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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02:54:37

고제량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성필(聖弼) / 인봉(麟峰)
출생 1849년 11월 11일
전라도 창평현 군내면 유천리 수곡동
(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 수곡마을)[1][2]
사망 1907년 10월 16일[3][4] (향년 57세)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연곡사
본관 제주 고씨[5]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55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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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고제량은 1849년 11월 11일 전라도 창평현 군내면 유천리 수곡동(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 수곡마을)에서 통정대부 용양위부호군을 지낸 아버지 고휘진(高輝鎭, 1800 ~ 1884. 8. 19)과 어머니 장수 황씨(長水 黃氏, ? ~ ?. 7. 28) 황운(黃沄)[6]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7]

그는 병술에 조예가 깊었다고 하며, 족손(族孫)인 고광순과 소시적부터 마음이 맞아 함께 지냈다.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이 잇달아 발발한 뒤 고광순이 기우만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을 때 여기에 가담하려 했지만 중병에 걸려서 종군을 후일로 미뤘다. 그 후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그는 고광순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논의했다.

그러던 중 1906년 4월 최익현이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순창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고제량은 고광순과 함께 최익현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최익현이 여러 문인들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연행되었다. 이에 그들은 기우만, 백낙구(白樂九)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언약하고 기일을 정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기밀이 누설되어 기우만과 백낙구가 체포되자, 두 사람은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고광순을 주장으로 모시고 자신은 부장이 되어 창평 저산 분암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의 휘하에는 고광훈, 고광채, 고광덕제주 고씨 장흥백파 일족과 윤영기(尹永淇), 박기덕(朴基德) 등이 종사했다.

그들은 1907년 1월 24일에 각기 부서를 정하고 연합 전략을 수행할 수 있는 동지를 구하고자 여러 의진과 교섭했다. 그러던 1월 그믐에 남원의 양한규로부터 남원 합동 작전을 꾀하자는 연락을 받고 행군을 개시했다. 2월 초 남원으로 진군한 그들은 양한구가 이미 남원성을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것을 모른 채 군사를 3부대로 나누어 적의 진영을 공격했다. 그러나 적의 저항이 강하자, 그들은 군사를 후퇴시키고 대열을 정돈한 뒤 병력을 증강했다. 이후 1907년 4월 25일, 고제량은 윤영기 등과 함께 화순읍을 공략하고 일본인 가옥을 모조리 불태웠다. 이튿날 다시 동복으로 진군했지만 광주부에서 파견된 관군에게 도마치 전투에서 패하고 군사가 일시적으로 흩어졌다.

고제량은 8월경 여러 인사들과 함께 창평 제심리를 중심으로 집합할 것을 연락하며 재기를 계획했다. 9월 11일, 그는 고광순을 도독으로 삼고 자신은 선봉이 되었으며, 각 부서를 정한 뒤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드리고 맹서한 다음 9월 12일 행군을 시작해 동복 땅을 지나 지리산에서 장기 항전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곡성군 구룡산 아래에 이르렀을 때, 참모 신덕균이 일본인이 많기로 유명한 동복을 먼저 칠 것을 제의했다. 이에 의병대는 9월 14일 군대를 회군하여 동복읍으로 들어가서 도포사(都暑士) 박화중(朴化中)의 총격을 신호로 일제히 공격을 퍼부어 읍을 점령하고 일본군을 몰아냈다.

9월 17일 지리산 화개동에 들어간 의병대는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각지의 장정들을 모집했다. 그들은 본진을 구례 연곡사에 두고 군기를 세우고 깃발에 '머지 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뜻으로 ‘불원복(不遠復)’ 3글자를 썼다. 그러던 1907년 10월 16일 새벽 일본군이 기습 공격해왔다. 고광순은 전세가 불리하다는 걸 깨닫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기로 벌써부터 작정했으니 공들은 나를 염려하지 말고 각자 살 길을 찾아가라."

그러자 고제량이 말했다.
"처음에 의로서 함께 일어났으며 마지막에도 의로서 함께 죽는 것인데 어찌 죽음에 임하여 홀로 면하겠습니까?"

그 후 의병대는 힘껏 저항했으나 끝내 패배를 면치 못했고, 고광순과 고제량은 함께 돌격하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고제량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75년 8월 8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1] 인근의 삼천리·용수리와 함께 제주 고씨 장흥백파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고광문·고광순·고광채·고광훈·고홍석고영한 전 대법관도 이 마을 출신이다.[2] #[3] 음력 9월 10일.[4] 서울현충원묘적부에는 1909년 10월 11일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5] 장흥백파-의열공파-월봉공파(月峯公派) 20세 제(濟) 항렬.[6] 황희의 후손이다.[7] 어머니 장수 황씨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며, 첫째 부인 제주 양씨(? ~ ?. 5. 15) 양석호(梁錫灝)의 딸은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