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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00:13:59

이상정(독립운동가)

파일:독립운동가 이상정.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이직문(李直文), 이연호(李然晧, 李然浩)
청남(晴南), 산은(汕隱)
출생 1897년[1] 6월 10일
경상북도 대구군 서상면 서내동
(現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1가)
사망 1947년 10월 27일 (향년 50세)
경상북도 대구부 동부출장소 만촌동 자택
(現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본관 경주 이씨[2]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상세3. 활동 내역
3.1.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으로써의 삶3.2. 예술가로써의 삶3.3. 사망
4. 저서5.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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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상세

호는 청남(晴南), 산은(汕隱)이다. 1897년 대구부 서문로1가 12번지에서 태어났으며 항일 저항시인 이상화, 교수 겸 체육행정가 이상백의 형이다. 부인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인 권기옥이며, 1928년에 결혼했다.[3]

3. 활동 내역

3.1.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으로써의 삶

큰 동생 이상화가 문학을 통해 항일 투쟁을 했다면, 이상정은 중국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했다.

1923년 만주로 망명했으며 북만주에서 약 2년 간 민족교육을 통한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 원래 군벌 펑위샹서북군벌 군대에서 복무하였으나 장제스의 북벌 이후 국민혁명군 소속이 되었다. 이후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국민당 정부의 초청으로 충칭 육군참모학교의 교관을 지내고 항일전쟁에 참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상도 대표였으며, 1940년에는 한국광복군 창설에도 관여했다. 광복군에 대한 국부군의 통제 조항인 9개 준승을 폐지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신한민주당 창당에도 참여하였다.

국부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중장이다. 8.15 광복이 되자 일본군 북지나방면군의 항복을 접수하고 해산하는 업무에 종사했다가 도쿄의 중국 점령군 사령부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그는 제안을 거절하고 전역하였으며, 한국 교민 보호를 위해 잠시 상하이에 머무르다 1947년에 모친상으로 귀국했다.

3.2. 예술가로써의 삶

동생 이상화처럼 그 역시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대표적인 현대 시조 작가 중 하나로 꼽힌다. 또한 그는 최초의 국내 서양화가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미술 연구회인 벽동사(碧瞳社) 설립하여 대구 지역에 서양미술을 전파하는 데에도 일조했다. 1921년에는 개인전을, 1923년에는 단체전에 참가해 명성을 얻었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미술작품들은 현존하지 않는다.

3.3. 사망

귀국한 후 40여 일만인 그 해 10월 27일에 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뇌일혈이었다.

4. 저서

파일:9788928518562.jpg

5. 가족 관계



[1] 이상정의 생년에 대해 1894년#, 1896년, 1897년, 1898년 등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학계에서는 대체로 경주 이씨 족보에 기재된 1897년 생을 정설로 본다.[2] 39세 상(相) 항렬.[3] 조혼한 첫 부인 한문이가 따로 있다. 권기옥과는 사실상 중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