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50년 3월 13일 |
경상도 예안현 의동면 하계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하계마을) | |
사망 | 1910년 10월 20일[1] (향년 60세)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하계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하계마을) | |
본관 | 진성 이씨[2] |
아명 | 이문석(李文錫) |
이명 | 이소자(李小字) |
자 | 중관(仲寬) |
호 | 동은(東隱) |
가족 | 배우자 김주락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16호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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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의병. 독립유공자 김덕기의 외조부이다.[3]2. 생애
2.1. 초년기
1850년 3월 13일 경상도 예안현 의동면 하계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하계마을)에서 아버지 이만우(李晩佑, 1813 ~ 1883.6.3.)[4]와 어머니 의성 김씨(? ~ ?.2.4.)[5] 사이에서 2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그의 가문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명문가인 진성 이씨로, 본인 또한 퇴계(退溪) 이황의 12대손이다. 5대조 목우당(牧牛堂) 이세관(李世觀, 1689 ~ 1770.8.20.)은 이조참의에 증직되고, 4대조 이귀원(李龜元, 1722 ~ 1797.3.17.)은 첨중추부사, 종증조부 초초암(草草庵) 이태순(李泰淳, 1759 ~ 1840.1.30.)[6]이 순조 때 사간원 대사간, 헌종 때 병조 참판에 올랐다. 조부 이휘제(李彙濟, 1792 ~ 1817.4.17.)[7]는 부호군, 부친 이만우(李晩佑)는 첨중추부사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8] 그리고 어머니 숙부인은 김진두(金鎭斗)의 딸이다. <진성 이씨 족보>에 따르면, 이중언은 15세가 되기도 전에 이미 사서삼경에 능통했고, 집안 친척들과 함께 산사로 들어가 성리학 공부에 매진했다고 한다.
1872년 향시에 입격한 뒤 1879년 3월 21일에 고종의 친림 하에 창경궁 춘당대에서 치러진 식년(式年) 문과에 갑과 제3인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종 7품 관직인 상의원 직장을 맡았으며, 이어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을 역임했다. 1880년, 그는 사헌부 자평에 제수되었고 능묘 제사에 책임을 맡아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다가 1880년 11월 조선책략을 수용한 조선 정부가 러시아를 배척하고 청나라, 일본, 미국과 친선 관계를 맺으려 하자, 이중언은 이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자는 통문의 발의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해 11월 25일, 조선책략을 비판하고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김홍집 등 개화 대신들을 강하게 규탄하는 내용의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가 조정에 올라왔다. 이에 조정은 영남만인소의 주모자들을 모조리 유배보냈고, 이중언은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2.2. 을미의병
1892년, 이중언은 봉화군 임당산(林唐山) 기슭의 신암폭포 인근에 은거해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아갔다. 그러던 1895년 을미사변이 발발했고 뒤이어 단발령이 발표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각지의 유림들은 통문을 돌려 일제와 친일 대신들을 타도하기 위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이중언은 이에 호응하여 11월 29일 4종숙 이만도가 이끄는 예안 의병대에 가담했다. 앞서 거병한 안동 의병대가 관군에게 크게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겁을 집어먹은 의병들이 도주하면서, 예안 의병대는 결성한 지 9일만에 사실상 와해되었다. 이후 예안 의병대 선봉장을 맡았던 이중린(李中麟)이 김도현(金道鉉)과 함께 보름 만에 2차 의진을 조직했고, 이중언은 다시 의병대에 가담해 전방장(前防將)으로 선임되었다.예안 의병대는 예안을 출발해 안동 풍산을 거쳐 1896년 2월 7일 예천으로 향했다. 그들은 2월 13일 예천읍내 강변에서 다른 6개 의병대와 합류했고, 각 의병대 대표들은 백마를 잡아 그 피를 마시며 동맹을 서약하고 승리를 기원하는 '예천회맹'을 거행했다. 이후 예안 의병대는 태봉 전투에서 선봉에 서서 이틀 동안 일본군과 교전했지만, 일본군의 전투력이 월등해 상당한 타격을 입고 2월 18일 예천으로 후퇴했다. 이후 일본군과 관군이 예안으로 밀려들어오자, 예안 의병대는 청량산으로 들어가 산성을 기지로 삼아 버텼다. 일본군은 4월 20일 청량산 오산당을 불태우고 퇴계종가에 불을 질러 1,400권에 달하는 문서와 책을 소실시켰다. 이후 예안 의병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조정의 해산 명령을 받아들여 4월 29일에 해산했다.
2.3. 을사조약 배척 상소
이중언은 을미의병이 종식된 뒤 신암폭포에 다시 은거했다. 그러던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제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중언은 을사오적을 참형에 처하라는 내용의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지은 뒤 조카 이빈호(李斌鎬, 1861 ~ ?.1.27.)[9]를 대동하고 서울로 향했다. 그는 이 상소에서 일본을 끌어들인 데서부터 이 모든 사단이 비롯되었다고 비판하며, 일제의 강압에도 단호하게 거부한 황제의 의지를 높이 평가했고 다섯 역적을 처형해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외국에 조약이 거짓임을 널리 알릴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상소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통곡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다.2.4. 순국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중언은 목놓아 통곡했다.을사년 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오로지 한 올의 명주실과 다를 바가 없이 목숨을 영위해온 사람이다.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내가 어찌 감히 살아있는 인간으로 자처하겠는가.
1910년 8월 18일, 이중언은 4종숙 이만도가 재산 묘막에서 단식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숙부니까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나는 숙부의 이런 결행이 있으리라는 것을 진정 입산하시던 날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훌륭하신 일이 아닌가! 통쾌한 일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후 9월 8일 이만도가 순국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조상의 사당을 찾아가 사당 앞에 엎드려 곡하고 임북산에 있는 부모 묘소를 살핀 뒤 큰 종가 이하 모든 선조들의 사당을 두루 찾아가 참배하고 자신도 숙부를 따라 순국할 것임을 아뢰었다.
그 후 이중언은 단식을 선언했다. 이에 부인과 아들이 말렸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아들 서호(瑞鎬)가 울면서 고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맏사위 김만식의 숙부인 소락(金紹絡)이 찾아와 “황제로부터 받은 은총이 향산(이만도)보다 적으니, 굳이 향산을 따라 단식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라면서 간곡하게 말렸다. 그러자 이중언이 꾸짖었다.
부인의 수절 여부도 남편의 은공 차이에 따라 결정되는가?
9월 9일, 이중언은 경고문(警告文)을 작성했다. 그는 먼저 짐승 같은 무리들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의리’뿐임을 강조했다. 또 우리 동포가 모두 여기에 매진하여 일제 강점을 용납하지 않도록 하는 초석이 되겠다는 뜻을 밝혔다. 9월 19일, 이중언은 족손(族孫)이자 을미의병 때 함께 싸웠던 이선구(李善求)에게 “옷을 칠한 좋은 관은 쓰지는 말라”고 당부하며, 시를 읊었다.
가슴에 품은 칼날 같은 마음
그 누가 이를 풀어 줄 수 있으랴.
하늘마저 이미 끝나고 말았으니
죽지 않고서 또 무엇을 할까.
내가 죽지 않고 있으니
향산옹(響山翁)이 빨리 오라 재촉하네.
그 누가 이를 풀어 줄 수 있으랴.
하늘마저 이미 끝나고 말았으니
죽지 않고서 또 무엇을 할까.
내가 죽지 않고 있으니
향산옹(響山翁)이 빨리 오라 재촉하네.
며칠 뒤 그는 상복차림으로 대기하던 친족들에게 일일이 뒷일을 당부하면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는염습도 얇게 하고, 장례도 달을 넘기지 말고 간단하게 치르라고 당부했. 맏딸이 와서 울고, 사위들이 안타깝게 인사드렸다. 보름이 지나니 목이 막혀 말하기 힘들어졌다. 10월 4일, 일본 순사 3~4명이 방문하여 음식을 강제로 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그는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고 곁에 있던 사람에게 "빨리 쫓아내라. 아니면 내가 당장 저놈들을 칼로 베어 죽이겠다."고 말했다.
이후 임종이 가까워지자, 시자(侍者)가 상투의 끈을 정돈하고 수염과 머리를 빗긴 다음 손을 들어 옷깃을 여미고 반듯하게 눕히니 곧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단식을 시작한 지 27일만인 10월 4일 저녁 6시 무렵이었다. 향년 60세. 유해는 고향인 하계마을에 안장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본래 고향인 하계마을에 안장되었으나 1971년 10월 20일 배우자 풍산 김씨(豊山 金氏) 김주락[10]의 유해와 함께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1] 국립서울현충원묘적부에는 7월 24일에 사망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2] 상계파(上溪派)-하계파(下溪派) 19세 중(中) 항렬.[3] 이중언의 셋째 딸이 김덕기의 생부 김창경(金昌璟, 1884 ~ 1961.11.13.)과 결혼하였다.[4] 자는 치길(致吉).[5] 김진두(金鎭斗)의 딸이다.[6] 자는 내경(來卿).[7] 자는 여용(汝用).[8] 증조부는 이유순(李儒淳, 1754 ~ 1801.10.5.)이다.[9] 형 이중팔(李中八, 1843 ~ 1902.12.30.)의 외아들이다. 자는 성방(聖邦).[10] 김규현(金奎鉉, 1817 ~ ?)의 장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