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윤백(允伯) / 일석(一石) |
본관 | 제주 고씨[1] |
출생 | 1864년 4월 7일 |
전라도 창평현 현내면 유천리 (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2] | |
사망 | 1945년 5월 12일[3] (향년 81세) |
강원도 금강군 | |
상훈 |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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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2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고광순 의병장의 6촌 재종제(再從弟)이다.
2. 생애
1864년 4월 7일 전라도 창평현 현내면 유천리(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서 아버지 고원상(高元相, 1830 ~ 1903. 1. 10)과 어머니 고흥 류씨(高興 柳氏, 1832 ~ 1877. 6. 2) 류지덕(柳志德)의 딸 사이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일찍이 족형(族兄) 고광순의 의병대에 입대하였고, 참모(參謀)에 선임되어 전라남도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1907년 10월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연곡사에서 일본군이 습격하자 고광순으로부터 의병들의 명단이 적혀 있는 문건을 건네받고 피신하여 극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그는 의병대의 재기를 꾀하여 같은 해 11월 전라북도 남원군에서 활동하던 이평국(李平局)과 순창군에서 활동하던 강사과(姜司課) 등과 함께 전라남도 곡성군 일대에서 군사를 규합하고 군수물자를 제조하였고, 몇 달간 광양군·구례군·순천군·곡성군 일대를 전전하면서 유격전을 펼쳤다.
그리고 광주군 무등산에 200명의 의병을 모아 광주군 공격을 꾀했으나 계획이 발각되어 무산되었고, 이후에는 고광덕과 함께 강원도 금강산에 숨어 들어 은거하다가 1945년 5월 12일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고광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