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23:22:51

근우회



1. 개요2. 활동
2.1. 여성 계몽운동2.2. 1928년 제 1차 전국대회2.3. 1929년 제 2차 전국대회2.4. 민족운동 지원2.5. 1930년 제 3차 임시대회
3. 해소4. 신간회와의 연관성

1. 개요

근우회는 1920년대 좌우로 양분되어 있던 여성 운동계를 통합하여 1927년 5월 전국적 통일 기관으로 결성하였다. 신간회의 자매 단체인 근우회는 국내외에 60여 개의 지부가 설치되면서 크게 성장하였다. 근우회는 창립 선언문을 통하여 '한국 여성의 단결과 지위 향상을 도모할 것' 등 한국 여성 운동의 성격과 나아갈 길을 새롭게 제시하였다.
근우회는 일제의 계속된 탄압에도 불구하고 각종 강연회나 토론회 등을 통한 여성 계몽 활동, 여성 근로자의 임금 차별 철폐 등 여성 노동자의 조직화, 여학생 주도 시위 운동 등 지원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독립기념관 공식 설명문

槿友會

흔히 신간회의 자매 단체로 불리며, 김활란, 유영준, 박원민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일제강점기 시대의 여성 운동 단체이자 현재 대한민국 여성단체들의 시초이다.

3.1운동 이후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에 남녀노소의 평등이 발표되며 여성도 항일운동에 동참하자는 취지 아래 부녀단체들이 결성되었다. 여성 운동 또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으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27년 1월 망월구락부 1주년 기념행사에서 민족주의 여성들과 사회주의 여성들이 화합을 추진, 재경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를 창립하고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를 개최하였다. 친목회에서 각 진영의 여성들이 힘을 합쳐 전국적인 기관을 조직하기로 하고, 유각경외 12인을 준비위원으로 선출하였다. 또한 40명의 발기인단을 구성하여 발기총회를 개최하고 정식 회명을 '근우회'로 채택하였다. 이후 1927년 5월 27일 근우회의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1]
1. 조선 여자의 공고한 단결을 도모함.
2. 조선 여자의 지위향상을 도모함.
근우회 강령

근우회는 기독교계열을 주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화합을 추구하였다. 아래 근우회 선언에서는 일본 식민통치를 이겨내자는 민족주의적 입장과 거대 자본주의 세력에 대항하자는 사회주의적 입장이 동시에 드러난다. 또한 조선 여성의 공고한 단결을 도모한다.
"우리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분투하는 것은 동시에 조선사회 전체를 위하여, 나아가서는 세계인류 전체를 위하여 분투하게 되는 행동이 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근우회 선언

2. 활동

근우회는 서울의 중앙본부와 지방의 여러 지회들로 구성되어 민주적 체제로 운영되었다. 매년 전국대회를 열어 중앙집행위원회를 선임하였기에 구성원과 부서가 매년 달라졌다. 또한 전형위원을 선출하고 그 전형위원들이 중앙집행위원회를 선출하였기에 전형위원에 따라 본부의 운동 노선이 결정되었다. 창립 후부터 1931년 해소 전까지 1928년, 1929년, 1930년 총 3번의 근우회 전국대회가 개최되었다. [2]

2.1. 여성 계몽운동

여성 계몽운동은 근우회 창립 초기에 채택된 운동방법으로, 근우회 본부의 사회주의 세력이 주장하였다. 가부장적인 관습에 의해 여성의 의식 수준이 미발달하였으며 우선적으로 여성을 계몽하여 그들의 정치의식을 고취시키고 그 이후 정치투쟁과 계급투쟁을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여성 계몽운동은 크게 재정확충사업, 조직정비사업, 여성교양사업을 통해 추진되었다.

가장 먼저 조직 운영을 위한 재정 확충이 시급하여 기부금 모금과 자체 수익 사업을 시행하였다. 여성의 단결을 의미하는 단추와 근우회 선언강령을 판매하여 근우회 조직을 선전함과 동시에 재정을 확충하고 여성들의 단결을 도모하였다. YMCA 주체로 열린 여학교연합바자회에서 임시 음식점 운영하여 수익을 거두었다.

회원 확보와 회원 유지를 위한 조직정비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지회 설립 운동울 실시하여 전주를 시작으로 총 61개의 근우회 지회 중 40개 지회가 설립 초기에 설립되었다.

근우회는 각 지회에 야학을 설치해 문맹 여성을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함양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단 7개 지회에서만 야학 운동이 전개되며 일반 대중 여성을 위한 교양 사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근우회 초기에는 지도자 여성의 양성을 위한 수준 높은 강좌 위주의 강연회가 개최되였다.

근우회 본부는 이러한 계몽 운동이 당시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을 극복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파악하고, 1928년부터 투쟁성을 내포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2.2. 1928년 제 1차 전국대회

근우회 창립 1주년을 기념한 제 1차 전국대회를 1928년 5월 26일과 27일 양일간 개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토의안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개최를 허락하지 않았다.[3] 이후 토의안 없이 임시대회라는 이름으로 전국대회의 개최 허가가 내려졌고, 1928년 7월 14일에 임시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근우회 임시전국대회의 첫째 날에는 임시대회를 진행할 임원이 선출되었고, 둘째 날 신임 중앙집행위원을 선거할 전형위원 9명이 선출되었다. 이들에 의해 23명의 집행위원 선출이 이루어졌다. 1차 임시대회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집행위원들이 선출되고 이후 민족주의 진영 여성들이 이탈함에 따라 근우회는 사회주의 진영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2.3. 1929년 제 2차 전국대회

근우회 제 2차 전국대회는 1929년 7월 27일 개최되었다. 전국대회에서는 새로운 행동강령을 제정하여 여성차별을 해소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또한 조직 구성에서 교양부가 없어지고 출판부, 노농부가 신설되었다.[4] 출판부의 대표적 사업으로는 기관지 <근우> 발행이 있었다.또한 사회단체와 연합하여 비판연설회를 계획하고, 공장을 방문하여 공장생활을 살펴보는 등 노동여성들의 생활, 파업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다만 근우회의 실질적 활동은 조사와 방문에서 그쳤으며 지회들이 대부분 지방 중요도시에 설립되었기 때문에 근우회는 농촌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따라서 농민 문제는 근우회 활동에 반영되기 어려웠고, 노농운동은 원활히 실현되지 못하였다.

2.4. 민족운동 지원

근우회는 여학생 운동을 지원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여학생들은 1927년부터 맹휴 운동으로 반일 감정을 표출하였고, 근우회 또한 이때부터 여학생 운동을 지원하였다. 특히 1929년부터의 여학생 운동 참여가 부각된다. [5]

근우회 노선이 사회주의화되며 일본의 탄압이 심해졌으나, 근우회는 투쟁성을 바탕으로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였다.

2.5. 1930년 제 3차 임시대회

1930년 제 3차 전국대회를 4월 19, 20일간 개최하려 하였고, 대회 직후 일주일간 제 2회 부인강좌를 실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대회를 약 10일 앞둔 4월 8일, 종로경찰서는 근우회의 전국대회 개최를 금지시켰다.[6] 근우회는 끊임없는 전국대회 개최 노력 끝에 12월 18일 근우회 확대위원회라는 명칭으로 전국대회를 개최하였고, 농촌부인강좌와 야학 등의 시행을 결정하였다. 또한 노농부를 삭제하고 과거 근우회 운동을 비판하며 일반 농촌부인과 가정부인 중심의 운동을 전개하고자 했고, 중앙집행위원장에 민족주의 여성 지도자였던 조신성을 선임하였다.

3. 해소

1930년 제 3차 전국대회 이후 근우회는 사회주의 노선에서 민족주의 노선으로 운동 방향을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근우회는 하락세에 있었으며 1931년 제 4차 전국대회는 신간회 해소[7] 및 지방지회의 해소, 지도층의 분열 등으로 개최되지 못하고 무기한 연기되었다.[8]

하지만 이후 근우회의 뒤를 이어 수많은 여성운동 단체들이 생겨나면서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4. 신간회와의 연관성

흔히 근우회를 신간회의 자매단체로 부른다. 그러나 근우회와 신간회는 양자간의 직접적인 연대기구를 만들어 활동하지 않았다.
일부 연구는 “근우회는 여성의 전국적 유일조직으로서 마땅히 신간회의 산하단체가 되어야 하므로 양자가 대등한 위치의 양두조직은 아니었다”[9]며 근우회를 신간회의 여성운동 부문 산하 단체로 보기도 하며, 수평적 연대보다는 의존적이고 부속적인 성질을 띤다고 본다.[10]

근우회와 신간회는 창립 초기 각종 집회를 통해 서로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다만 신간회의 근우회 지지는 신간회라는 '민족유일당'의 부문운동 중 하나로 근우회를 인식하고 지지한 것이며 신간회가 근우회를 지도하는 입장을 취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근우회 또한 근우회가 단체로서 신간회에 가입하고자 하는 것을 주장하며 신간회의 부문운동체로서의 주도성을 수용하였다. [11] 그러나 신간회는 근우회가 단체로서 신간회에 가입하는 것을 채택하지 않았으며 신간회 내 여자부 설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근우회 회원 전원이 신간회에 가입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근우회 간부 상당수가 신간회의 간부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2]
[1] 최은오. (2013). 일본강점기 근우회의 결성과 활동. 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2] 아래 활동들에 대한 자세한 전개는 다음 논문 참고. 최은오. (2013). 일본강점기 근우회의 결성과 활동. 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3] 토의안 내용 중 "노동부인 동원 슬로건", "학생에 대한 슬로건" 등은 사회주의 성향이 짙은 투쟁성을 내포하였고, 반일 민족운동의 성격이 뚜렷하게 표출되었다.[4] 민족주의적 성격의 교양강좌가 사라지고 노농부가 신설되었다는 점에서 근우회의 노선이 사회주의 계열로 변화함을 확인할 수 있다.[5] 1929년 7월 23일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 4학년생 임부득이 경찰에 검거되고 관련 학생들이 퇴학 처분되자 근우회에서는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 퇴학처분 해제권고문을 송달할 것을 의결함.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 등과 연계하여 적극 지원함. 경찰이 검거한 광주학생운동 관련 격문 배포 주동자에 근우회 회원이 포함됨. 1930년 1월 15, 16일에 서울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에 연관되어 검거된 사회단체 인물 중 근우회 회원들이 포함됨. 등[6] 학생만세운동에 가담하고 지방 지회가 불온하다는 이유였다.[7] 원래는 자치론자들을 내쫗아 해체한 후 다시 비타협자들이 모여 재결합할 예정이었으나, 눈에 불을 키고 독립운동가들을 색출, 탄압하던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고 와해된 것이다.[8] 사실상 제 3차 전국대회 이후로 근우회가 해소되었다고 볼 수 있음[9] 김창순․김준엽, 한국공산주의운동사 3, 청계연구소, 1986, 86쪽.[10] 남화숙, 1920년대 여성운동에서의 협동전선론과 근우회, 한국사론 25, 1991, 201~202쪽.[11] 김정인. (2022). 근우회와 신간회의 연대성 검토. 한국학연구 제64집, pp.149~179[12] 장원아. (2019). 근우회와 조선여성해방통일전선. 역사문제연구 제 42호, pp.405-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