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이인 독립운동가에 대한 내용은 김마리아(190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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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애시덕 |
<colbgcolor=#0047a0> 출생 | 1891년[1] 6월 18일 |
황해도 장연도호부 서대면 송천동 (現 황해남도 룡연군 구미리) | |
사망 | 1944년 3월 13일 (향년 52세) |
함경남도 원산부 (現 강원도 원산시) | |
사인 | 고문 후유증으로 병사 |
본관 | 광산 김씨(光山)[2] |
직업 | 독립운동가, 인권운동가, 교사 |
부모 | 아버지 김윤방, 어머니 김몽은 |
학력 | 소래보통학교[3] (졸업) 정신여학교 (졸업) 난징대학 (학사) 파크 대학교 대학원 (석사)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 (석사) 미국 성서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수료) |
종교 | 개신교 |
정당 | 대한애국부인회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위패-18호 |
서훈 | 건국공로훈장 단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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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한민족 출신 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종고모부인 서병호[4]와 그 아들 서재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한 독립운동가였으며 김규식의 부인이며 역시 독립운동가인 김순애는 김마리아에게는 나이 어린 종고모가 된다.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필순은 그녀의 삼촌이고 김필순의 아들인 중국에서 활동한 미남 배우 김염은 김마리아의 사촌동생이다.
2. 생애
1891년 6월 18일 황해도 장연도호부 서대면 송천동(現 황해남도 룡연군 구미리)에서 부친 김윤방(金允邦, 1851 ~ ?)[5]과 어머니 무장 김씨(茂長 金氏) 김몽은(金蒙恩, ? ~ 1904)[6] 사이의 3자매 중 막내 딸로 태어났다. 이름인 '마리아'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아버지 김윤방이 지은 것이며 김윤방은 일찍이 개신교에 입교하여 고향 마을에 초등학교를 세웠는데 김마리아가 어릴 때 사망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설립한 소래보통학교에 언니들과 다니면서 개신교 정신에 입각한 평등과 신학문을 배워나갔다. 1905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근무하던 숙부 김필순은 나중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운 노백린, 유동열, 이동휘, 김규식 등과 가까운 사이로 그녀는 김필순의 도움으로 숙부의 집에서 1906년 정신여학교[7]를 다니면서 민족 정신을 갖고 독립운동가를 배출해 낸 집안 어른들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전라남도 광주의 수피아여학교[8]와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1914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히로시마시를 거쳐 도쿄의 여자학원[9]에서 수학했는데 1919년 도쿄여자학원 졸업을 앞두고 도쿄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8 독립 선언이 일어나자 황애덕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곧이어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미리 귀국하여 황해도 지역의 운동에 관여했다가 체포 및 구금되었는데 이 때 고문을 당해 몸이 상한 뒤 평생 건강 문제로 고생하게 되었다. 당시 그녀는 귀국하면서 2.8 독립 선언문을 가져왔는데 일부러 기모노를 입고 그 오비(허리띠)에 종이를 숨겼다고 한다. 1919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920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중국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황해도 대의원이 되었으며 난징의 현재 난징대학의 전신인 진링(金陵)대학에서 수학하였지만 독립운동 대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벌 싸움에 식상한 그녀는 못다한 공부를 마치기 위해 192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파크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뉴욕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923년 파크 대학교 졸업식에서의 김마리아. |
이후 그녀는 뉴욕에서 다시 만난 황애덕, 박인덕(朴仁德)[10] 등과 함께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1933년 귀국하였으나 경성부에 체류할 수 없고 교사 활동도 신학 이외에는 가르칠 수 없도록 하는 등 일본 제국 경찰의 제약이 뒤따랐는데 함경남도 원산부의 마르다윌슨여자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신학 교육에 힘썼다. 1938년을 전후하여 천주교, 장로회, 감리회 등 한국 기독교 주요 교파들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기독교인들이 대거 변절하던 시기에도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1943년에 오래 전 고문으로 얻은 병(상악골 축농증)이 재발하여 원산의 사택에서 졸도한 뒤 1944년 3월 13일 결국 평양기독병원에서 사망했으며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려졌다.
미혼이라 자손은 없으며 사실 결혼을 못 한 이유는 본인의 의지도 있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이유도 있었는데 3.1운동 당시 체포되어 취조를 받으면서 한쪽 가슴과 국부를 인두로 지지는 혹독한 성고문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추서받았다. 이후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녀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봉안되었다.
3. 기타
- 생전에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인 김철수와 가깝게 지내서 주위에서 두 사람이 결혼할 것을 권유한 적이 있었다. 김마리아와 김철수 모두 긍정적으로 생각했으나 김철수에게는 이미 고향에 본처가 있어서 이어지지는 못했다. 당시 지식인들은 고향에 집안 어른들이 일방적으로 정해 준 본처를 둔 것과는 별도로 신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과 새로 결혼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구시대적 인습과 자유 연애, 연애 결혼이라는 신식 풍속이 공존하던 과도기의 모습이다.
- 2.8 독립 선언에 함께 참가했던 이광수가 쓴 〈누이야〉(1933년)라는 시는 김마리아의 귀국을 기념하여 그녀를 소재로 쓴 것이다. 안창호가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10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나 심문하던 일본 검사가 탄복할 정도로 의지가 강했다는 일화 등이 남아 있다.
- 1998년 7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으며 사후 업적을 기려 서울특별시 보라매공원에는 그녀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2004년 독립기념관에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라는 문구를 적은 어록비가 세워졌다.
- 악성 이물질로 인한 만성 상악골 축농증은 당시 의료 기술로는 치료할 수가 없었다. 매서클리어의 부비동 수술법이 확인된 것은 1950년대 말이며, 1960년대에도 까다롭고 어려운 수술로, 매서클리어만 수술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악성 이물질로 변형된 점막을 제거하고 부비동의 염증을 치료해야 하기 때문에, 특히 김마리아는 오래된 지병이기에 그 난이도가 급상승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부비동에서 끊임없이 고름과 피가 쏟아져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고름이 기관지로 들어가 쉴새 없이 기침을 하며, 위장 등에 영향을 주어 밥도 먹을 수 없는 매우 참혹한 투병이 이어졌다고 증언된다.
[1] 호적 및 광산김씨평장대보 권36 364쪽에는 1892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2] 문숙공후-판도판서공파 35세 현(鉉) 항렬이나 항렬자는 쓰지 않았다. 다만 오빠 김일현(金一鉉, 1890 ~ ?)은 항렬자를 사용했다.(족보)[3] 황해도 장연군 소래마을에 있던 학교. 현존 여부는 불명이며 시흥시의 소래초등학교와는 다른 학교이다.[4] 서병호의 부인은 김필순의 첫째누이인 김구례이다.[5] 족보명은 김언순(金彦淳).[6] 김규창(金奎昌)의 딸이다.[7] 現 정신여자중학교, 정신여자고등학교의 전신[8] 現 광주수피아여자중학교,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의 전신[9] 女子学院. 1870년에 설립된 미국 북장로교 계열의 중고등학교로 女子学院中学校・高等学校이라는 이름으로 현존한다. 똑같이 '동경여자학원'으로 읽히는 도쿄죠시가쿠인(東京女子学院)과 도쿄죠시가쿠엔(東京女子学園)과는 별개의 학교다.[10] 인덕공업고등학교와 인덕대학교를 설립한 교육자. 일제 말기에는 변절하여 친일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