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9 17:13:18

홍애시덕


<colcolor=#000,#fff>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가네코 후미코 강원신 강혜원 공백순 권기옥
권애라 김경화 김덕세 김도연 김마리아¹
김마리아² 김란사 김순애 김알렉산드라 김자혜
김점순 김정숙 김조이 김향화 김효숙
남자현 동풍신 민영주 박계남 박신애
박원희 박자혜 박차정 박현숙 방순희
부덕량 부춘화 신마실라 신순호 신의경
신정숙 신창희 심영신 안경신 안영희
양방매 어윤희 연미당 오건해 오광심
오희영 오희옥 유관순 유순희 윤용자
윤희순 이병희 이신애 이아수 이의순
이혜련 이효정 이희경 장매성 장선희
전수산 전월순 정정화 조마리아 조순옥
조신성 조화벽 주세죽 지복영 차경신
차미리사 차보석 최선화 최용신 최정숙
홍애시덕 황마리아 황애시덕 천소악 한수자
}}}}}}}}}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홍애시덕
洪愛施德
<colbgcolor=#0047a0> 출생 1892년 3월 20일
경기도 수원군
사망 1975년 10월 8일 (향년 83세)
서울특별시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홍애시덕은 1892년 3월 20일 경기도 수원군에서 대표적인 개화파 인사였던 홍정후(洪正厚)의 딸로 태어났다. 초명은 홍오순(洪五順)이었으나 부친을 따라 개신교로 개종한 뒤 성경에 나오는 에스델의 이름을 따 '홍애시덕'으로 개명했다.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서울로 상경한 그녀는 1912년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한 뒤 이화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여성 계몽운동과 문맹 퇴치운동을 전개했다. 1917년 이화학당 대학 본과에 입학한 뒤 1919년 유관순 등과 함께 비밀결사 여성동지회(女性同志會)를 조직, 여성운동을 폈다. 또한 서울에서 벌어진 3.1 운동에 참가했다.

1920년에는 김활란, 김함라, 윤성덕, 김보린, 김애은, 김신도 등 이화학당 출신 교사 및 학생들로 구성된 7인 전도대를 조직했다. 그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여성해방, 민족계몽운동을 펴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몇달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6월, 홍애시덕은 조선여자기독청년회의 초대부회장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1923년 9월 유각경(兪珏卿)·최활란 등과 함께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朝鮮基督敎女子節制會)의 결성에 참여하여 여성의 권익옹호 및 사회풍토 개선활동을 통해 여성의 지위향상에 힘썼다. 1926년 12월에는 김활란, 방신영(方信榮) 등 기독교계 인사들과 함께 망월구락부(望月俱樂部)를 결성하고 사회주의 계열 여성운동과 협력을 모색하였다.

1927년 1월, 그녀는 재경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在京東京女子留學生親睦會)의 발기총회준비위원에 선임되어 여성운동단체의 통합에 힘을 쏟았다. 동년 4월 신간회의 자매단체로서 좌·우익 여성단체의 통일적 기관인 근우회(槿友會)의 결성준비에 참여하여 동년 5월 27일 창립총회에서 21명의 집행위원 중 한명으로 선임되어 김활란·이현경(李賢卿)과 함께 조사부를 맡아 여성의 지위향상과 항일독립운동에 힘썼다.

1928년 1월 상하이에서 개최되는 감리교동아회(監理敎東亞會)에 김창준·조병옥 등 교계대표 8인과 함께 한국교회대표단(韓國敎會代表團)의 일원으로 참석하였다. 이후 1931년 기독교조선감리회 여선교회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교회에서 여성운동과 민족운동에 매진했다.

일제강점기 말기 동료 김활란 등이 일제에 영합하여 정신대 참여 독려, 내선일체 찬양, 징병 독려 등의 활동을 전개했으나, 그녀는 이에 가담하지 않고 목회활동에 전념했다. 8.15 광복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5년 10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홍애시덕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