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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1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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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2929> 김희선
金羲善
<colcolor=#FFF>
파일:김희선.png
출생 <colbgcolor=#fff,#1f2023> 1876년 3월 21일 (고종 13)
평안남도 강서군
(現 남포시 강서구역)
사망 1950년 9월 28일 (향년 74세)
서울특별시 공릉 근교
직업 관료, 군인
본관 전주 김씨 (全州)
학력 경응의숙 (졸업)
세이조학교 (졸업)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주요 경력 구 한국군 육군 참령[1], 시위기병대장
시종무관, 평안남도 개천군수
평안남도 안주군수,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
육군무관학교 교장, 군무총장 대리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비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서훈 대통령표창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2]

1. 개요2. 생애
2.1. 두번째 변절?
3. 사후4. 논란
4.1. 사망일 논란4.2. 종합
5.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제국의 군인이자 일제강점기의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본래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나 친일파로 변절했고 3.1 운동 직후 다시 독립운동가로 전향했다 다시 친일파로 전향한 특이한 행보를 보인 인물이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나 1996년 서훈이 취소되었다.

2. 생애

1876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력은 초기의 독립운동가로서의 행보와 중간의 친일 행적, 후반부의 독립운동으로 나뉜다.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 경응의숙 속성과를 수료하고 1898년 세이조(成城)학교 보통과 졸업, 1899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한국군에서 활동했다. 1908년에는 친왕부무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마음먹고 1910년에 도산 안창호 선생이 주도한 청도회담에 참석했다가 일본에 의해 강제 귀국당했다.

이 때쯤 일제는 회유 정책을 펴고 있었고 여러 온건 독립운동가들이 회유되었다. 소설가 이광수, 최린 등이 이 때 회유된다. 김희선 또한 이 정책에 걸려들었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따르면 1913년부터 군수로 활동했다. 물론 그는 실제로 취임해 활동했다. 사이토 문서에 따르면 그는 사이토 총독을 3번 정도 면담했다.[3]

하지만 3.1 운동이 일어나자 김희선은 이것을 지원했고 돌연 군수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임시정부로 건너가 군무부 차장을 맡았고 항일 독립전쟁을 계속했고 의정원 의원이 되기도 했다.

이후 기록에 따르면 1925년 일본군과 교전 중 5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나와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으며 이후 독립신문 등에서 변절했다며 비판한 기록이 남아 있다.

2.1. 두번째 변절?

"병학 배운 애국자로 이름 높은 김희선은 총독부의 군수 노릇 내버리고 반정하매 그 전과를 용서하고 그 지기를 가상히 여겨 동지들이 그를 채용하여 군무차장 시켰더니 목욕시킨 돼지가 감귤 맛을 못 잊어서… (중략) 제 계집년 도망할 제 왜놈에게 재항하고 귀화장을 써 바쳤다… (중략) 3년, 냄새나는 송장 놈을 차장 시킨 책임자의 잘못이다. 그놈 욕해 무엇하리. 이런 놈은 죽은 개니 육시처참 할까 말까"
독립신문
"김희선은 아정부에서 중희 등용하여 우우하여왔는데 은의를 망각하고 변심하여 드디어 적에게 투귀하였다. 그 죄 사면하기 어렵다."
임시공보 제 2호 중

김구의 주장에 따르면 또 다시 변절했다는 것이다. 아예 3.1 운동 직후 임시정부에 합류한 것 자체가 정보를 넘기기 위해서 합류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 변절 이후의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고 1950년 6.25 전쟁 당시 월남했고 전쟁 도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3. 사후

김희선은 1963년 내각사무처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해 포상할 때 그는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보훈처의 공적 재심사를 거쳐 1980년에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국민장은 유관순 열사나 임시정부 요인 정도의 인물이 받을 정도의 상이었는데 그가 아주 높이 평가된 것.

하지만, 1996년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김희선 등 5명에 대해 독립유공자 예우를 배제하기로 하였다. 친일 행적이 확인되었기 때문. 그동안 독립유공자들 중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있다는 주장이 계속되어 왔다. 원래 대한독립군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과 전투 중 사망했다는 이유로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런데 일제의 회유 정책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군수 직을 맡은 적이 있다. 이와 같은 친일 행적이 보훈처가 간행한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수록되어 있었다. 그는 보훈처가 서훈을 취소할 때까지 30여년 동안 독립유공자로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의 변절이 민족 진영에 큰 타격을 주었고 친일의 정도가 심했다는 것.

4. 논란

4.1. 사망일 논란

당시 기록의 부실로 인해 사망일이 확실하지 않고, 여러 주장이 제기 되고 있다. 첫번째는, 1925년 3월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 두번째, 1945년 6월 사망. 세번째는, 한국 전쟁 때 서울 근교 공릉(현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서 사망.

당시 보훈당국이 부실했기 때문에 조사 과정에서 사망 일자가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다. 또 그의 손자인 김종언이 조작을 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4.2. 종합

이 부분은 김용주 문서를 참조하였습니다.

이상의 논란을 최대한 중립적인 위치에서 서술해야 하는 위키의 준칙에 의거 중재위의 결정에 입각하여 결론 내린다면 다음과 같다. 그는 최종적으로 단순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하긴 어렵지만 친일 행위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사실, 지금처럼 논란이 된 일이 잦지 않아서 그렇지 반민특위 시절부터 내려온 친일파에 대한 기준은 한결 같다. 처음에는 친일 행적을 보였으나 나중에 항일 운동에 합세한 게 확실한 인물들은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고, 처음엔 항일 운동을 하다가 후에 친일파로 변절한 인물은 친일파로 분류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인사들은 수도 없이 많다.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이후부터 일제가 극단적으로 나아가면서 해당 인물들에게도 극단적 선택을 요구했기 때문에, 항일과 친일에서 줄타기 하던 인물들이나, 그래도 버티던 인물들의 상당수가 친일로 넘어간다.[4]

그는 친일 행보와 민족적 행보 모두를 자처한 것으로 보아 기본적으로 기회주의자적 성격을 가졌던 인물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자칫하면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은 물론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인물을 친일 인사로 결론지어 버렸다면 허위사실 유포가 된다. 참고로 망자에 대한 명예훼손은 친고죄에 속한다. 다만 친일 부역 행위를 하였느냐 안하였느냐로 본다면 '했다.' 가 맞다.

5. 둘러보기

※ 이 문서가 설명하는 인물은 사망년도가 확실하지 않아 편집에 주의를 바랍니다.[5][6]



[1]대한민국 육군 소령.[2] 친일 행적으로 인해 1996년 서훈 취소.[3] 이 횟수는 이하영이나 경술국적에 이름을 올린 윤덕영 등의 횟수와 같다.[4] 예를 들면 조선귀족 작위를 받았으나 3.1 운동에 협조해 작위를 박탈당한 김윤식, 이용직 등의 사례는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으나 본래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지만 친일파로 변절한 정춘수최린 등의 사례는 친일파로 분류된다.[5] 1925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되, 1950년에 사망했다는 주장도 기록한다.[6] 두번째 변절에 관한 내용도 그에 맞춰 서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