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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00:21:31

장쉐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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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북양정부 실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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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총통 차오쿤이 우페이푸의 상관 겸 같은 직계군벌로서 실권을 행사했지만 영향력은 우페이푸가 더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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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군벌 수장]]
<rowcolor=#fff> 초대 제2대
장쭤린 장쉐량

<colbgcolor=#020894><colcolor=#fff> 봉천군벌 제2대 수장
중화민국 서북초비부사령관
중화민국 국가부주석 권한대행
중국국민당 연대국방개혁연합참모위원장 직무대리
장쉐량
張學良 | Zhang Xueliang
파일:장쉐량.jpg
이름 <colbgcolor=#ffffff,#191919>張學良 | 张学良
장학량 | Zhang Xueliang
아명 장샤오량(張孝良)
의암(毅庵)
한경(漢卿)
출생 1901년[1] 6월 3일
<colbgcolor=#ffffff,#191919>청나라 봉천성 안산부 해성현
사망 2001년 10월 14일 (향년 100세)[2]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
학력 동삼성육군강무당
직업 군인, 정치가
부모 아버지 장쭤린
어머니 자오춘구이
계모 라오서우쉔
형제 장충량
장쉐밍
배우자 자오이디(재혼)
위펑즈(이혼)
취루이위
자녀 4남 1녀
첫째아들 장뤼쉰
딸 장뤼잉
둘째아들 장뤼위
셋째아들 장뤼치
넷째아들 장뤼린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부친의 전사2.3. 열하사변과 패주2.4. 시안 사건과 연금2.5. 말년
3. 기타4. 역사적 평가
4.1. 엇갈리는 평가4.2. 만주사변과 부저항 장군4.3. 시안 사건에서의 전무후무한 트롤링 4.4. 장쉐량은 도대체 왜 그랬나?
4.4.1. 전근대 봉건영주 마인드 설4.4.2. 아편 중독설4.4.3. 부저항은 장제스의 의도 설
4.5. 각종 매체에서
5. 가족 관계6. 사진7. 같이보기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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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군벌, 군인이자 정치가. 한국식 독음인 장학량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청나라 시절 태어난 유명 인물들 중 쑹메이링 다음으로 가장 장수한 인물로 신해혁명, 군벌시대, 국민혁명, 만주사변, 중일전쟁, 국공내전, 문화대혁명, 천안문 사건 등 중국 근현대사의 사건들은 직접 보거나 경험했다. 1901년 출생 후 2001년에 향년 100세로 사망했으며, 상당히 장수했다. 그러나 인생 대부분을 가택연금 상태로 보냈다.

2. 생애

2.1. 초기

봉천군벌의 지도자인 '대원수'로서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장쭤린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쭤린은 1925년 일본 제국미쓰야 협정을 맺고 만주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장쉐량은 이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초기에는 반(反)국민당, 친일 성향을 갖고 있었다.

장쉐량은 동삼성육군강무당 1기로 입학하여 궈쑹링의 지도를 받았고 그에게 감복하여 의형제를 맺었다. 졸업 후 여단장에 부임했고 안직전쟁, 1차 직봉전쟁, 2차 직봉전쟁 등에 참여했다. 1925년 11월, 자신의 스승인 궈쑹링이 자신의 명의로 반봉사건을 일으켜 장덩쉬안을 죽이고 장쭤린, 양위팅의 하야를 요구하자 장쭤린은 장쉐량을 총살시키라고 소동을 일으키기까지 했지만 어디까지나 연기라서 그 뒤로도 봉천군벌의 주요 장령으로 활동했다.

2.2. 부친의 전사

1926년에는 국민당의 1차 북벌에 맞서 봉천군벌을 지휘했다. 중국국민당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분열해서 내분에 들어갔으나 영한합작을 통해 통합하여 1928년에는 국민당의 2차 북벌에 나서게 되었다. 국민혁명군의 공세에 봉천군은 패퇴를 거듭하여 베이징을 내주게 되었다.

그런데 봉천으로 퇴각하여 후일을 도모하던 부친 장쭤린이 관동군의 음모인 황고둔 사건으로 사망하고 일본이 매우 강압적으로 국민정부와 접촉하지 말 것을 요구하자 이에 반발하여 반일 감정을 품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자리를 승계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협조가 필수적이었으므로 집권 초기에는 쇼와 덴노의 즉위식에 사절단을 보내는 등 일본에 친화적인 모습을 보였다. 결국 일본과 장제스 사이를 오가는 줄다리기 외교 끝에 중국국민당에 입당하였고, 동북역치를 통해 난징 국민정부에 복속한다. 이후 양위팅, 창인화이(상음괴)를 비롯한 사관파를 숙청하여 권력을 공고히 하였으며 1929년 반장전쟁이 일어났을 때 줄곧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1차 장풍전쟁 정도에만 소극적으로 개입했지만 1930년 중원대전에서 막판에 장제스의 편을 들어줘서 국민당을 승리로 이끈 공로로 국민당의 2인자까지 꿰차게 된다. 이때 짧은 장쉐량의 전성기가 찾아오는데, 화북 지역 대부분을 점령하고 봉천군벌의 영향권으로 편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1929년, 만주의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중동로 사건을 일으켰다가 바실리 블류헤르가 지휘하는 소련군에게 두들겨 맞았고 일본이 화북을 들쑤시기 위해 일본으로 망명한 옌시산을 귀국시키는 한편, 1차 양광사변 이후 광저우 국민정부의 사주를 받은 스여우싼이 난을 일으키는 등 중원대전의 대승으로 얻은 영토는 자꾸 줄어갔다. 장쉐량은 얻은 영토를 사수하기 위해서 자꾸 만주 본토를 팽개치고 관내에 깊숙이 개입했다. 그리고 1931년의 만보산 사건나카무라 사건 때 일본의 도발을 야기할까봐 계속 부저항 정책을 고수했다. 이후 관동군 작전 참모였던 이시와라 간지의 주도로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사정은 급변한다.

장쉐량은 이를 기존과 같은 소규모 국지도발 정도로 오판하고 부저항 정책을 지시했으나 알고 보니 만주사변은 만주 전체를 침탈하려는 대규모 침공이었고 그간 장제스가 군사 지원을 빌미로 만주까지 먹어버릴까 봐 한사코 이를 거부해 온 장쉐량은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증원군을 요청하였으나 이미 초공작전1차 양광사변으로 정신 없던 장제스에겐 그럴 여력은 없었고 장쉐량 본인도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하다가 주요 도시를 다 날리고 열하까지 밀리고 나서야 뒤늦게 항전을 명령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이유인 즉슨, 사변 초기 (전면전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던) 장쉐랑이 일본군이 어떤 공격을 해와도 적대해서 저항하지 마라라는 사실상 비폭력 엄명을 내리는 바람에 쉽사리 밀리게 된 거고, 그 결과 얻게 된 '부저항'(不抵抗)이란 꼬리표는 장쉐량 생전은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따라다니게 된다.

2.3. 열하사변과 패주

그 후 자신의 16만 병력을 수습해 최후의 영지인 열하성을 통치했으나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다 열하사변에서도 패하고 산해관 안으로 철수, 왕징웨이를 비롯한 중국의 실력자들에게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는 맹비난을 받았고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장제스에게 사임 의사를 밝혔다. 사퇴 후 유럽으로 잠시 외유를 떠났다가 돌아와[3] 사실상 낭인 신세로 전락한 채 서쪽의 산시 성 부근에 주둔한다. 하지만 여기는 이미 군벌 양후청[4]이 거느리는 서북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더 서쪽인 옌안에는 막 대장정을 끝낸 마오쩌둥의 공산군 약 4만명이 자리잡고 있었다.

때문에 장제스는 여기 주둔한 장쉐량을 서북 초비 부사령관으로 임명 후 공산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후 공산군의 게릴라 전술에 번번히 참패한 장쉐량은 점차 이렇다 할 지원 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는 장제스에 대해 불만을 품고 비밀리에 공산군과 강화를 맺고 장제스에게 초공을 중단하고 공산당과 합작하라고 간곡히 설득했지만 장제스는 크게 화를 내면서 거부하고 정 초공이 싫으면 복건성이나 안휘성으로 떠나라고 했다. 하지만 복건이나 안휘로 떠난다는 것은 초공은 안할 수 있어도 더 이상 중국 정치계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는 의미였으므로 장쉐량으로서는 따를 수 없는 조치였다.

2.4. 시안 사건과 연금

결국 장쉐량은 1936년 12월 12일, 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이 사건으로 장쉐량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장제스는 즉각 사면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10년을 공들인 초공작전을 망쳐놓은 장쉐량에게 큰 원한을 품은 장제스는 장쉐량을 절강성에 가택연금시켰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진 후에도 여기저기 끌려다녔다. 중일전쟁 후 만주 지역의 민심 수습을 위해 장쉐량을 동북지역으로 파견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이 있었지만 장제스는 이를 묵살하고 장쭤린의 의형제 장쭤샹을 선택했으나 장쭤샹은 정치에서 은퇴한 상태라 그 역시 거절했다. 장제스는 1949년 12월 7일 국부천대 때도 장쉐량을 잊지 않고 대만으로 끌고 갔다. 이후 외부와 연락이 차단되면서 최종적으로 신주 현으로 이동했다.

1954년 외출 허용 등 연금이 완화되었지만 여전히 외부와의 접촉은 차단되었고, 가택연금에서 풀려나려고 반성문을 써가는 과정에서 오른쪽 눈에 이상이 생기면서 반 실명상태가 되었다. 어쨌든 가택연금은 장징궈 시절에도 지속되었고 공식적으로 명예가 회복된 것은 리덩후이 총통 시대 때로 1990년 생일 때 생일축하연을 대만 총통부에서 직접 열면서 공식적으로 명예가 회복되었고, 1993년이 되어서 연금 상태에서 풀려났다. #

2.5. 말년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뒤로는 자신의 동생과 조카가 살고 있는 미국 하와이로 가서 여생을 보냈다. 여하튼 하와이에서 여생을 보낼 때 중국대만 양측에서 장쉐량에게 러브콜을 보내기도 했다. 중국과 대만 가운데 어디로 갈 것인지 묻는 질문도 받았는데, 그때마다 장쉐량은 "난 국민당도 공산당도 아니다."라면서 이를 일축했으며 2001년 10월 14일, 미국 하와이에서 향년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

그는 중국 현대사의 산증인이었다. 중일전쟁, 국공내전을 몸소 체험했다. 공산당이 대륙을 통일 한 후에 대약진 운동문화대혁명으로 중국 전역이 혼란을 겪고 뒤 이어 개혁개방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또한 대만의 국제적인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편으로 대만이 민주화되면서 그 수혜를 입기도 했다. 국민당이 선거를 통해 정권을 상실하고 천수이볜이 총통으로 등극하는 순간도 목도했으니 그야말고 살아있는 역사였던 셈이다.

3. 기타

4. 역사적 평가

4.1. 엇갈리는 평가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인물. 중국공산당 측의 평가는 대단히 우호적인데 반해 중화민국 계열이나 한국 역덕 커뮤니티에서의 평가는 매국노, 저능아 수준의 악평을 받는다. 거진 원균이나 무타구치 렌야에 비견될 정도의 트롤러로 비판을 받는다.

특히 시안 사건으로 중국 내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린다. 중화인민공화국 측에서는 시안 사건을 '구국의 결단'으로 평가하여 그를 제2차 국공 합작을 이루어내 항일 전쟁에 공헌한 애국자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실 장쉐량이 시안 사건을 일으킨 이유가 뭐든간에 시안 사건이 아니었다면 중국공산당이 소멸되었을지도 모르니 어찌 보면 당연지사였다.[13]

반면 중화민국중국국민당에서는 그야말로 역적 취급. 공산당과 일본제국의 프락치라 취급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행적 덕분에 한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훗날 장제스는 "8년간 들인 공(공산당 토벌 작전)이 불과 2주일 만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라고 치를 떨었다.

또한 장쉐량은 행적 외에도 인격과 역량, 인간상의 측면에서도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린다. 장쉐량은 특유의 귀공자스러운 곱상한 외모로 인해 공산당 측의 다큐멘터리나 드라마 같은 매체에선 한없이 영웅으로 미화되고 있다. 반듯하고 올바른 청년 혁명가 그 자체로, 거의 정의의 용사 급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반면 비판 측에서 장쉐량을 평가할 땐 외모와 정반대로 인격이 비열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악평이 많이 나온다. 한 마디로 호부견자라는 것이다. 호탕한 성격을 가졌으며 허허벌판이었던 동북지방을 공업화시키고 중국 최대급의 세력을 일궈낸 아버지 장쭤린의 그릇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평가다.

장쉐량은 전형적인 후진국 독재자스러운 면모, 비유하자면 김정일, 김정은과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파티를 신나게 벌이다가 수틀리면 부하를 잔인하게 사살하거나 아편, 사치와 향락에 몰두하는 모습이 많았다. 후술되겠지만 장쉐량은 특유의 기이한 행보를 많이 보였다. 대표적으로 만주사변에서의 대응이나 시안 사건에서의 괴이한 행적을 예로 들 수 있으며 일각에선 방탕한 사생활 및 아편 중독 때문에 머리가 망가져 대국을 그르친 것은 아닌가 하고 추측을 할 정도다.

장쉐량 본인은 육성 회고록에서 '군인으로서는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으나, 이 일에 대해서는 양심에 있어서 떳떳하다. 1936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주저 않고 다시 시안 사건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하여 이 사건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육성 회고록은 장쉐량이 아직 연금 상태였던 1990년대 초에 녹음된 것이며 본인이 컬럼비아 대학에 기증했다. 양안 관계로 인해 이 자료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회고록에서 장쉐량은 장제스가 중국을 통일할 인물이라고 생각했기에 풀어 주었으며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 정작 장제스가 중국을 통일할 수 있던 순간을 본인이 시안 사건을 통해 완벽하게 말아먹었다는 것은 꽤나 아이러니한 부분.

4.2. 만주사변과 부저항 장군

만주사변 당시 동북군에게 내렸던, '저항하지 말고 관동군에게 협조하라'라는 부저항 명령 때문에 만주 전역을 일본에게 빼앗긴 점에 대해서도 큰 비판을 받고 있다. 이 '부저항'이란 꼬리표가 아직도 유행할 정도다. 흔히 원균 하면 누구든 칠천량 참패를 떠올리듯, 장쉐량 하면 '부저항 장군'으로 통하는 급으로 낙인이 찍혀 버린 것이다.

장쉐량은 질은 처참했으나 어쨌든 규모만은 거대했던, 정규군만 30만명 규모의 최대 군벌세력인 동북군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0,000명 수준의 관동군 침략에 무대책으로 방관했다. 요충지가 시시각각으로 함락됨에도 상황 파악은 하지 않고 늘상 있던 국지도발에 불과할 것이라 치부하며 외교적 협상에만 지나치게 목을 맸다. 기도 메타에 올인하며 그야말로 우유부단하고 지리멸렬한 대응으로 일관한 것이다. 이 때문에 중국 공업력의 코어였던 만주를 순식간에 실함하게 되었다.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은 장쉐량이 군벌로서 동북 지방은 팽개친 채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화북 지방의 땅따먹기에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행보라고 욕을 먹는 부분이다.

장쉐량은 수하들의 봉천 복귀 권유도 무시하고[14] 동북군의 기량이 처참하게 몰락하는 것도 방치한 채[15] 주력 부대 절반을 베이핑에 박아두고 있었다. 동북 지방에 잔류한 부대는 질이 형편없었고 만주의 상황이 심각함에도 주력부대는 북경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방관에 더한 부저항 지시 때문에 그나마 전투력이 있는 동북군들도 제대로 된 대응이 되지 않은 채 처참하게 박살이 나버리거나 관동군에 고스란히 항복했으며 전쟁 발발 이후 고작 몇개월 만에 만주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중국은 만주 상실로 인해 중국 최대 규모[16]의 수많은 중공업 시설과 군수품 생산단지, 전략적 요충지를 날려먹음으로서 전쟁 동력에 크나큰 데미지를 입게 되었다. 거의 중국을 팔아먹은 매국노로 봐도 될 정도의 행적이다.

시안 사건 당시 장쉐량이 내세운 명분이 동족끼리 싸우지 말고 일제에 대항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항일투사 코스프레는 실컷 하는 인간이 정작 일본이 침략해 왔을 때 내렸던 명령은 일본에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었으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장쉐량이 적극적으로 나라를 망칠 의도가 있지 않고서야 내릴 수가 없는 미스테리한 명령이다. 장쉐량 본인도 '당시 일본의 의도를 몰라서 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나의 책임이다. 일본의 침략 의도를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책임을 인정했다.

시안 사건에서 내세웠던 장쉐량의 항일 명분은 정말 코스프레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장쉐량은 일본은 무서워하면서도 훈련 등의 군대 강화 노력 역시 도외시했다. 아버지 장쭤린폭사시킨 게 일본인데 복수를 위한 군비 강화와 군제개혁은 커녕 일본 영사에게 친일 약속이나 해대며 군벌의 생존을 위한 줄타기만 하던 게 장쉐량이었다.

이 때문에 만주사변 막바지인 1931년 말 관동군의 남하 상황에서 국민정부의 항전 지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쉐량의 선택은 오로지 후퇴 뿐이었고, 관동군은 진저우에서 무혈입성했다. 더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장쉐량이 국민정부의 중앙군 북상 제안을 얼버무리는 식으로 거절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화북 세력권이 침탈당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장쉐량의 저자세 외교는 극히 호전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일본 군부에 더더욱 극도의 저자세 외교를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을 가져오고 말았다. 일단 장쉐량의 동북정권은 근본 자체가 일본에 의존적이었다. 동북정권이 만주, 화북을 아우르는 거대 군벌로 성장하는 데에 일본의 지원이 핵심적 역할을 했고, 이건 부친 장쭤린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장쭤린은 지속적으로 일본에 이권을 뜯겨왔고, 종국에는 반쯤 조종당하시다시피 하는 처지로 전락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결국 장쭤린은 여기에 저항하다가 일본에 폭사를 당해버렸다.

그러나 동북정권은 창업자의 폭사라는 전무후무한 사태를 목도하고도 복수는 커녕 여전히 일본에 굴종하며 장제스와 일본 사이에서 간을 볼 뿐이었다. 동북정권의 수뇌부엔 친일 성향의 인물들이 수두룩하게 포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장징후이 같은 원로들은 만주사변 당시 관동군에 적극 협력하며 만주국 성립 이후 총리가 되기까지 했다. 또한 장쉐량은 소련 등의 열강에 처참하게 깨지는 동북군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관계를 이어오고 있던 일본에 대한 외교적 협상 외의 다른 해결책을 전혀 모색하지 않았다.

물론 만주사변 이후 시점에선 장쉐량과 동북정권이 꿔다놓은 보릿자루만도 못한 한심한 능력을 보인 탓에 일본이 굳이 장쉐량과 협상해 줄 이유가 없었다. 줘패고 땅이든 이권이든 강탈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즉, 부저항과 굴종으로 일본을 달래고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쉐량의 생각은 그저 망상에 불과했다.

게다가 관동군은 일본 본국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광인처럼 날뛰는 상태였으므로 부저항과 협상, 외교적 시도는 전혀 먹히지 않는 상황이었다. 통제는 커녕 일선 지휘관들이 개인의 공적을 위해 자기 맘대로 도발과 침공을 일삼고 정부가 거기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기나 하던 게 일본이었으니 말이다. 최소한 야욕에 불타던 관동군은 절대로 만주 침략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부저항 지시를 내려봐야 관동군에 자동문을 열어주기만 할 뿐, 결과적으로는 만주를 송두리째 넘기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장쉐량의 무사안일주의와 극도의 부저항주의가 중일전쟁의 커다란 주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전쟁만 하면 마치 썩은 짚단 마냥 무너지는 중국군, 전쟁만 하면 늘어나는 영토와 쏟아져들어오는 이권, 전리품, 일본 내부에서도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중국과는 전쟁 안 하는 게 바보다'라는 확전 여론만 팽창시켰으며, 결국 중일전쟁이 시작될 무렵 일본 본국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만다.

만주 사변 이후에도 장쉐량은 자기 세력권 보존과 병력 아끼기에만 몰두하며 군벌스러운 행태만을 보였으며 공산당과의 전투에서 졸전을 거듭하였다. 어처구니 없는 만주 상실 사태로 인해 장쉐량 뿐만 아니라 장제스 또한 모두 어마어마한 여론의 성토를 받았는데, 그런 장제스로서는 장쉐량을 곱게 대하려야 대할 수가 없었고 장쉐량은 점점 배척받았으며 둘 간의 갈등은 증폭되어 갔다.

4.3. 시안 사건에서의 전무후무한 트롤링

장쉐량이 만주 사변에 이어 시안 사건에서 두번이나 국민당의 발목을 잡은 것은 장제스와 중화민국 정부의 중국 본토 상실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장쉐량은 시안 사건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상관인 장제스를 납치, 구금하여 공산당 토벌 중단과 일본과의 결전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장쉐량이 쿠데타를 일으켜 가며 무리하게 밀어붙인 국공합작은 결국 중화민국의 몰락을 야기했다. 중일전쟁에서 일본과의 교전을 회피하며 세력 확장에 골몰한 공산당만 일방적으로 이득을 보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이러니 중국공산당이 장쉐량을 칭송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공산당 측의 사관을 본인의 조선민족주의적 성향에 맞게 체리피킹하는 김용옥도 장쉐량과 시안 사건을 대단히 고평가하고 있다. 중국 민족의 좌우 분열을 그치게 하고 단합하여 일제에 항거하게 만든 영웅적 행적으로 평가하는 식이다. [17]

당시 장제스의 대전략을 분석해 보자면, 당시 중화민국이 가진 국력으론 결코 일본과의 결전에서 승리할 수가 없었으며 참혹한 피해만 초래할 것이 자명했다. 심지어 상술한 장쉐량의 부저항 삽질으로 중화민국 공업의 핵심인 만주마저 상실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장제스는 내부의 분열을 야기하는 공산당을 토벌함과 동시에 국력을 끌어올려 1940년 시점에서 대일전쟁에 돌입하겠다는 대전략을 세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장쉐량은 중화민국의 대전략을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장제스가 장쉐량 본인의 세력권인 만주 수복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반감을 품다가, 공산당의 포섭에 넘어가 '같은 민족끼리 싸우지 말고 일본부터 몰아내자' 는 명목으로 전무후무한 쿠테타를 일으켜 버린 것이다.

결국 공업력과 공세 역량을 성장시키며 전선을 유지하다가 1940년 이후에 만주를 수복하려 했던 장제스의 대전략은 완전히 어긋났으며, 그 때문에 중일전쟁에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게 되었다. 후스가 당시 중국이 일본과 싸울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고 지적한 것처럼 개전시점이 완전히 어긋나 독소전에서의 소련과 같은 참담한 패전을 수도 없이 겪게 된 것이다. 중일전쟁은 사망자만 2천만명이 넘어가는 대단히 참혹한 전쟁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섬멸 직전의 위기에 몰려 위태로웠던 공산당이 살아남아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고 중일전쟁 이후 공산당이 승리하는 발판이 되었다.

장쉐량이 주장한 국공합작은 현실과는 대단히 동떨어진 부분이 많았다. 장쉐량은 민족 화합을 구실 삼았지만 항일은 안하고 내부 총질에 골몰하던 문제는 공산당이 훨씬 심각했다. 공산당은 중일전쟁 내내 항일은 시늉도 하지 않고 세력 불리기에만 목을 매는 행보를 보였다. 국공합작 이후에도 국부군 통수치고 기습하기와 해방구 알박기, 인민들에게 마약팔아 돈벌기 등 항일은 나몰라라하고 뒤통수로만 일관한 것이다. 국민당이 일본에 학살당하다시피 쥐어 터지며 가까스로 버티는 동안 공산당은 일본군이 접근해오지 않는 내륙에 짱박혀 농사를 지었고, 일본과 싸우기 싫은 병역기피자들이 공산당에 몰려들어 인구와 당원수가 폭증했다.

우리 힘의 70%는 세력을 확장하고, 20%는 국민당에 대응하고, 10%는 일본에 대항하는데 활용할 것이라는 마오쩌둥의 훈시는 매우 유명한데, 10%나마 일본에 대항하긴 했는지 의문스럽다는 게 후대의 평가이다. 사실상 중일전쟁 내내 공산당은 내부를 좀먹는 암덩어리이자 기생충으로서 빨리 때려잡아야 조금이나마 항일전쟁에 승산이 생기는 부분이었고, 따라서 장제스의 입장에서 항일 이전 공산당 토벌은 매우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중국공산당은 빈사상태에 몰렸다. 초공작전으로 얻어 터지던 공산당은 섬서성에 몰린 끝에 항일을 명분삼아 옌시산염계군벌 영역을 침공하다가 대참패를 겪는 등 바람 앞의 촛불 신세였다. 그러나 장쉐량의 시안 사건 트롤링 한 방으로 다 때려잡은 공산당만 놓친 데다 중일전쟁은 말아먹고 나라가 송두리째 망해버린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마오쩌둥이 중국 통일 후에 보인 잔인한 숙청 행보를 되돌아보면 만주를 다시 수복하고 일본군을 쫒아내면서 대륙을 통일했어도 머지않아 장쉐량도 숙청했을 확률이 높았다. 따라서 공산당 측의 국공합작 및 장쉐량 포섭 제안엔 진심이 전혀 담겨있지 않았으며 장쉐량을 자기 입맛대로 속이고 이용해먹기 위한 쪽이라는 데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공산당이 당면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장쉐량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항일을 핑계로 공산당 토벌을 중단시킨 것이다.

사실 장쉐량 역시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항일에 그닥 관심 없는 이기적인 군벌에 불과했다. 장쉐량 또한 굳이 공산당과 싸우며 손해를 보기 싫은 등의 이해관계가 매우 일치했다. 장쉐량은 입으로는 항일과 동족 간 화합을 내세우며 애국자 행세를 했지만, 실상 그는 제대로 된 항일은 커녕 발목만 잡았으며 일관되게 자기 영지인 만주 수복에만 관심을 보여왔다. 애초에 아버지가 폭사당했는데도 일본에 굴종하며 협상하려 애쓰고 부저항 명령을 내린 게 장쉐량이었다. 그런 장쉐량은 공산당의 낚시질에 너무나도 잘 낚여들었다.

물론 공산혁명이 목적인 공산당의 입장에서야 이 일련의 행보는 매우 합리적이다. 항일을 내세워 국공합작 낚시질로 토벌을 피하고, 그 와중에 항일전쟁은 나몰라라하며 세력만 키운 것이 국민당에겐 손해겠지만 공산당에겐 결정적 승리의 기반이 된 것. 그러나 장쉐량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국민당과 장제스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세계관에서 살아갔으며 국민당 소속의 군벌일 뿐 딱히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런 장쉐량이 공산당의 사탕발림에 속아넘어간 끝에 마리오네트가 되어 공산당 좋은 짓만 다 한 것은 장쉐량의 현실인식능력이 매우 처참하고 유아적이라는 방증이다. 결국 장쉐량은 저우언라이가 빨간펜 첨삭지도 해준 대로 시안 사건이라는 전무후무한 깽판을 쳤고, 공산당은 어마어마한 이득을 보았으며, 중화민국은 중일전쟁에 빨려들어가 일본에 끝없이 박살나며 수습 불가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4.4. 장쉐량은 도대체 왜 그랬나?

장쉐량은 시안 사건에서 국공합작과 항일 민족주의를 설파했지만, 정작 만주 사변으로 만주를 장악한 일본에 부저항으로 일관하는 등, 그 행적은 그의 주장과는 모순된 점이 많았다. 이에 대한 설명이다.

4.4.1. 전근대 봉건영주 마인드 설

1. 만주땅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내 영지다. 만주를 통치하는 것은 당연한 내 권리다.
2. 근데 장제스가 (내가 열하사변에서 날려먹은) 만주 수복을 하나도 안 해주고 벽지에 쳐박고선 공산당과 싸우라고 한다.[18]
3. 어? 또 졌네? 열받네? 내 군대 다 날려먹고 만주에도 못 돌아가고 나만 억울하네? [19]
4. 마오쩌둥 : 이봐, 장쉐량! 장제스는 항일은 안하고 동족이나 죽이는 놈이잖아? 우리 싸우지 말고 같이 항일 하면서 만주도 수복하자.[20]
5. 와!! 내 맘 알아주는건 마오쩌둥 너밖에 없어! 빨리 장제스를 납치한 다음 만주로 쳐들어가자고 협박해야지!

만주사변부터 시안 사건까지 장쉐량이 저지른 일련의 행적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자기 땅 지키는 것에만 관심 있는 봉건제 영주, 사실상 만주왕의 자세로 이해하면 대체로 설명이 된다. 즉, 중국은 나라가 임금의 소유물이던 시대에서 사회계약으로 맺어진 현대 국민국가로 (국체뿐 아니라 인민 스스로 생각하는 국가관까지 포함해서) 이행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는데, 국민당과 공산당은 적어도 그 부분에서는 구상이 명확했다.

그러나, 장쉐량의 개인적 배경은 다른 군벌들과 비교해서도 혁명사상을 접한 것으로 보이는 그렇다 할 행적이 없었다. 일본에 붙었다 국민당에 붙었다 공산당에 붙었다 하는 모습은 현대 시점으로 평하면 상당히 얍샵하고 치사하게 보이지만, 봉건주의의 '자기 세력권 지키기/돌려받기' 라는 대원칙을 상정한다면 꽤나 일관적인 셈이다. 비유하자면,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가 침공당한 자기 영지를 지켜주지 않고 봉건 계약을 이행하지 않은 황제에게 불만을 품고 깽판을 친 셈이다. 물론 당시가 중세시대도 아니고 각국의 민족지도자들과 애국자, 사상가들이 조국을 지키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는 와중이었다. 그런데도 장쉐량은 유독 뒤쳐진 채 나홀로 전근대를 살아가면서 봉건적 지방 토호같은 행보만 보였으니 황당하기는 하다. 그러나, 어쨌든 장쉐량은 리더로서 비전을 제시하기에는 그릇이 작은 사람이었다.

또한 장쉐량이 일본과의 외교와 전쟁에서 '부저항' 이라는 극도의 수동적 태도를 보인 이유도 봉건제 마인드 하나로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는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독립국 군주처럼 굴었는데, 국민국가와 다르게 봉건 영지의 영주나 호족은 모시는 주군을 갈아탐으로서 자신의 봉건적 이권을 유지할 수 있다. 장쉐량의 수하 군벌들도 만주국 성립 이후 너나 할 것 없이 친일파가 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즉, 장쉐량이 국민당 정부와 일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눈치를 본 것은 구식 봉건 영주로서는 할 수 있을 법한 처신이었다. 통제에서 벗어난 관동군이 침략에 정신이 미쳤을 뿐, 그전까지 장쉐량과 일본은 커넥션도 끈끈했고 만주땅의 이권을 갖다 바친다면 본격적 친일파로 줄을 갈아탈 만한 여지도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만주 사변 당시 장쉐량이 확전을 극도로 회피하고 단독 협상에 눈이 멀었다고 해석하는 쪽이 자연스러우며, 실제 행적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장쉐량에 대한 평가가 한간 또는 선각자라고 극단적으로 평이 갈리는 것도, 그의 행적들을 이후 국민당원과 공산당원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일 뿐, 그는 그냥 옛날 사람으로서 '옛날 사람이 했을 법한 일'을 했을 뿐이라는 평이다.

4.4.2. 아편 중독설

만주사변 당시의 대일 부저항을 두고, 장쉐량이 당시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장쉐량은 아편에 중독된 상태였고, 이 때문에 건강이 크게 망가져 있었다. 외모만 봐도, 동북역치 ~ 만주사변 때와 시안 사건 이후 연금 생활을 할 때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확연하게 차이난다. 이런 건강 문제 때문에 장쉐량이 판단력이 흐려져서 '부저항'이란 결정을 내린 게 아니냐는 해석이다. 장쉐량이 수하들의 봉천 복귀 권유를 무시하고 만주가 아닌 베이징에 박혀 있었던 것은 확실한데, 아편 중독설 외에도 지나친 여색 혹은 연극 관람에 빠져 있었다는 설과 장티푸스를 치료 중이었다는 설, 혹은 장티푸스를 핑계로 아편 중독을 치료했다는 설들이 존재한다.

4.4.3. 부저항은 장제스의 의도 설

近來對日外交性情緊迫, 彼國朝野上下公然密謀侵佔我東北(彼方謂為滿蒙), 勢甚積極, 不可終日.
근래 대일 외교의 형세가 긴박합니다. 일본은 조정과 재야 상하를 가리지 않고 공공연히 우리의 동북(그들 말로는 만몽)을 침공할 것을 밀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 또한 적극적이며 끝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당시에 장쉐량이 장제스에게 보낸 전보문 중 일부분, 차이잉원 정부에서 공개.

통념과는 달리 장쉐량은 만주 사변 당시 일본의 야욕을 알고 있었으며, 부저항은 오히려 장쉐량 본인이 아니라 상관 장제스의 의도였다는 주장이 제시되고 있다.[21]
다만 이런 주장도 설득력이 부족한 것이 장쉐량은 장제스의 명령을 무시하는 상태였고, 만주의 독립세력으로 컨트롤이 거의 되지 않았다. [22] [23] 세금도 안 보내고 온갖 명령을 다 씹던 치사한 인간이 부저항만 장제스가 시킨대로 했다는 주장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만에 하나 부저항이란 명령이 내려왔다 한들 장쉐량이 매번 하던 것처럼 명령을 무시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었으니, 부저항은 철저하게 장쉐량 본인의 의중에 맞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또한 위의 전보문은 장쉐량이 일본의 야욕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설명해주지만, 장제스가 부저항이란 명령을 내렸다는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 윗 문단의 주장은 장쉐량을 추켜세우고 장제스를 깎아내리고자 하는 중국 공산당 측의 입맛에 맞는 내용이며[24] 통념을 반박하기는 커녕 전형적 음모론에 가까운 것이다. 또한 '장제스가 부저항하라고 장쉐량에게 시켰다, 모두 장제스 때문이다'라는 주장이 오히려 기존의 통념이며, 현대 중국 공산당이나 중국인들의 일반적 상식에 가깝다. 그런 내용의 책들이 한국의 서점에 깔려 있고 도올 같은 대중 지식인이 TV에서 그걸 정설인 것마냥 강의하는 것이 현실이다.

장제스는 왕징웨이와의 내전[25], 초공작전까지 중지하려는 움직임과 함께 군대를 북상시켰다. 만주사변이 아니었다면 광저우 정부는 더 이상 살아남지 못했을 것인데 만주사변에 대응하느라 모든 것이 틀어지게 된 것이다.[26] 또한 국제연맹에 일본의 침략을 제소함과 함께 장쉐량의 단독협상 시도를 막으려 했다.[27] 부저항과는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는 움직임이다. 장제스가 장쉐량에게 부저항 지시를 내렸다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으나, 증거가 딱히 없는 상황이다. 유일하게 찾을 수 있는 근거라곤 장쉐량의 비서장 궈웨이청의 회고 단 하나 뿐이다. 장제스가 전화를 통해 장쉐량에게 부저항하라는 지시를 몇번이고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사료 등으로 보충되지 않는 개인의 주장에 불과하며, 장제스는 신중한 대응과 지속적인 보고를 요청했을 뿐 사태 파악이 전혀 되지 않는 상태로서 지시를 내릴 만한 여건이 전혀 안 되어 있었다. 만주사변 이전에도 장쉐량은 독립왕국의 군주 격으로서 장제스는 그저 장쉐량의 여러 행동을 묵인할 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장쉐량 스스로도 NHK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부저항은 중앙정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고 밝힌 바 있다.

만주 사변 이전까지 장제스의 대일방침이 충돌을 삼가며 도발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었고[28], 장쉐량의 판단이 이런 방침에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고 가정은 할 수 있다. 그러나 간첩혐의자에 대한 총살이었던 나카무라 사건 등 이전까지 일본이 저지른 도발과 연대 규모 병력의 기습으로 본격화 된 만주 사변은 차원이 다른 사건이다. 도발에 넘어가지 말라는 방침이 일본의 자작극에 반응하지 말고 전쟁 위협을 회피하란 것일 수는 있겠으나, 이미 전쟁을 걸어온 일본군에 자동문을 열어주며 총 한 발도 안 쏴보고 두들겨 맞으면서 만주를 넘겨주라는 내용일 리는 없다. 남경에서 내부수습에 정신을 못 차리던 장제스가 만주의 사정이 파악이 되었을 리도 없고 일본이 도발을 해오는지 전쟁을 걸어오는지 파악하고 적절한 대처를 내려야 했던 건 장쉐량이었다.

4.5. 각종 매체에서

1981년 영화 서안사변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1997년 영화 송가황조에서 조연으로 등장한다.

2017년 영화 건군대업에서 조연으로 등장한다. 한경이 장쉐량을 맡았다.

1983년 드라마 소수전기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1987년 드라마 소수춘추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1989년 드라마 조사소저여장학량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1994년 드라마 장학랑여곽송령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1999년 드라마 장학량장군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2002년 드라마 장학량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2007년 드라마 서안사변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호군이 장쉐량을 맡았다.

2013년 드라마 모택동에서 조연으로 등장한다.

2015년 드라마 소수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1994년 성룡의 영화 '취권 2'의 초반 장면에 등장하며 유덕화가 분했다. 말끔한 청년의 차림으로 기차에 탔다가 비홍 일행이 차내 검문을 당할 때 군인에게 슬쩍 신분을 밝히고 비홍을 구해준다.

국내에서도 96년 ~ 97년 경 KBS 2TV에서 방영해준 '견자단정무문'에서 단역으로 잠깐 등장한 적 있다. 물론 실제 장학량 본인이 등장한 건 아니고, 일본의 장작림 폭살 음모 에피소드에서 등장해 진진과 잠시 권법 한 수를 겨루기도 했다. 장작림 살해 후, 진진에게 원수 같은 일본놈들을 반드시 몰아내야 한다는 항일 정신을 배우는 것으로 그려진다.

일본 요미우리 신문사의 중국 특파원 출신 아라이 도시아키는 자신의 저서 '반역자'에서 중국 역사의 반역자 중 한 사람[29]으로 그를 꼽았다. #

소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주인공 조지원처럼 혁명을 일으키려는 얼치기 청년으로 등장, 그러나 오히려 자기 아버지 장쭤린을 곤란하게만 만들고 아버지에게 유학을 빙자한 추방을 당한다. 이후 만주가 대한민국에 점령당하자 중화민국으로 달려가서 자신과 아버지의 영지인 만주를 돌려달라고 때쓴다.

2차대전 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는 중화민국군 원수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무난한 편. 모드인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도 역시 등장한다.

5. 가족 관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장쭤린/가족 관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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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진

파일:0D14uP01.jpg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40601044132665.jpg
장제스와의 연합 후 쑨원 묘소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장쉐량(좌)와 장제스(우)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08102709280640004300-001.jpg
1953년 징상 온천에 연금된 장쉐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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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의 생년은 명확하지 않으며 1898년 또는 1900년 이라는 기록도 있다.[2] 1898년 기준 향년 103세[3] 이때 베니토 무솔리니 영도 하의 이탈리아 왕국 등을 방문하여 파시즘에 호의적인 생각을 품고 장제스를 파시즘 지도자로 내세워 중국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4] 이후 그와 함께 시안 사건을 일으킨다.[5] 자신을 잡아넣은 장제스와 그 아들 장징궈보다도 훨씬 오레 산 것이다.[6] 사실, 시계 선물은 중화권에선 일종의 금기인데 '시계를 보내다' 하는 '送鐘'하고 장례를 치른다는 '送終'의 발음이 같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죽어라 식의 고인드립을 친 것이다.[7] 외모라는건 상대적인 기준이기도 하고, 잘생긴 사람이 따져보면 귀한건 아니다 보니 4공자, 8공자, 10공자까지도 들며, 군벌 자녀 뿐 아니라 극작가 메이란팡, 후스등 비군인, 순리런, 장링푸 등 중일전쟁기의 장군들, 거기다가 저우언라이, 왕징웨이, 하다못해 장제스도 든다.[8] 다만 린뱌오의 경우는 자연사가 아니라 비행기 사고로 사망.[9] 사인은 방광암.[10] 그런데 사실 마오쩌둥도 여자에 환장한 인물이긴 했다.[11] 비슷하게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와 권력투쟁을 벌였다가 정계에서 축출된 소련 공산당 간부들(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등) 역시 일찌감치 피튀기는 정계에서 벗어난 덕분에 자기들을 몰아내고 최종 승자가 된 흐루쇼프보다 엄청 오래 살았다.[12] 이명종, 근대 한국인의 만주인식 연구 = The Koreans' discourses on Manchuria during the modern period, 2014, 185쪽[13] 다만 국내 역사 커뮤니티에서는 이 같은 공산당 측의 해석이 역사왜곡에 가까운 것이라는 비판도 많다. 아무리 장쉐량의 시안 사건 같은 행적이 공산당에 도움이 됐다 한들 만주사변에서의 역적스러운 행동까지 정당화시키지는 못하며 인생 전반을 되돌아 볼때 이기적인 군벌로서의 행보만 보일 뿐 딱히 애국자의 모습을 보인 적이 전혀 없다.[14] 장쭤샹 같은 동북군 원로들은 관동군의 동태가 심상찮음을 보고하며 봉천 복귀를 지속적으로 권유했다.[15] 장쉐량은 집권 초기 소련을 상대로 군사적 모험을 걸어댔는데 처참하게 발렸다. 관동군 관전무관에게 오합지졸 잡군이라는 비아냥을 살 정도였다.[16] 만주는 당시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큰 공업지대였다.[17] 아마도 장쉐량이 재만 조선인들을 학살한 이야기를 모르고 있는 것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다[18] 그러나 중화민국 측의 입장에선, 일본 대응 대전략을 모조리 말아먹은 주제에 스스로 날려먹은 만주만 찾아달라고 징징대는 장쉐량을 보고 뒷목을 잡았을 것이다. 실제로 장제스는 국부천대 이후 장쉐랑을 평생 가택연금에서 못 빠져나오는 통조림 신세로 만들어주기도 했다.[19] 사실 장제스는 국력과 군비를 강화시킨 후 1940년 시점에 항일전쟁에 돌입한다는 대전략이 있었다. 그러나 장쉐량이 만주사변에서 트롤링을 벌인 대가로 국민당 내부에서 찬밥신세가 되어 방침 공유가 안 된 탓인지, 장쉐량은 이러한 대전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공산당과 싸우기 싫다. 왜 항일 안하냐. 만주 찾아달라.'고 징징대는 근시안적인 모습만 보였다.[20] 그러나 실질적으로 공산당은 국공합작 이후에도 국부군 통수치고 기습하기와 해방구 알박기, 인민들에게 마약팔아 돈벌기 등 항일은 나몰라라하고 뒤통수로만 일관했다. 당시의 장제스의 입장에서 항일 이전 공산당 토벌은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21] 이와 같은 주장이 한국어 위키백과에도 그대로 실려 있는데, 중국 공산당 측 사관이나 아라이 도시아키의 저서 반역자의 내용을 그대로 따온 부분이다.[22] 열하사변 당시 장제스는 명목상으로만 중국을 통일했을 뿐 중국의 각지에 각자도생하는 거대 군벌들이 깔려 있는 상태였다. 운남왕이라고까지 불리던 룽윈의 전계 군벌, 산서의 토황제로 불리던 옌시산의 염계 군벌, 중앙의 법제도에 저항하여 독자화폐까지 만들던 계계군벌 등 중국은 이합집산하는 군벌들의 느슨한 집합체였다. 참고로 중화민국 군벌 문서를 보면 당시 상황이 대단히 난장판이었음을 잘 알 수 있다. 특히나 장쉐량의 경우 중국을 통일할 뻔했다는 평을 듣는 아버지의 거대한 봉천군벌 세력을 물려받은 중국 유력 군벌이었다. 비유하자면 1931년 시점의 장제스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마냥, '당신이 섬서성 유력자니까 그쪽 전선은 당신 군벌이 담당하시오'식의 느슨한 지배력 정도만 행사할 수 있는 정도였고 직접적 통제력이 미치는 영역은 난징과 중국 동남부 일대의 한정된 지역에 한했다. 이같은 모래알 조직력은 중일전쟁 초기 대참패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23] 국민당의 통치는 북벌과 반장전쟁을 거치면서 이제 막 안정화되려던 참이었고, 국민당에게 빌린 것이라고는 국민당 명의 외에 없는 대다수 군벌들은 국민당 중앙의 말에 복종하기는 커녕 오히려 수틀리면 국민당 내부의 여러 정객들과 연합하여 독자적인 당중앙이나 정부를 선포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반장전쟁이 반장파들의 참패로 돌아가고, 이후 난징 국민정부가 법폐개혁, 초공작전, 징병제 실시 등으로 계속 강화되면서 예전처럼 자기 맘대로 개기는 것은 불가능해졌지만 만주사변이 발생하던 시점은 당과 정부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본격적으로 강화되기 이전의 파편적인 상황이었다. 만주의 상황은 역치, 말 그대로 깃발만 바꿔서 단 것이지 중앙의 통제력은 전혀 미치지 않았다. 명목상으로만 국민당 휘하일 뿐 사실상의 자치권을 보장받은 독립국가에 가까웠다. 장제스 비판 레퍼토리 중 가장 고질적인 것이 군벌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묘하게도 장제스의 힘이 제일 약했던 상황 중 하나인 1931년에 중국 2위의 군벌인 장쉐량을 전화와 전보만으로 조종할 수 있었다는 정반대 결론이 내려지곤 한다.[24] 중국 공산당은 항일전쟁에 나서던 국민혁명군을 기습하는 등 중일전쟁의 혼란 속에서 세력을 키우는 것에만 골몰했던 원죄가 있다. 때문에 항일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애썼다.[25] 1차 양광사변은 대단히 심각한 사태였고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일본에 저항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26] 광저우 정부의 왕징웨이 같은 인물들은 만주사변이 벌어졌음에도 항일은 도외시하고 장제스 하야와 집권에만 목숨을 걸었고 일본과 협상하여 만주 점령을 용인하려고 들기까지 했다. 이후 이들은 친일파, 한간으로 변질된다.[27] 동북군과 관동군의 국지적 사태가 아닌 국가 단위의 문제로 본격화시키기 위함이다.[28] 일본과 중국의 전쟁역량은 상대가 안 되었고, 1937년 시점에서도 중국이 개작살이 났을 정도였기 때문이다.[29] 해당 서적은 역사적 파장이 거대했던 반역자들을 다루는 책이다. 다만 책의 특성상 반역자들을 대단히 낭만적, 영웅주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장쉐량도 '장제스를 감금한 청년 장군' 같은 식으로 미화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중국 공산당 사관과 별 다를 바 없는 시각이 되어버렸다. 다만 마오쩌둥 등 일부 인물에 한해서는 홍위병 사태 같은 흑역사도 다루며 공산당을 만들고 스스로 파괴했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