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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4 19:57:05

조일문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전국구 제12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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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일문.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나카하라 스스무
中原進
이명 조일민(趙逸民)
출생 1917년 12월 17일
함경남도 영흥군 순녕면 흥남리 93번지
(現 함경남도 금야군 영풍리)
사망 2016년 10월 7일 (향년 98세)
대전광역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477호
본관 한양 조씨[1]
학력 남경 국립중앙대학 법상학원 (정치학 / 학사)
서훈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1. 개요2. 생애
2.1. 초기 및 광복군 복무 시절2.2. 해방 후
3. 주요저서 및 번역4. 여담5. 선거 이력6.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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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교수, 정치인. 제8대 건국대학교 총장, 제12대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역임.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1917년 12월 17일 함경남도 영흥군 순녕면 흥남리 93번지(현 함경남도 금야군 영풍리)에서 태어났다.

일본식 이름은 나카하라 스스무(中原進)이다.

2.1. 초기 및 광복군 복무 시절

일본인 교사의 추천으로 1940년 8월 난징국립중앙대학[2] 법학과 입학하게 된다.
난징국립중앙대학에서 송지영(宋志英)·이일범(李一凡)·박철원(朴哲遠)·이정선(李正善)[3]·신영묵(申榮默)·박익득(朴益得) 등과 접선이 되었고, 이들 남경중앙대학 한인유학생들과 한족 동맹(韓族同盟)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중국인 동창이자 기숙사 룸메이트인 쑤징허(蘇景和) [4] 적극적인 협조로
① 애국 청년 규합 공작
② 일본군 동태 탐사
③ 초모 인원 후송 공작
등의 임무를 전개하고 있었으며, 특히 초모된 애국 청년들의 후송 임무는 왕하이칭(王海靑)·쑤징허(蘇景和) 등, 중국인 동창이 책임을 지고 충칭(重慶)과 시안(西安) 및 제3 전구 지역을 내왕하고 있었는데, 이 무렵쑤징허(蘇景和)은 신영묵·박익득을 안내하여 서안 광복군 제2 지대에 도착하여 난징(南京) 지구 지하 공작 상황을 이범석(李範奭) 지대장에게 보고하였으며, 이범석 지대장은 다시 임시정부 및 광복군 총사령부에 전보(轉報)함으로써 조일문·이일범 등은 난징(南京) 주재 공작 특파원에 임명되었다. (관련기사:https://www.youtube.com/watch?v=3mXFvnQyiRI)

1943년 6월, 충칭(重慶) 임시정부에서 밀파되어 송지영 등과 접촉한 바 있는 김병호(金柄豪)[5]가 상하이(上海)의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조일문도 임시정부의 비밀 공작원이라는 사실이 탄로나고 말았다. 송지영도 상하이에서 체포되었다.[6] 그리하여 당시 난징(南京)에 있던 일본 헌병대와 영사관 경찰에서는 이같은 사태를 중대시하고 난징중앙대학에 재학중이던 모든 한국인 학생의 숙소를 수색하고 이들의 신변을 압축하였다.[7] 만약 일제 헌병과 경찰의 행동 앞에서 결연한 행동의 선택이 없는 한, 모든 한국 학생은 송지영(宋志英)의 뒤를 이어 구속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한국 유학생들은 일제의 쇠사슬보다 죽음을 무릅쓴 탈출과 항일투쟁에의 길을 선택하였다.[8]

송지영, 이일범은 각각 17년형을 선고받고, , 조일문은 난징중앙대학 궈광완리(國光萬里)교수의 노력으로 남경특무기관(南京特務機關) 근무를 조건으로 석방됨 1944년초부터 일본군 특무부대 통역병으로 복무하게 된다.[9]

박철원(朴哲遠)으로부터 난징중앙대학사건 발생의 소식을 상세하게 전해들은 유기석은 왕진 의사로 위장하고 난징(南京)에 잠입한다.[10] 혁명 동지와의 연락 및 초모 공작을 위하여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난징(南京)으로 잠입, 이일범·조일문· 유익배(柳益培)·김해일(金海一) 등과 비밀히 접선하여 완난(晥南)[11] 징시안(涇縣) 마오린쥔(茂林鎭)으로 탈출로를 알려주었다.

조일문(越一文)은 탈출할 때 난징 주둔 일본군이 보관하고 있는 기밀문서를 대량 탈취 휴대하고 왔는데 이 기밀문서 중에는
① 일본군 병력 배치 상황
② 연합군의 기습 상륙 작전을 방어하기 위한 작전 계획
③ 중국 연해안(沿海岸) 탐측량(探測量) 군용 지도
④ 기타 기밀문서[12]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기밀문서는 곧 제 3 전구 사령장관 구주통(顧祝同) 상장[13]에게 보내지고, 이어 중국 군사위원회에 전보(轉報)됨으로써 대일 작전 수행에 크게 이바지 했던 것이다. 중국측과의 교섭으로 대원들의 보급 문제 등이 해결됨에 따라 전지공작대의 공작 활동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14]

이후 그는 한국광복군 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 강남분대(=한교전지공작대)에 편입되어 특파원으로 전방 및 적 후방 공작활동을 했다. 그 뒤 중국군사위원회는 기밀 문서들을 접수받은 뒤 조일문에게 직접 와줄 것을 요청했고, 이때 제3전구 전지공작대를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편성하기 위한 임무를 전달받아 중경 광복군 총사령부로 가던 중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2.2. 해방 후

귀국 후 1946년 숙명여자대학교 조교수에 임용되었고, 1947년 조선민족청년단 선전부장을 역임하고 정인보, 조소앙 등과 중앙훈련소에서 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48년 엄항섭 등과 김구의 남북협상을 수행하였으며,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나는 1948년 김구를 따라 「남북협상」에 참가했던 일을 잠시 되돌아보고자 한다.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은 개인 자격으로 초청되었으며 나는 한국독립당 5인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947년 유엔 총회는 소련의 반대를 물리치고, 남북을 통한 유엔 감시 하의 총선거로써 한국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북한이 유엔 선거감시단의 입경을 거부하였으므로, 유엔 결의의 실천은 난관에 부딪쳤다. 이에, 유엔 소총회는 가능한 지역, 즉 남쪽만의 총 선거를 결의했다. 이에 앞서, 이승만은 우선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세워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김구는 이러한 발상이 조국의 영구 분단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견지에서,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이승만의 주장은 공산당과 타협은 불가능하므로 먼저 남한만의 독자적 정부를 세우자는 현실론이었고, 김구의 주장은 조국이 분단될 수 없으며 만일 분단될 경우 동족 상잔의 비극이 뒤따른다는 명분론이었다. 결국 양론을 타협을 보지 못한 채 현실은 단일정부 쪽으로 기울어졌다. 물론 김구도 현실의 동향을 간파했다. 그러나 그는 골똘히 생각했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외국의 결정에만 맡길 수는 없다. 비록 성사를 이루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적어도 한 번쯤은 동포끼리 무릎을 맞대고 의논해 보아야 할 일이 아닌가?> 라고 "장부는 벼랑에서 손을 놓아야 한다."는 고능선의 교훈이 그의 머리를 스쳐갔을지도 모른다. 어쨋든 생각이 곧 실천으로 옮겨지는 것이 그의 오랜 행동철학이었다.

김구는 온갖 만류와 위험을 무릅쓰고, 38선을 넘어 평양에 갔다. 그러나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全朝鮮諸政黨社會團體代表者連席會議)」라는 이름으로 열린 남북협상은 공산주의자와 그 동조자들 사이에 진행된 일막의 정치극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 상 공산당의 기정 노선을 재확인하였을 뿐이었다.

폐회 전에 채택할 「연석회의 결정서」 기초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던 엄항섭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김구에게 달려왔다. 그는

"큰일 났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 박사와 그 추종세력을 모조리 반역집단으로 규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섣불리 거기에 동조하였다가는 설 땅을 잃게 될 것입니다."

라고 보고하였다. 유엔과 미 · 소 수뇌에게 보낼 메세지 기초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나의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조용히 듣고있던 김구는 조금 굳은 표정을 지었을 뿐,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김일성의 정치적 쇼는 이것으로 막을 내리고 4김회담[15]에서 알맹이 있는 성과를 거두기 기대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기대마저 아무 알맹이도 없는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또한 그가 오래 갈망하였던 조만식과의 회담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남북협상의 실패는 명분만으로 현실을 극복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남북협상을 통하여 김구의 통일 의지가 얼마나 강렬한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물론 그에게는 매명[16]이나 모험의 의도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는 단지 이것을 하나의 시도로 여기고 최소한도로 민족적 의무로 생각하였으리라

김구가 협상 길을 떠나기 전에 남긴 휘호에,
답설야중거 (踏雪野中去)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제
불수호란행 (不須胡亂行) 발걸음을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금일아행적 (今日我行跡)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수작후인정 (遂作後人程)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라는 것이 있다. 오늘 우리는 북녘을 향하여 끊임없이 이산가족의 재상봉과 경제 · 문화 교류의 평화통일을 노크를 하며 김구의 이 유묵을 되새긴다.

김구 암살 사건 이후 1952년 박용직 등과 함께 원외 자유당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1955년 건국대학교 법정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4.19 혁명 후 계훈제 등과 대한교원노동조합을 결성해 위원장에 선임되었으나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5.16 군사정변 후에는 저술 및 후학 양성에 매진하며 건국대학교 학생처장, 기획조정실장, 행정대학원장 등을 역임하였고 1980년 제8대 건국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건국대학교 총장 재직 시 1981년 대학육상경기연맹 회장에 추대되었고, 한국평생교육연맹 초대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83년 정년퇴임과 동시에 총장직을 퇴임하였고,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퇴임 직후 천관우에 이어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에 선출 되었다. 1984년 한중문화협회 회장, 영남학원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

국회의원 임기 중 6.29 선언제13대 대통령 선거 이후 민정당에서 발족한 민주화합추진위원회[17]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1988년 영남대학교 부정입학 사건에 책임지고 11월 영남학원 이사장직을 사퇴하였다.

1989년 김신공군참모총장에 이어 제2대 독립기념관 이사장이 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독립운동가 출신 국가원로로서 상해임시정부청사 복원사업, 중국인으로 광복군에 협조한 쑤징허의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에 힘을 썼다. 이후 독립기념관 이사, 건국대학교 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2016년 10월 7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2016년 10월 1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다.

3. 주요저서 및 번역

4. 여담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정의당 - 당선 (14번)

6. 참고자료


[1] #[2] 이 당시 난징국립중앙대학은 진링대학 터에 자리잡은 일본괴뢰국 왕징웨이 정부의 중국국립대학이다.[3] 여정순(呂正淳)[4] 쑤젠궈(蘇建國)[5] 1955년 10월, 특무대장 김창룡이 함정을 파놓은 이승만 대통령 암살음모자로 누명받아 명예복권이 안된 상태이다. 관련자료: https://youtu.be/CMkIzHBta_8?si=3EBZ-a5ymbkxpxQP[6] 김용의 회고에 따르면 송지영은 최상교의 밀고로 일본영사관 형사에게 검거되었다. 김용, 나의 길을 찾아, 도서출판 이화, 2012, p.90[7] 이때 체포된 인원은 김병호, 송지영, 김덕원, 이일범, 조일문, 이정선이다.[8]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pp.853~857[9] 한족동맹의 군자금을 지원하던 정윤관의 항일운동 공적서[10] 당시 상황에 대해 유기석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오래지 않아 우리들은 난징(南京)방면으로부터 전해온 희소식을 들었다. 일부 적군 속에 일하는 조선 청년들이 기의를 준비하는데, 후방으로 가서 항일운동에 참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정선은 적의 공군에 이일범은 헌병대에 조일문은 특무기관에 있었다. 그들은 아직 후방으로 가는 길과 연락 지점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잠시 기의를 일으킬 수 없었으며 후방에서 동지를 파견하여 기의작업을 지도하는 것을 책임지었으면 하고 희망했다. 이것은 나를 흥분하게 하는 소식이었다."(유기석, 삼십년방랑기-유기석회고록, 국가보훈처, p.331, 난징에서 유기석과 중앙대학 학생들과 접선 과장에 대한 내용은 p. 313~316)[11] 안후이성 남부를 의미하는 명칭이다.[12] "나카하라 스스무(中原進)[20]는 적군 연락부에서 1주일 동안 몰래 탐지하다가 결국 한 무더기 중요한 기밀 자료를 훔쳤는데, 칭따오(靑島)에서 샤먼(廈門)연해에 이르는 정국 방어지도나 광호(光號)작전계획(미군의 상륙에 대처하는 작전계획), 현재의 적 정황도, 중국에 있는 조선인 반일분자 활동정황조사 등이 포함되어있었다.적에게는 이것은 심각한 타격이다. 왜냐면 그들의 전략부서, 방어계획 그리고 군사사업이 모두 누설되었기 때문이다. 적이 다년간 계획한 해상과 지면의 배치는 한 번에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태평양 전쟁과 중국대륙에서 항일 전쟁이 무기한으로 연장되면 작전계획의 발각으로 말미암아 적의 세력은 더욱 피동적인 위치해 쳐해 있을 것이다."라고 회상한다. 유기석, 삼십년방랑기-유기석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 p.319[13] 중장에 해당한다.[14] 한교전지공작대 정보주임 김해일(金海一) 증언[15] 四金會談 :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회담[16] 賣名:이름을 팔아먹음[17] 민주정의당은 창당 이후 혁신, 재야 인사 영입에 관심이 많았다. 우당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 의원의 주도하에 야당 정치인이던 이재형, 의열단 출신 독립운동가인 유석현을 모셔왔고, 조일문의 동지이자 조선일보 주필이던 송지영, 이 친여 색채를 띈 것도 이와 연관되어있다. 노태우 정부 역시 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 통해 혁신, 재야인사를 영입하고자 하였고, 독립운동가이자 혁신 인사인 이강훈, 이동화, 신민당 고문이자 다선 의원인 김원만 전 의원 등을 영입하였다.[18] 김옥균의 갑신정변 회고록 번역[19] 건국대학교 설립자 유석창박사 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