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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6 13:26:24

박철원(1918)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일본이름 야마모토 테츠(山本哲)
출생 1917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사망 미상
본관 밀양 박씨
직업 동아일보 기자
만선일보 기자
학력 난징 국립중앙대학 농학원(農學院) 농학계(農學系)
독립운동 경력 한족동맹(韓族同盟) 총비서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 한교전지공작대 보조대장
(韓國光復軍 第三徵募分處 韓橋戰地工作隊)
중화민국 제 3전구 충의구국군(忠義求國軍)
묘소 알 수 없음
상훈 미서훈 애국지사
1. 개요2. 생애3. 난징 국립중앙대학 생활4. 독립운동5. 일본의 항복, 광복 이후6.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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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언론인, 한국광복군 한교전지공작대에서 활동한 미서훈 독립운동가

2. 생애

1918년 용인에서 출생했다. 일제의 압제를 피하여 망명하는 부친을 따라 중국 난징으로 갔다.
송지영과 함께 동아일보와 만선일보에 근무한 동료 기자였었고 송지영과 비슷한 시기에 난징 국립중앙대학에 입학한다.

3. 난징 국립중앙대학 생활

25세때인 1943년 난징 국립중앙대학 농학원 농학계 3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1940년대 국립중앙대학 출판물 중, 한인 입학생/재학생 기록[1]
성명 적관 전공학과 입/재학기록 졸업시기 본명
리게카이(李圭海) 조선 문학원 중국문학계 1940.9. 이규해
리 타카히로(李敬泰) 일본 법상학원 정경, 경제계 1940.9. 이일범
야마모토 테츠(山本哲) 조선 농학원 농학계 1941.2. 박철원
야마모토 시에이(山本志泳) 조선 문학원 중국문학계 1941.9. 송지영
나카하라 스스무 (中原進) 일본 법상학원 1942.2. 조일문
미하라 세이이치(三原誠一) 조선 보습반 1942.2.
야나기 교로쿠(柳享祿) 조선 보습반 1942.2. 유향록
키야마 후쿠로쿠(木山福祿) 조선 법상학원 정경, 경제계 1944.5. 이복록
다나카 준이치(中田順一) 조선 선천 의학원 1944.5. 1945.6. 정영호
츠키에 토오루(月江徹) 조선 의학원 1944.5.

이 당시 난징 중앙대학에는 한국인 학생 13~15명 정도 재학하고 있었다. 김용의 회고록에서 송지영, 이일범, 조일문 정영호, 박철원, 이규해, 유완, 이복록, 전원일, 김영휘, 박시준, 전채순 외 2명의 한국인 유학생이 더 있었다고 한다.

중국문학을 전공하던 3학년 송지영이일범, 조일문과 함께 독립운동에 관여하면서, 충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은밀하게 연락을 취하여 지하공작을 전개하였다.

한국인 교포들에게 대한 항일투쟁의 공작활동은 물론이고 같은 대학에 재학 중인 학우들과 더불어 조국 광복에 대한 토론과 애국, 애족 독립정신을 고양하여 유사시에는 즉각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는 태세를 정비해 나가고 있었다.

1943년 6월 말, 난징에서 지하 공작을 펴오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 김병호[2]가 상해 일본경찰 한인 밀정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난징 국립중앙대학들은 물론 화중(華中) 일대에 걸쳐 희대의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3] 이 때에 체포된 인원은 김병호(金炳豪) 외에 송지영(宋志英)·김덕원(金德元)·이일범(李一凡)·조일문(趙一文)·이정선(李正善) 등 수십 명에 이르렀다. [4]

그 후 일본 영사관 재판에서 김병호는 7년, 송지영은 3년, 김덕원은 1년 7개월의 징역 언도를 받고 일본 나가사키(長崎) 형무소로 이감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퇴거 처분 또는 기소 유예 등으로 방면되었는데, 이정선과 임세원(任世元)은 시안 경유 충칭으로 갔으며, 이보다 앞서 박철원(朴哲遠) 등은 제 3전구 지역으로 피신했고 조일문(趙一文)·이일범(李一凡) 등은 일본군에 인도되어 감시를 받게 되었다.

난징 국립중앙대학에 재학중이던 모든 한국학생들의 숙소를 수색함으로써 학생들의 학업은 중단하고 도피하여 독립투쟁의 길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4. 독립운동

박철원(朴哲遠)은 송지영이 체포됨으로써 정체가 들어날 위험에 직면해서 김용의 도움을 받아 항저우로 도피하였다.
1943년 6월말 경 항저우시에 온 지 며칠 안 된 어느 날 난징 국립중앙대학 농학원 박철원 형이 찾아왔다. 박철원 형은 대학동문으로 나의 선배이기는 하지만 나와 별로 가깝게 지내던 처지는 아니었다. 여기까지 어쩐 일로 나를 찾아왔는지 의문이 났지만 찾아 온 이유가 무엇인지 별로 관심을 두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룻밤을 쉬고 나서 박철원 형은 진화시에 가서 박규정 형을 찾아보려고 하는데 수중에 가진 노자가 부족하니 도와달라고 했다. 내 수중에는 가지고 있는 돈이 없어 천더썽(陳德生) 형을 찾아가 얼마간 돈을 융통해달라고 했다.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 묻기에 사실대로 말했다. 형은 돈을 빌려주면서 박철원 형의 사람됨을 캐물었다. 박철원 형이 자기한테 항저우시에서 항전지역과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를 물어보았다면서 나한테 그런 것 물어보지 않더냐고 반문했다. 나한테는 그런 일을 물어보거나 무슨 말도 한 일이 없었다. 박철원 형이 또 접근해 와서 무슨 부탁을 하면 알아서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도와주라고 하며 거동을 두고 보자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이 항저우시에 가서 진화시행 열차를 타고가는 박철원 형을 전송하고 돌아왔다. [5]

이후 그는 중국 제 3전구 항전지대로 단독탈출 충의구국군(忠義求國軍)에 입대하고 한국광복군 징모 제 3분처 절서분실장으로, 난징과 상하이 지구 초모공작을 맡아 활약하였다.

1944년 겨울, 저장성(浙江省) 티엔타이현(天臺縣) 티엔무산(天目山)에 주둔중인제 1정진유격종대사령부第一挺進遊擊從隊司令部(타오광陶廣 중장) 영하에 절서분실(浙西分室)을 설치하고 박철원씨를 분실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동 간부 전호인, 정영호 등을 항저우(抗州), 상하이(上海), 자싱(嘉興), 닝파(寧波) 등지에 파견하여 적전후공작을 전개하여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1944년 겨울, 와 보조대장 박철원(朴哲遠)은 수명의 대원을 데리고 그곳 주둔 군대가 우리들에게 준 임무를 집행하기 위하여 경현으로부터 마두(馬頭) 전선으로 갔다. 이곳은 적 군대의 거점 청과강진(靑戈江鎭)에서 겨우 십여 리里가 떨어진 곳이다. 마두진에는 한 중대 수비군이 주둔하고 있다. 거리 입구에는 목책과 철사그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것을 봉쇄선이라고 부른다. 우리들의 임무는 봉쇄선을 감시하는 것이며, 내지로부터 적을 도와서 전략물자를 운반하는 출구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김에 행적이 의심이 가는 행인과 밀수하는 악덕 상인을 조사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조사하고 보초를 서는 것 등은 모두 주둔군대가 책임지고, 우리들은 옆에서 감독 일을 할 뿐이다.[6]
Washington Registry Intelligence Field Files, 1942 - 1947 (Entry UD 108)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보고에서는 한족동맹(Korean National League) 간부들을 일일이 나열하여 기록하고 있다.

Strategic Services Unit, 미 전쟁성 [7]
국적 : 한국
제목 : 한족동맹(韓族同盟) 간부들, 마오린(茂林) 본부
문서기원 : 상하이
전구 : 중국
문서 생산날짜 : 1945년 5월
파일:The Officer of Korean National League_1.jpg
유수인 한족동맹 의장. 현재 제 3전구 한교전지공작대 주임. 41세 진링대학(金陵大學) 졸업. 향촌사범학교 교장, 남화한인연맹 가담.
박철원 한족동맹 총비서[8]. 제 3전구 한교전지공작대 대원, 27세, 남경중앙대 농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및 만선일보 기자.
전일 한족동맹 조사위원장. 30세이며 일본에 센슈대학(専修大學)에서 공부함. 만주의 조선혁명당[9]의 정보부장.
정동율 한족동맹 조사위원회. 43세, 숭실대학 졸업.
파일:The Officer of Korean National League_2.jpg
이일범 한족동맹 조사위원회. 27세 남경중앙대 법학과 졸업. 일본 헌병대에 통역병으로 근무.
안강 한족동맹 총무과장. 26세 일본중앙대 졸업. 안후이성(安徽省) 벙부(蜯埠)에서 일본영사관 직원이었다.
조일문 한족동맹 정치부장. 27세 남경중앙대 법학과 졸업. 일본군 특무부대에 통역병으로 근무.
김호 한족동맹 훈련부장. 32세 보성고등학교 졸업. 환남총사령부 고문.
류향 한족동맹 비서. 24세. 일본의 대학에서 다닌 적이 있다. 광신소학교 교장.
심용철 한족동맹 비서. 32세. 푸젠셩(福建省) 민생학교(民生學敎)[10]에서 훈련반 졸업. 난징괴뢰국(中華民國南京國民政府)의 훈련장교였다.
피춘여 한족동맹 총무부 총무본부. 26세 봉천대학
변일성 한족동맹 총무부 회계조장. 25세. 도쿄이과대학.
정람명 한족동맹 총무부처 공공복지담당. 26세, 평양전문의대 졸업. 약사
김형석 한족동맹 정치부 정보장교. 28세.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 분대장
파일:The Officer of Korean National League_3.jpg
한진원 한족동맹 선전부장. 38세. 피어슨 성경 기념 학원(Pearson Bible Training School)[11] 졸업. 한국광복군 대원
김해성[12] 한족동맹 징모처장. 28세 강계고등학교 졸업. 난징괴뢰국의 특무대원.
석원석 한족동맹 군사훈련장교 23세. 일본군 26사단 통역병.
박화 한족동맹 군사훈련장교, 22세. 난징중앙대 건축과 이수.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13]

5. 일본의 항복, 광복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하자, 징모 제 3분처에서는 간부 20명을 중심으로 적군지역에 대한 초모 확대반 5개조를 조편성하여 파견계획을 완비하던 중 적이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여 총사령부 지시에 의한 적 점령지구 내의 교포 생명/재산 보전 및 한적 장병 수용 임무를 구축하고자 각 지구에 선발대를 파견하였으며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
우후지구(蕪湖地區) 박승학
난징지구(南京地區) 이일범, 박철원, 피문성
상하이지구(上海地區) 김용, 박시준
항저우지구(抗州地區) 전호인, 정영호[14], 유익배

등이 파견되어 소임직무를 완축하였다.[15]

하지만, 광복 이후 행적을 찾아볼 수 없다.

6. 참고문헌

김승학, 한국독립사, 하권 267·323면
국가보훈부, 독립운동사 6권 444·615면
국가보훈부, 독립운동사 9권 857·867면
고정훈, 秘錄 軍.(下) 고정훈. 동방서원 1967 pp. 372~377
'Washington Registry Intelligence Field Files, 1942 - 1947 (Entry UD 108)
유기석, 30년 방랑기 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출판사, 2012
[1] 1940년 2월 11일부터 조선을 포함한 중국 일본군 점령지 안에서는 일본식 이름을 만들어 써야만 했다. 일본이름으로 써야만 대학을 다니거나 직장생활 등 사회생활이 가능했다.[2] 김중민, 고중민[3] 유기석 회고록에 따르면 조일문 지사가 가지고 나온 일본군 문서 중에서는 중국에 있는 조선인 반일분자 중에서 정희섭, 유익배등이 있었고 카이펑(開封)에 활동했던 동지들까지 1944년 10월까지는 따로 구출해서 경현으로 왔던 것으로 보인다. "나카하라 스스무(中原進)는 적군 연락부에서 1주일 동안 몰래 탐지하다가 결국 한 무더기 중요한 기밀 자료를 훔쳤는데, 칭따오(靑島)에서 샤먼(廈門)연해에 이르는 정국 방어지도나 광호(光號)작전계획(미군의 상륙에 대처하는 작전계획), 현재의 적 정황도, 중국에 있는 조선인 반일분자 활동정황조사 등이 포함되어있었다.적에게는 이것은 심각한 타격이다. 왜냐면 그들의 전략부서, 방어계획 그리고 군사사업이 모두 누설되었기 때문이다. 적이 다년간 계획한 해상과 지면의 배치는 한 번에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태평양 전쟁과 중국대륙에서 항일 전쟁이 무기한으로 연장되면 작전계획의 발각으로 말미암아 적의 세력은 더욱 피동적인 위치해 쳐해 있을 것이다."라고 회상한다. 유기석, 삼십년방랑기-유기석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 p.319[4] 김승학 지은 ≪한국독립사≫ 제6절 ‘한국광복군’ p.301.[5]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출판사, 2012, pp. 86~87[6] 유기석, 30년 방랑기 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 p.307[7]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 존재했던 미국 정부 의 정보 기관. 이는 전시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의 비밀 정보 및 대첩 부서로 1945년 10월 1일 창설된다. 이 문서는 중국전구(China Theatre)에 주둔하던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요원이 작성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 조직은 훗날 미국 CIA가 된다.[8] 유기석 회고록에선 보조대장으로 불린다. 유기석, 삼십년방랑기-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9] 양세봉, 지청천[10] 1937년 평민중학교(平民中學校)의 교사였다.[11] 現 평택대학교[12] 산시성 시안 2지대의 김해성과 다른 동명이인이다.[13] Washington Registry Intelligence Field Files, 1942 - 1947 (Entry UD 108),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소장[14] 저장성 외교조원[15] 김승학, 한국독립사 제 2편 제 3장 제 6절 p. 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