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22년 5월 15일 |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 | |
사망 | 1999년 10월 16일 (향년 77세) |
서울특별시 강동구 진황도로61길 53, 중앙보훈병원 | |
경력 | 한족동맹(韓族同盟)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 한교전지공작대(韓國光復軍 第三徵募分處 韓橋戰地工作隊)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2묘역-787호[1] |
상훈 | 대통령표창[2] 건국포장 [3] 건국훈장 애국장[4] |
[clearfix]
1. 개요
1939년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에 참가하여, 일본군 정보수집과 초모활동2. 생애
1922년 5월 15일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에서 태어났다. 1939년 베이징을 거쳐 난징(南京)으로 갔다. 그곳 중앙대학에 다니고 있던 송지영(宋志英)· 조일문(趙一文) 등을 만나 한족동맹(韓族同盟)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3. 독립운동
참가 시기와 경위는 분명치 않지만, 한국광복군 징모제3분처에서 활동하였다. 징모제3분처는 광복군이 창설된 지 6개월 뒤인 1941년 3월 병력을 모집하려고 중국군 3전구에 파견한 조직이다. 주임으로 선임된 김문호(金文鎬)는 3전구 지역 장시성(江西省) 상라오(上饒)로 가서 터를 잡았다. 인근의 젠양(建陽)·옌산(鉛山)과 더불어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 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징모 제 3분처는 이곳에서 초모활동에 들어가 20여 명의 병력을 모집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1942년 10월 광복군의 조직이 개편되면서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로 편제되었다. 이들이 중국군 제3전구에서 활동하였다고 하여, 이를 제3전구공작대라 불리기도 한다. 이 부대는 전선의 변화에 따라 장시성·푸젠성(福建省)·안후이성(安徽省) 일대로 옮겨 다니며 활동하였다.
징모 제 3분처에 들어간 뒤 병력을 모집하는 초모활동에 참가하였다. 난창(南昌)·쥬쟝(九江) 등지에서 김응전(金應篆)과 함께 초모공작에 나섰으며, 김만득(金萬得)·김대준(金大俊)·김해동(金海東)·김윤국(金允國) 등의 청년들을 모집하여 광복군에 편입시켰다.
중국군의 군통국(軍統局)에 근무하던 박승학(朴承鶴)과 연계를 맺고, 장동식(張東植)·박재성(朴在成)·김성원(金成元) 등과 한국독립촉진회를 결성하여, 마지초(馬志超)가 지휘하는 중국군 유격부대에 근거를 두고 초모활동을 벌였다.
1944년 유기석(柳基石)과 함께 활동하였다. 유기석은 유수인(柳樹人)이란 이름을 사용하던 아나키스트로 중국군에서 활동하고 있던 인물로, 보조대장 박철원(朴哲遠) 등과 함께 한인 청년들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유기석이 한교전지공작대[5] 부대장을 맡게 되면서 함께 활동하였다.
유기석이 이끄는 15명과 함께 안후이성 징현(涇縣) 마오린(茂林)의 시산포(石山浦)에 거점을 마련하고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 전호인(全湖人)·피문성(皮文成) 등을 초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다시 이들을 데리고 쑤저우(蘇州)·쩐장(鎭江)·우후(蕪瑚) 등지에 침투하여,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귀순을 종용하는 선전공작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0여 명의 청년들을 모집하였고, 이들을 후송하여 한교전지공작대에 편입시켰다. 함께 활동하던 임계원(林桂園)과 박재엽(朴在燁)이 일본군에 붙잡혔다.
1945년 6월 유익배와 함께 중국군에서 복무하고 있던 박승학을 찾아갔다가, 안후이성 지에시현(結溪縣)에서 중국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일본군에 포위를 당하였다. 중국군 유격대의 도움으로 포위망을 탈출하여 후이저우현(徽州縣)으로 돌아왔다. 초모활동을 계속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4. 광복 이후
귀국한 후 국군에 입대하여 장교로 복무하였다. 1999년 10월 16일 서울보훈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고,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5. 참고문헌
김해일의 공적정보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31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442·445·44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