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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2 14:55:48

어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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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어윤희.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함종 어씨[1]
출생 1881년[2] 6월 20일
충청도 충주목 소태양면 조기암리
(현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덕은리 조기암마을)
사망 1961년 11월 18일 (향년 80세)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동 자택
종교 유교 (성리학)기독교 (남감리회)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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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이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유관순과 같이 옥중에서 만세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2. 생애

어윤희는 1881년 6월 20일 충청도 충주목 소태양면 조기암리(현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덕은리 조기암마을)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어현중(魚玄仲)의 무남독녀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12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1894년 결혼했으나 동학도였던 남편은 결혼한 지 3일 만에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다며 집을 떠났고, 얼마 뒤에는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는 바람에 그녀는 청상과부가 되었다. 이에 시가를 떠나 친정으로 돌아왔지만, 1897년에는 아버지마저 별세하면서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고향을 떠난 그녀는 10여년간 황해도 평산군해주군 등지를 전전하다가 1909년 경기도 개성군 동부면 경방리(현 개성시 동흥동)에 정착하여 본적을 두었다. 1910년 그녀는 우연히 개성북부교회에서 훗날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 되는 정춘수 전도사의 설교를 듣고 감명받아 개신교 남감리회 신자가 되었다.

그녀는 1912년 당시 개성에 있던 미션스쿨 미리흠여학교(美理欽女學校) 기예과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전도사로서 외딴 섬까지 전도를 나가 민중을 계몽하고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했다. 그 뒤 황해도 금천군 합탄면 매후리(현 황해북도 토산군 합탄리)로 이주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2월 26일 개성군 송도면 성경학원 기숙사에서 그녀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기미독립선언서 2천여장을 건네받았고, 이를 북부교회 목사 강조원에게 전달하였다. 하지만 강조원이 선뜻 독립선언서 배포를 꺼리자, 그녀가 나서서 보따리장사를 가장하고는 3.1 운동이 일어난 3월 1일 대낮부터 집집마다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이를 본 호수돈여학교 사감 신관빈과 전도부인 심영식 등이 합류하여 같은 날 송도면 각 거리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개성군의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이 일로 인해 그녀는 얼마 뒤 체포되었고, 그해 4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4월 11일에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파일:어윤희(1919년).png
1919년 4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수감 중에도 그녀는 같은 해 12월 24일 옥중에서 홀로 만세를 부르기도 했고, 3.1 운동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유관순 등 동료 죄수들과 은밀히 연락한 뒤 1920년 3월 1일 옥중 만세를 부르는 등 넘치는 패기를 보여주었다. 이때 3.1 운동 1주년 기념 옥중 만세운동을 진압한 간수들은 주동자를 색출하기 위해 죄수들을 고문했고, 이 과정에서 결국 유관순 등이 옥사 순국하였다. 그럼에도 어윤희는 고문에 못 이겨 간수들의 밥을 나르는 등 그들에게 굴복한 조선인 여자 죄수들을 질책하여 잘못을 뉘우치게 하였고, 훗날 이들을 갱생시켜 옥중의 애국지사들과 연락하는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1920년 4월 28일 출옥한 후에는 옥중의 행적들로 인해 명성을 얻어 개성군 지역의 민족운동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녀는 남감리회 지도자 노릇을 하는 한편, 국내 독립운동가들의 여비 또는 은신처를 마련해주거나 육혈포의 탄환을 숨겨두었다가 전달하기도 하는 등 그들에게 여러모로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또한 여성의 권리와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한 일에도 앞장서서 노력했고, 1927년 신간회가 창립되자,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여 전국에 흩어져 있던 여성운동단체를 하나로 통합하여 근우회를 창립했다. 그리고 근우회를 통해 봉건제의 탈피와 일제 침략에 대한 저항을 호소했다. 근우회는 1930년까지 118개의 지회가 설립되는 등 상당히 큰 조직으로 발전했다.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되고 나서는 일선에 물러나 아동복지사업에 헌신하였으며, 1937년에는 감리교와 개성부 유지들의 지원을 받고 개성부에 유린(有隣)보육원을 설립해 고아사업을 실천하다가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경상남도 부산시로 피난하였고, 1952년부터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동에 있는 서강감리교회 장로로 그 뒤 10년간 시무하였다. 그리고 마포구에 서강유린보육원을 재건하여 원감으로 재직하다가 1961년 11월 18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그녀는 생전에 1953년 나이팅게일 기장, 1959년 인권옹호 공로표창을 수여받은 바 있으며,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3. 참고 자료


[1]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1880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