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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4:42:57

최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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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최양옥.jpg
이명 권인옥(權仁玉)·최인옥(崔仁玉)
길준(吉俊)
추강(秋岡)
출생 1893년 12월 25일[1]
강원도 횡성현 갑천면 화전리
사망 1983년 6월 15일 (향년 89세)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전촌리
묘소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전촌리 164번지
본관 강릉 최씨[2]
서훈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횡성 4.1 만세운동2.3. 대동단2.4. 공명단2.5. 해방 이후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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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최양옥은 1893년 12월 25일 강원도 횡성현(현 횡성군) 갑천면 화전리에서 법부 주사(主事)를 지낸 최재건(崔在建)과 진주 강씨 강석원(姜錫元)의 딸 사이에서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양반집 맏아들로서 어렸을 때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신학문을 공부했으며 15살 때인 1908년에 안씨와 결혼하여 화전리를 떠나 원주 소초면 둔둔리로 이사했다.

최양옥은 20세 되던 1913년 4월 원주보통학교에 입학해 1917년 졸업하고 서울의 중동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학업에 전념하다가 1919년 3.1 운동이 발발했을 때 파고다공원에서의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이후 그는 서울 입정정(笠井町)에 위치한 부친의 친구 신병선(申炳善)의 집에 거주했다. 그는 그곳에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돌아온 신병선의 아들 신덕영을 만났고 그로부터 독립 운동에 가담하라는 권유를 받자 이를 수락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의했다.

2.2. 횡성 4.1 만세운동

최양옥은 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인 횡성으로 내려왔고 동지를 규합한 뒤 1919년 4월 1일 천도교인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감행했다. 1,300명에 달하는 군중은 장터에 몰려있다가 "대한독립 만세"를 연호하며 장터에 있던 광고판은 물론 군청과 면사무소에 있던 광고판을 부수면서 군청 쪽으로 몰려갔다. 상점과 술집은 대개 문을 닫았지만, 군중은 문을 닫지 않은 상점과 술집을 파괴했다. 이때 횡성에 유일하게 있던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 '가쿠다'도 만세 군중에 의해 불타고 헌병보조원 감독으로 있던 이규화는 군중에게 매를 맞고 도망쳤다.

이때 일본 헌병 상등병인 고지마가 말을 타고 군중을 해산시키려고 거리에 나타났다. 그러자 최동수(崔東壽)가 그를 말에서 끌어내려 밟고 때렸다. 이때 총소리가 울리자 군중은 잠시 주춤 거리다가 이내 헌병분견소로 향했다. 헌병들은 이에 맞서 원주로부터 출동한 일제 보병대의 지원을 받으며 뒷산에 매복하고 있다가 군중의 선두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최양옥은 현 횡성군청 옆 느티나무 밑에 죽은 척 쓰러져 있다가 어둠을 이용해 안홍면 상안리 처가로 몸을 피했다. 그러다 며칠 후 잠복한 일경에 체포되어 압송되다가 횡성읍 수동리에서 수갑을 찬 채 탈출하여 원주에 은신했다.

2.3. 대동단

횡성 4.1 만세 운동 후 원주에 머무르던 최양옥은 김가진이 총재로 있던 대동단의 조선지부 책임자 신덕영이 1919년 음력 11월경 강원도 원주군 소초면 둔둔리로 찾아오자, 그를 만나서 대동단에 입단할 것을 약속했다. 이에 신덕영은 1920년 음력 4월 하순에 '상경하라'는 편지를 보냈고, 최양옥은 음력 5월 3일에 서울로 올라와 신덕영의 집에 동거했다. 대동단은 의친왕을 상하이로 상경시키려 했으나 실패한 뒤 단원들이 대거 체포되자 동지들을 새로 모집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했다. 신덕영은 최양옥과 박일봉(朴日鳳), 노형규(盧衡奎), 노석중(盧錫中) 등에게 전라남도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라고 지시했다.

최양옥 등은 이에 따라 농림주식회사의 주식모집원으로 가장하고 전라남도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했다. 1920년 음력 9월 21일에는 노석정과 함께 신대선의 집을 찾아가 독립운동자금을 내도록 요구했으며, 다음날 노석정과 함께 신유선의 안내를 받으며 곡성군 겸면 칠봉리에 거주하는 심상홍(沈相洪)을 찾아가 마을 앞에 야산으로 나오게 한 후 "우리는 광복단원인데 군자금 1,500원을 내라"고 요구했다. 그후 1920년 9월 26일 단독으로 전람 광주에 내려가 이춘수(李春秀)의 집에 투석한 후 노석중과 전치영(全稚英)을 소집해 그들에게 신덕영 등의 남하계획을 통고하고 이들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의 모집을 위한 사전준비를 했다. 한편, 그는 신덕영의 남하를 위한 경비로 사용하기 위해 노석중과 전치영으로부터 10원씩을 받아 28일 신덕영에게 송금했다.

1920년 10월 1일, 신덕영, 박일봉이 송정리에 도착해 광주 금계리의 조명석(趙明錫)의 집에 머물렀다. 최양옥은 이들의 지휘를 받아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했다. 10월 7일에 박일봉과 함께 조병열(曺秉烈)의 안내를 받아 화순군 도림면 능정리의 손동채(孫東採)ㆍ손영채(孫永採)와 그 숙부인 손영현(孫永絢)의 집에 가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려 했지만 마침 그들이 집에 없어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10월 15일엔 신덕영으로부터 권총을 구해오라는 명령을 받았고 다음날 서울로 상경해 권총을 구하려 했지만 쉽게 구하지 못하다가 신덕영의 애인인 이경민(李敬敏)이 입수한 장난감 권총 2정을 휴대하고 이경민과 함께 광주로 내려왔다.

총을 구입하지 못하여 거사의 추진을 망설이던 최양옥과 신덕영 등 대동단 조선지부원들은 1920년 10월 27일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에 거주하는 유한선의 집에 모여 계획을 추진하기로 하고 독립운동자금의 모집을 위해 반을 나누었다. 제1반은 화순군, 나주군 방면으로서 박일봉, 이윤호가 맡았고, 제2군은 담양군, 곡성군 방면으로 최양옥과 신덕영, 노기준이 맡았다. 최양옥은 장난감 권총 2정을 휴대하고 신덕영, 노기준과 함께 목적지로 출발했다.

그는 먼저 11월 2일에 곡성군 제면 칠보리의 심윤택의 집에 가서 독립운동자금 1,500원을 요구하고 1,000원은 11월 10일, 500원은 11월 15일 수령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곡성군 화면 조양의 신대선(辛大善)의 집에 가서 100원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고 11월 10일 수령하겠다고 알렸다. 11월 3일에는 곡성군 삼기면 월경리의 정호억(鄭鎬億) 집에 들어가 100원을 요구하여 11월 16일 임곡역(林谷驛)에서 수령하기로 약정했으며, 월경리의 정호필(鄭鎬弼)의 집에 가서 200원을 요구하여 100원을 수령했다. 마지막으로 11월 4일에 담양군 창평면 유곡리의 박종호(朴宗鎬)의 집에 가서 집안사람을 전부 묶고 장난감 권총으로 그들을 위협하여 1,000원을 요구하여 40원을 모금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들의 행보를 간파하고 수사에 착수했고, 신덕영은 수집한 자금을 가지고 도피할 수 있었지만 최양옥은 11월 5일 자동차로 전남 광주로 가던 도중 노기준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된 후 신덕영과 다른 대동단 조선지부원들도 후에 대부분 체포되었다. 최양옥은 1921년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자 항소했지만 1921년 12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기가 확정되면서 대규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2.4. 공명단

최양옥은 1926년 11월 15월 형기가 5년으로 감형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출옥했다. 그가 자택으로 돌아오니 부친은 4개월 전에 별세했고 가족은 사방으로 흩어져 가정 형편이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이에 그는 가족을 수습해 농사에 전념하다가 아내 안씨와 합의 이혼하고 1928년 음력 4월 서울에 올라와 신덕영의 처 오씨를 만나 그녀로부터 중국으로 오라는 신덕영의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오씨와 함께 베이징으로 갔지만 신덕영을 만나지 못하고, 신덕영이 허베이성 스자좡에 갔다는 말을 듣고 다시 스좌장에 갔지만 신덕영이 산시성의 타이위안에 가 있단 얘기를 듣고 다시 타이위안에 가서 비로소 신덕영을 만났다.

이후 그는 신덕영과 함께 거주하며 고물장사와 아편 장사를 했다. 그러다가 1928년 음력 6월 스자좡에서 산시성 타이위안으로 거처를 옮겼고, 얼마 후 산시성 군벌 옌시산의 비행기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던 안창남을 만났다. 그는 신덕영, 안창남 등과 함께 ‘함께 소리내어 알린다’는 ‘공명(共鳴)’의 의미를 따서 ‘대한독립공명단(大韓獨立共鳴團)’을 조직했다. 대한독립공명단은 단장, 부단장 외에 재정부, 정치부, 군사부를 두고 있었다. 이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독립운동자금 모금의 임무를 띤 재정부로, 그는 재정부 단장으로서 재정부장에 이영(李英)을 선임했다.

대한독립공명단은 장제스, 옌시산 등의 원조와 일본의 공산주의 운동가 가타야마 센(片山潛), 국내 유지들의 지원을 받아 약 150만원 가량의 자금을 마련하고 중국의 난징, 산시, 바오타우의 세곳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청년장교를 교육시켜 5개 사단 75,000명의 병사를 양성하려 했다. 만약 예상대로 군인이 양성되면 40,000명의 병력을 함경북도로 잠입시키고, 35,000명의 병력을 평안북도 방향으로 잠입시켜 일본과의 전면전을 벌이고 독립군이 중국, 소련 지역으로 도피하고 일본군이 추적케 함으로서 자연스럽게 일본과 중국, 소련간의 전쟁을 유도하려 했다. 또 그들은 자신들이 조선으로 침입하는 동시에 국내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면 자연스럽게 한국의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최양옥은 이 원대한 작전을 달성하기 위해 먼저 단원의 확보에 주력했다. 그는 은 1928년 음력 9월 대동단 조선지부원으로 활동하였던 김정련(金正連)을 포섭해 공명단에 가입시켰다. 그리고 1929년 3월 김정련의 소개로 이선구(李善九)와 접촉하여 그 역시 공명단에 가입시켰다. 그 외에 베이징 순비문 밖에 거주하는 이화(李華)와 김정환(金政煥)을 비롯하여 이일재(李一載), 정동석(鄭東錫), 이용화(李容華), 이의재(李義載), 노중현(盧仲鉉) 등도 역시 공명단에 가입시켰다.

최양옥은 1929년 5월 서울에서 열리는 산업박람회에 잠입해 일본의 고관과 관헌을 살해하고 송금차량을 탈취하여 독립운동자금으로 확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28년 음력 10월 안창남으로부터 600원을 받은 후 1928년 음력 12월 15일 신덕영과 작별하고 김정련이 거주하고 있는 스자좡에 갔다. 그러나 김정련은 이미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었고, 그의 총 한 자루는 베이징 순지문 밖에 거주하던 김정환에게 맡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이에 최양옥은 김정환에게 자신의 총 두 자리를 맡기고 김정련이 압송되었다는 텐진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김정련이 텐진에서 풀려나 조선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남만주 안동에서 동지를 규합하려고 1929년 2월 18일 다롄에 도착했다가 수이샹경찰서에 체포되었다. 그는 텐진의 일본총영사관에 압송되었다가 안창남이 보석금 340원을 지불해준 덕분에 2월 25일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베이징으로 가서 김정환으로부터 권총 3자루를 수취한 뒤 3월 6일경 베이징을 출발했다. 그는 펑텐으로 가면서 신의주 외곽 중지도에 머무르던 김정련에게 입국 계획을 알리고 펑텐에서는 김정련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3월 7일 안동역에 도착할 것이니 안동역으로 나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리하여 그는 3월 7일 밤 8시경 안동역에서 김정련과 만났다.

최양옥은 김정련과 함께 안동역 근처의 송반여관에서 이틀간 묵고 동월 9일 하이둥여관에 옮겨 투숙했다. 이후 그는 해동여관에서 김정련과 이선구를 자주 만나 경춘가도의 송금차량 탈취 작전에 대한 대략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구체적인 실행방법은 현장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그들은 계획을 추진하기까지 안동에서 숙박업 또는 세탁업을 경영하려고 했지만 자금의 부족과 설비의 부족으로 소기의 영업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국내에서의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29년 4월 4일 김정련과 함께 평북 용천군 양광면 봉덕리에 살고 있는 김정련의 17촌 조카 김인옥(金仁玉)의 집에 찾아가 강도로 위장하고 160원을 마련했다. 이후 그는 4월 7일 동료들과 함께 하이둥여관에 모여 숙박비를 지불하고 남은 40원을 여비로 삼아 서울로 가기로 결정했다.

최양옥은 4월 8일 오후 2시경 권총 2정과 실탄 22발을 양본 안의 복부에 은닉하고 김정련과 함께 신의주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인선구의 집에 찾아가 출발에 대해 협의했고, 1929년 4월 9일 오전 1시 신의주를 출발해 9일 오전 7시 5분에 경성역에 도착했다. 그 후 11일 오전 9시 50분경 경성역에 도착한 이선구를 맞이한 뒤 사직공원 등에서 거사를 벌이려 했지만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거사가 지체되었다. 그러다가 4월 16일 마침내 의견의 합의를 본 그들은 4월 17일 오전 11시경 경성역 황금정 2정목에 위치한 이명구(李命九)의 집을 출발하여 방산정 63번지 잡화상 유흥관(柳興寬)의 집에서 삼놋줄 등 필요물품을 구입한 후 차를 타고 양주군 구리면 교문리에서 내려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의 안칠성(安七星)이 경영하는 여인숙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머물렀다. 그는 이곳에서 이선구에게 모젤식 권총 1정과 실탄 8발을 넘겨주고 사격술을 가르쳤다.

다음날인 18일 오전 7시경, 최양옥 일행은 아침을 먹고 양주군 미금면과 화도면의 경계인 마석 고개에 도착했다. 그들은 춘천 방면으로부터 오는 차량을 감시하기에 용이한 정상 바로 아래에 위치한 후 실행과 도주 방법을 결정했다.
실행 방법
1) 우편 자동차가 오면 이선구는 자동차를 향해 우츤에 정지하여 손을 들어 자동차를 세울 것. 만약 이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권총을 들이대고 협박한 후 정차시키고 운전대에 올라 운전을 한다.
2) 최양옥은 자동차를 향해 좌측에 있고 그 때의 상황에 따라 권총으로 협박, 정차시키고 즉시 운전사를 삼놋줄로 포박한다.
3) 김정련은 자동차를 향해 좌측에 있고 이선구, 최양옥보다 먼저 금곡으로 향해 2,3정 떨어진 장소에 위치하여 경성 방면에서 오는 자동차, 기타 통행인을 감시하고 만일 우편 자동차가 정차하지 않을 때는 권총으로 협박하여 정지시킬 것.
4) 일이 성공하면 우편물칸 안으로 들어가 빨간 행낭을 찢고 현금을 탈취할 것.

도주방법
1) 실행 후 제1안으로서는 범행 후 양주군 의정부를 거쳐 장단군 고랑포로 나와서 황해도로 들어가 점차로 국경으로 도주하여 안동현에 도착하여 후사를 도모할 것.
2) 제2안으로서는 즉시 자동차를 운전하여 경성에 잠입하여 기회를 보아 철도로 안동현으로 도주하고 후사를 도모할 것.

이윽고 춘천을 출발한 경성우편국의 제7호 차량이 오후 1시 40분경 마석 고개마루의 계획된 지점에 이르자, 김정련은 망을 보고 이선구는 손을 들어 차를 정차시켰다. 우편차량이 정차하자, 최양옥과 이선구는 즉시 차에 뛰어올랐다. 최양옥은 운전사 사 김영배(金泳培)에게 총을 겨누고 삼놋줄로 그를 묶어 조수석에 앉힌 후 이선구가 운전을 하여 금곡 방면으로 차를 몰았다. 이때 마석고개 내리막길에서 서울을 출발하여 춘천으로 향하던 오성 자동차 소속의 447호 자동차와 만나자, 최양옥 일행은 차를 세우고 기관부의 발화장치를 파괴한 뒤 운전사와 승객을 그 차의 상자 안에 감금했다. 마침 그 곳을 지나던 행인 4,5명도 제지하여 그 차의 상자에 감금했다.

이후 최양옥은 김정관과 함께 우편차량의 뒷 칸에 실은 우편행낭을 뒤졌지만 현금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그는 차량에 감금했던 승객으로부터 33원을 획득한 후 오성자동차의 운전사 백남성(白南星), 승객인 이규면(李圭冕)에게 ‘대한독립공명단 만세’를 세차례 소리 높여 외치게 했다. 최양옥 등은 미금면 평내리 입구에서 도피하려다가 마침 춘천발 서울행 선일자동차가 오자 이를 세워 운전할 수 없게 만든 후 승객으로부터 혐금 20여 원을 갈취하고 우편송금차량의 운전사 김영배와 선일자동차의 운전사 이기선(李起善)을 데리고 천마산으로 도피 중 평내리 뒷산에서 운전사들을 돌려보내고 오후 2시 30분경 천마산 산중으로 도피했다.

최양옥 일행은 천마산 정상에서 자금을 분배하고 경계가 엄중할 테니 배로 뚝섬에 상륙하여 서울로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세 사람은 19일 새벽 양주군 화도면 녹촌리에 거주하는 의 임희종(任熙宗)의 집에 도착한 후 인근의 암굴에 은거하면서 그로부터 식사와 의복을 제공받았다. 이들은 야음을 틈타 저녁밥을 먹고 한강을 통해 서울에 들어가려고 오후 8시경 임희종의 집에 이르렀을 때 경찰에게 발각되어 추적을 받았다. 도피 중 일행에서 떨어진 김정련은 20일 오전 0시 20분 그곳 인근의 독립가옥에서 체포되었고, 최양옥은 이선구와 함께 20일 오전 6시 양주군 와부면 덕소리 동쪽 한강변에서 배를 타고 구리면 수석리에 상륙하여 아차산에 숨었다.

이후 최양옥과 이선구는 20일 오전 9시 30분경 망우리 고개로 나와 남상진(南相鎭)이 모는 내선자동차(內鮮自動車) 경(京) 제408호를 정지시켜 빼앗은 후 이선구가 직접 운전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10시 20분에 경성에 도착한 두 사람은 일제 경찰의 경비를 뚫고 서울의 황금정 5정목에 들어와서 본정통 4정목 경성암에서 닭고기 계란 덮밥과 맥주를 먹은 후 다시 택시를 타고 무장경관대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오전 10시경 일전에 감옥에서 면식이 있던 정국민(鄭國敏)이 살던 적선동 어구에 내렸다. 이후 택시요금으로 1원을 준 최양옥은 이선구와 작별했다. 이선구는 수년전에 충주 모자동차부에서 운전수로 일할 때 같이 지냈던 이명구(李命九)의 집을 찾아갔다가 사전에 그곳에 매복하고 있던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최양옥은 체부동 118번지에 머물고 있던 친척 최상하(崔相夏)의 방에 은거했다가 이선구가 체포된 뒤 자신의 위치를 불어버리는 바람에 4월 21일 오전 5시 30분 최상하의 방에서 잠을 자다가 종로서원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체포된 뒤 일본 경관이 총을 찾으려고 허둥되자 "총은 이불 속에 들어있다."고 알렸다. 또한 그는 포승줄에 양 팔이 묶여 문 밖을 나가면서도 그를 둘러싼 신문기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기자로서 해외에 공명단이라는 유력한 단체의 존재를 모르고 공명의 명자를 울명자로 잘못 게재하였다!

<동아일보> 1929년 4월 22일자 기사는 최양옥 사건의 총책임자를 맡았던 다나카 경찰부장의 심경 토로를 게재했다.
이번 사건은 내가 약 10년간 조선경찰계에 있는 동안 처음 보는 것이며, 자동차를 운전하여 범적을 감춘 사실이며 사회에 대하여 큰 불안을 준 것도 처음이다. 내가 이 사실을 접하기는 지난 18일에 다카마스노미야(古松宮) 전하를 봉송하고 돌아오는길이었는데, 일분이라도 속히 범인을 체포하고자 고심한 것과 한 명은 곧 체포하였으나 두 명은 잡지 못하고 21일에 시내에 잠입토록 하였음은 실로 민망할 뿐 아니라 이 사실은 나의 개인으로서도 참으로 중대한 책임이었다.

최양옥은 취조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경성지방법원에서 8개월간 예심 공판을 치른 뒤 1929년 12월 13일 치안유지법 위반, 총포화약류취제령 위반, 우편법 위반, 강도의 죄목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마포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한편 김정련은 징역 9년, 이선구는 6년의 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함께 복역했다. 그러나 이선구는 단식투쟁을 벌이다가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고, 최양옥의 딸은 집안에 들어오려는 일본 경찰을 제지하다 높은 뜰 아래로 밀쳐져 척추가 부러져 1년간 꼼짝 못하고 누워있다 숨을 거두었다.

최양옥은 1939년 12월 13일 경성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하여 서울의 사촌 최양준의 집에서 요양을 하며 지냈다. 그는 중국 방면으로 가려 했지만 일제의 감시가 심해 그러지 못하고 충청북도 괴산군 노평에 거주하는 사업가 우순(禹淳)에게 고용되어 마부가 되어 종로를 횡행하며 하루하루를 근근히 살아갔다.

2.5. 해방 이후 경력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한 최양옥은 그해 9월 16일에 서울 천도교기념관에서 창당된 한국민주당에 가입하여 선전부를 맡았다. 그러나 한국민주당이 좌우합작 원칙 문제로 분열되자 1946년경 여러 당원들과 함께 탈당했다.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법무부장관 이인(李仁)으로부터 경성형무소[3] 서무과장으로 임명된 그는 6개월간 근무하다가 1949년에 인천소년형무소 소장으로 발령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할 무렵, 인천소년형무소 소장 최양옥은 전 직원들에게 비상 경비에 임하게 했지만 사태가 곧 호전될 것으로 생각하여 전시에 대비한 별다른 대책은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6월 28일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형무소 내는 불안에 휩싸였다. 상부로부터 아무런 지시도 받지 못한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6월 30일 소년 수형자들이 집단으로 탈출하는 걸 막지 못했다. 이후 한강 방어선을 준비 중인 국군지휘부로부터 탈주 재소자의 체포 및 형무소 직원들의 직장 복귀를 지시받은 그는 국군과 함께 탈주 재소자들의 체포에 나서 수백 명을 재수용했다.

그러나 북한군이 인천소년형무소로 접근하자, 최양옥은 직원들과 함께 재소자를 내버려둔 채 충남 당진으로 도주했다. 이후 형무소에 남겨진 소년수형자들은 북한군에 편입시켜 전선으로 보내졌다가 낙동강 전투 때 대부분 전사했다. 최양옥은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과 동시에 인천으로 돌아와 업무를 보았지만 1.4 후퇴 때 다시 피신하여 경북 김천형무소에서 업무를 봤다. 그 후 다시 부산 형무소로 갔다가 4, 5개월 후에 인천 소년 형무소로 복귀했다.

1952년 6월 25일,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최양옥은 김시현으로부터 이승만 대통령 암살에 가담하라는 제의를 단호히 거부하고 이 사실을 내무부에 고발했지만, 그 역시 암살 미수 사건의 공범으로 간주되어 법정에 소환되었다. 최양옥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사전에 내무부에 김시현이 대통령 암살을 모의했다고 고발했는데 왜 체포했냐고 물었더니 수사 담당자가 "김시현이 인천에 왔을 때 왜 잡아주지 않았고 동정하지 않았냐. 그것이 죄다."고 말했다고 한다.

최양옥은 2년간 재판을 치른 끝에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인천소년형무소장에서 물러나야 했고, 이후로는 어렵게 살다가 1963년에 민정당에 가입하여 정계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1963년 3월 22일 군정연장반대투쟁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선출되었지만, 민정당이 민주당과 합당하여 민중당을 출범시키자 탈당하고 신한당에 가입했다. 1967년 2월 민중당과 신한당이 통합하여 신민당으로 결성되었을 때 그 역시 이에 가담하여 신민당원이 되었다. 1975년 3월 7일 민주회복국민회의 인천시지부가 결성되었을 때, 최양옥은 전 신민당 인천시당부위원장 김진두와 조철구와 함께 고문에 위촉되었다.

그러나 그는 정계 활동을 그다지 적극적으로 하지 않다가 1980년 정계를 완전히 은퇴하고 부친이 묻혀 있는 횡성군 갑천면 전촌리로 아내와 함께 귀향했다. 그는 매일 집 앞의 선산에 오가며 부모의 묘에 예를 다하고 때로는 전촌 저수지에 낚시를 드리우며 하루를 보냈으며, 가끔 동지들과 함께 기념사업에 참석하거나 옛 동지인 이선구의 묘소를 찾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러던 1983년 6월 14일, 그는 자택에서 병사했다. 향년 89세.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을 국립묘지에 매장하지 말고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전촌리 야산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따라서 그의 유해는 전촌리의 야산 선친의 묘소 아래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최양옥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1] 다만 족보에는 1894년 12월 5생으로 되어 있다.[2] 경주계-매창공파 32세손.[3] 서대문형무소의 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