약 500발을 증거로 압수하여 홍민표의 자백으로 거짓으로 꾸며내 한독당 출신 경찰인 이일범, 김용 등 숙군(肅軍)의 대상이 되었다.

1949년 백범 김구의 서거를 시작으로 한국독립당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 출신들이 정치계에서 숙청되던 시기가 이 시기이다.
파일:이일범경무관휴직.jpg
치안국 내무부 경무관 교육과장 소속으로 되어있으나 기소가 되어 휴직 중인 상태이다.

파일:대남간첩단사건 이일범 무죄.png

무죄선고를 받았다고는 하나 당시 사회상으로 북한 간첩으로 몰리면 사회적인 불링이 강하게 비난받던 시기라 상당히 고생했다고 한다. 1956년 1월 30일 이유회와 허태영 의해 특무대장 김창룡이 암살될 때까지는 감옥에 있었다고 한다.

8.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442·443·445·615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45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856면
고정훈, 秘錄 軍.(下) 고정훈. 동방서원 1967 pp. 372~377
유기석, 30년 방랑기 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출판사, 2012[29]
애국지사 정윤관 항일운동 공적서 자료 [30]
[1] 일본이름으로 추정, 리게타이[2] 30년 방랑기 유기석 회고록에서는 이수선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난징대학 중국학생들에게 부르기 좋게 만든 중국이름으로 추정된다.[3] 이일범의 공적정보[4] 현재 경찰청[5] 왕더지 주편, 난징대학100년사, 난징대학출판사(王德兹 主篇, 南京大學百年史, 南京大學出版社), 2002, pp. 242~254[6] 대령[7] 국제무용청(國際舞踊廳)에 투탄사건으로 추정된다.[8] 쑤베이 지방에서 유격대 근무한 이력으로 소령이란 계급을 가지고 있었다.[9] 김용의 회고록 p. 90에 따르면 송지영과 김병호와 접선해서 모의한 일을 1943년 6월 중순으로 기억하고 있다.[10] 김중민金仲民, 고중민高仲民, 전직 형사에서 임시정부로 귀순함.[11] 기말고사때라 이일범과 조일문은 김병호와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12] 1943년 7~8월즈음 체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용의 회고록에 따르면 9월 새학기가 되니 알고 있는 조선인 학생이 없었다고 한다.[13] 정윤관 증언[14] 30년 방랑기 유기석 회고록 참조[15] 유기석 회고록과 조일문의 증언에 따르면 1944년 4월 1일 토요일이거나 1944년 4월 8일 토요일로 추정[16] 조일문의 일본이름[17] 미군의 상륙에 대처하는 작전계획[18] 유기석, 30년 방랑기 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 p.319[19] 대적 방송홍보팀[20] 소령[21] 저장성 외교조원[22] 김승학, 한국독립사 제 2편 제 3장 제 6절 p. 302[23]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 2012, pp. 249~252[24] 미국 육군 중사 신분으로 CIC(미군 방첩대)에서 국무부 촉탁으로 일하며 백의사와 CIC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으며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도 기여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미군정(1948)이 해체되면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25] 김용의 회고록에 따르면 미군 CIC요원으로 시작했었고 그 당시 월급 5천원을 받았었다고 한다. 장관들 월급이 5천원이었으니 상당히 큰 돈이었다.[26] 광복군 제 3징모분처장, 육군 헌병총사령부 조사과장, 당시 계급 소령[27] 차량이 없던 광복군, 임시정부 출신의 인사들은 서울에서 탈출하지 못해 북한으로 납치된다.[28] 주로 북한군이 38선을 넘어서 서울에 침입한 목적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한 임무였다.[29] 이일범의 회고록은 없으나 중국 난징중앙대학 시절부터 치안국까지 함께하던 김용 지사의 회고록에 많이 언급되는 편이다.[30] 정윤관 후손측으로부터 받은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