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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20:16:52

권기옥

파일: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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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권기옥.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아명 권갈례(權葛禮)
출생 1901년 1월 11일
평안남도 평양부 대흥면 상수구동 152번지
(現 평양시 중구역 만수동)
사망 1988년 4월 19일 (향년 87세)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보훈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종교 개신교 (한국기독교장로회)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일생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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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평양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1920년 이후에는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중국군에 들어가 10여 년간 복무하면서 항일 활동을 계속했다.

2. 일생

1901년 1월 11일, 평안남도 평양부 대흥면 상수구동[1]에서 아버지 권돈각(權敦珏)과 어머니 장문명(張文明) 사이의 1남 4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평양 숭의여학교 졸업반이던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3주 동안 구류되었다. 그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원인 김순일(金淳一)·김정직(金鼎稷)·김재덕(金在德)·임득삼(林得三) 등과 임시정부 공채 판매 및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6개월 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20년 8월 광복군 총영의 대한청년단연합회 소속 문일민(文一民)·장덕진(張德震) 등을 도왔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애국 동지들과 접선하기 위한 방편으로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단을 조직, 여자전도대장으로서 전국을 순회·강연하며 비밀 공작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제국 경찰에 발각되어 1920년 9월 상하이로 망명, 이승만(李承晩)·안창호(安昌浩) 등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23년 임정의 추천을 받아 윈난(雲南) 육군항공학교의 제1기생으로 입학[2]하고, 1925년에 비행사 자격을 취득한 후, 혁명 장군 펑위샹(馮玉祥) 휘하 공군에서 한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로 복무하였다. 1927년 장제스의 북벌(北伐) 때 손정방 군을 떠나 최용덕(崔用德)과 동로항공사령부(東路航空司令部)에 가담하였으며 이후 총사령부 항공처 항공제2대 비행원이 되었다. 1928년 5월에는 난징에서 일본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같은 해에는 독립운동가 이상정[3]과 결혼했다.[4]

1929년 2월 4일에는 항공서 임시편집위원회 편집위원, 5월에는 항공사령부 항공제2대 비행원, 6월 4일에는 항공서 항공서 항공제1대 상위 관찰사 등을 거쳐 1930년 10월 20일에는 육군 소교 [5] 가 되었다. 이후 군정부 항공제1대 비행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3년 항공서 계급변경에 따라 육군 중교에서 공군 상위로 변경되었다. 1940년에는 공군 중교에 이르렀으며 중일전쟁 시 중경의 참모학교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943년에는 김순애(金淳愛)·방순희·최선화·최애림(崔愛林)·최형록(崔亨祿) 등과 충칭 임정 산하에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 사교부장(社交部長)으로 활동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광복 후 1949년에 귀국했다. 하지만 귀국 2년 전에 남편 이상정과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6.25 전쟁 시기 국회 국방위 전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귀국 후에는 전 재산을 장학 사업을 위해 기부하고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의 낡은 목조 건물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88년 4월 19일 강동구 둔촌동 보훈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87세. 이후 시신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3. 기타



[1]평양시 중구역 만수동[2] 재학중 일본 스파이에게 암살당할 위협도 겪는 등 파란만장했다.[3] 항일 저항시인 이상화의 형[4] 결혼 당시 이상정은 고향인 대구에 본처 한문이가 있어 중혼이다. 권기옥은 본처에 대해 해방 이후 귀국할 때까지 몰랐다고.[5] 국민정부 공보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