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목사에 대한 내용은 한상렬(1950)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한상태(韓相兌) |
자 | 문극(文極) |
본관 | 청주 한씨[3] |
출생 | 1876년(고종 13) 4월 2일[4] |
강원도 횡성현 우천면 하수남리 (現 강원특별자치도 횡성군 우천면 문암리) | |
사망 | 1926년 9월 19일 (향년 50세) |
중화민국 |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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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조선 말기의 의병장. 자는 문극(文極).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1907년 이후 강원도 횡성군·홍천군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경술국치 후에는 대한독립단 참모로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2013년 2월 국가보훈처에 의해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2. 생애
1876년 4월 2일 강원도 횡성현 우천면 하수남리(現 강원특별자치도 횡성군 우천면 문암리)의 대지주 가문에서 아버지 한동수(韓東洙, 1852 ~ ?. 2. 13)[5]와 어머니 연일 정씨(1852 ~ ?. 1. 5)[6] 사이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젊어서 보부상의 우두머리로 활동했다.1907년 7월 체결된 정미 7조약으로 8월부터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단행되자, 강원도 횡성군에서 지역민을 중심으로 200여 명 규모의 의병을 일으켜 의병진을 창설했고, 전군(前軍)대장에 이창호(李昌五), 중군(中軍)대장에 김화춘(金和春), 후군(後軍)대장에 한상오(韓相五) 등을 임명했다. 1907년 10월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해산된 대한제국군 출신 장병 등을 규합하면서 의병은 한때 1,200명의 규모까지 확대될 정도로 흥성했다. 1907년 10월 31일에는 강원도 횡성군과 경기도 지평군 사이에 있던 모고곡(毛古谷)[7]에서 한갑복(韓甲復)·민긍호(閔肯鎬)·이인영(李麟榮)·여용서(余龍瑞)·장모(張某)·심상희(沈相熙) 등의 의병진과 함께 8천여 명의 연합 의진을 결성했다. 이를 통해 1908년 2월까지 경기도 지평군, 강원도 횡성군·홍천군·원주군·평창군·영월군 등지의 산간지역에서 500회에 걸쳐 일본 제국 육군과 교전을 벌이는 등 활약했고, 앞서 먼저 원주군에서 원주군 주둔 대한제국군 진위대를 중심으로 봉기했던 민긍호와 연합작전을 통해 충청북도 충주군 충주성 공격을 감행해 일본 제국 육군에 큰 타격을 입힌 뒤 무기와 탄약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다.
일본 제국 육군의 특별편성부대 배치와 의병에 대한 정찰이 날로 강화되었고, 민긍호 장군이 1908년 2월 29일 일본 제국 육군에 체포돼 순국했다. 그럼에도 1908년 3월 19일부터 3월 25일까지 홍천군 서석면 청량리에서 일본 제국 육군과 4차례에 걸쳐 큰 교전을 치르는 등 한창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었고, 1908년 4월 2일에는 횡성군에 주둔하던 일본 제국 육군 수비대에서 한상렬을 체포하기 위해 홍천군 영귀미면 월운리 서북후동에 있던 한상렬의 자택을 급습하고 한상렬의 부인 밀양 박씨(1873 ~ ?. 11. 25)[8]와 외동딸 등을 납치·감금해두었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의병장 김현국·금기철과 연합해 4월 20일 횡성군 읍내에 주둔한 일본 제국 육군 수비대를 습격하기도 했다.
이후 일제의 탄압이 계속되면서 한때 최대 1,200여 명의 규모까지 확대되었던 한상렬의 의병진은 20명 정도로까지 대폭 축소되었고, 이에 의병진을 해산하고 중화민국으로 망명해 활동무대를 옮겼다. 그곳에서 이범윤·유인석 등이 조직한 성명회(聲明會)에 가입해 활동했고, 1915년 창의소(彰義所)를 조직하고 중대장에 임명되어 함경북도 경흥군에 주둔하던 일본 제국 육군에 대한 습격 등을 계획하였다. 1919년 10월 서일·김좌진이 중심이 되어 대한군정부가 조직되자, 방화대(放火隊) 제2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홍범도가 조직한 대한독립군에 입대해 결사대원 120~170여 명을 거느리고 길림성 연길현(延吉縣) 일량구사(一兩溝社) 일대에서 보급품 확보 및 선전활동, 독립군 모집활동을 전개했다. 1920년에는 대한의용부 참모로 활동했고, 같은 해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왕청현 나자구(羅子溝)에서 홍범도·전이국(全二國) 등이 조직한 도독부(都督府)의 경호국원(警護局員)에 임명되는 등 중화민국 길림성·봉천성,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을 전후해 만주 지역 독립군 단체들이 다시 조직되고 재편되는 과정에서 김좌진 장군을 보좌했으며, 김좌진이 1925년 설립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 동우회에서 선전계장, 군자금 모금계장으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중동선(中東線) 대표로 북만주 의용군의 창설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1926년 2월 대한독립단 참모가 되었다.
그러나 1926년 9월 19일 민족진영의 분열을 책동하던 주중국청년총연맹 소속 ML파 공산당원의 흉탄에 순국하면서 한상렬의 독립군 활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