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09 23:42:45

노태준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4. 참고자료

[clearfix]

1. 개요

1911년 2월 17일 ~ 1970년 2월 26일 (향년 59세)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언론인. 임시정부 초대 군무총장 노백린의 차남.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

2. 생애

1911년 2월 17일 경성부 계동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 노백린이 미국에 망명한 후 아버지의 고향인 황해도 송화군에서 지내다가 1921년 상하이로 건너가 인성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큰누나 숙경의 남편인 이원재[2]의 병원이 있는 강릉에서 매형 가족과 함께 지내며 강릉농업학교에 제학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발생하자 강릉에서 항일 시위를 벌이다 발각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31년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고, 1932년 중국중앙 군관학교에 입학해 1936년 졸업하였다. 중국군 13군에 복무 중[3]한국독립당 청년단장에 피선, 청년단원을 모집하였고, 1940년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의 일원으로 서안에 파견되어 첩보 및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 동년 11월 광복군이 창설되자 안춘생, 노복선, 조인제와 제1지대원으로 활동하였다. 1944년에는 광복군 제2지대 제2구대장이 되었고, 1945년 OSS 훈련에 참가하였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 당시 충청, 전라도 지역을 담당하는 제2지구대장으로 활동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 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 1946년 이범석장군 휘하에서 이준식, 송면수, 안춘생 등과 함께 조선민족청년단 창설에 참여해 이사, 조직부장, 서울시지부 단장, 부단장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건국 후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역임했고, 1949년 조선민족청년단이 대한청년단에 흡수된 후, 족청 부단장이던 강인봉과 태양신문[4]을 창간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태양신문을 휴간하였으며, 1951년 11월 20일 복간해 회장에 선임되었으나 곧바로 부사장 양한모[5], 사장 임원규[6]의 대남간첩단 연루 혐의로 어려움을 겪어 1954년 장기영에게 인계하였다.

태양신문 폐간 후 1963년 안호상 등 조선 민족 청년단 출신들과 함께 민우당을 창당하였으나 곧바로 국민의당에 흡수되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1970년 2월 26일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뇌일혈로 졸도, 시립 영등포 병원에 후송되었으나 별세하였다.

3. 가족 관계


아버지 노백린을 비롯한 형제 자매가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형 선경은 숭실학교 재학 중 조선국민회 활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후 경성치과의학교[7]를 졸업하였고, 치과의사로 일하다 해방 후 육군사관학교 8기 특임으로 임관해 1956년 대령으로 전역하였다. 이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큰 누나 숙경은 의사인 이원재랑 결혼해 독립운동에 투신한 가족들을 돌봐주었다. 숙경의 시아버지인 이가순은 독립운동가로 3.1 운동신간회에 참여하였고, 1930년대에는 아들 원재와 고양군에서 수리개간사업을 하였다. 숙경의 작은 시누이인 인순은 정경화, 정명화, 정명훈의 어머니이다. 작은 누나 순경은 세브란스병원 간호사로 근무 중 3.1 운동에 참여해 유관순열사와 옥고를 치렀다. 스코필드박사가 직접 면회를 하기도 하였으며, 1995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공단기 한국사 강사인 신영식이 외손자이다.

4.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독립유공자 공훈록
고양신문 2022년 4월 22일자
당당신문 2022년 4월 26일자


[1]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황해도 송화군으로 되어있으나 출생지가 아닌 본적을 기준으로 기록되었으며, 일부 자료 및 당시 노백린의 행적으로 미루어 경성부 계동에서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2] 독립운동가이자 의사. 1930년대 아버지 이가순과 고양군에서 수리 간척 사업을 펼쳐 37.4 평방킬로미터의 땅을 경작하였다. 이원재의 막내동생 원숙은 트리의 어머니이다. 노태준은 정트리오와 사돈지간 인 셈이다.[3] 중국 정규군 내 한인 장교 명단에 따르면 중위로 복무하였다 한다.[4] 한국일보의 전신[5] 남로당 간부 출신이나 1949년 전향하였고, 김삼룡, 이주하, 성시백 등 간첩들을 체포하는데 공을 세웠다. 1950년 치안국 경감, 1953년 세계통신사 부사장, 1958년 평화신문사 부사장, 1962년 대한증권협회 부회장, 1970년 가톨릭 출판사 사장 등을 역임하고 1972년 크리스천 사상연구소를 설립해 가톨릭 복음 서적 출간 및 연구활동을 하였다.[6] 전 시사통신사 사장[7] 서울대학교치과대학의 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