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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 | 모세 |
출생 | 1909년 7월 21일 |
한성부 종로구 | |
사망 | 1976년 2월 11일 (향년 66세) |
서울특별시 세브란스병원 | |
본관 | 여흥 민씨 |
가족 | 아버지 민제호 삼촌 민필호 |
학력 | 인성학교 (졸업) 원동중학교 (졸업) 만국항해학교 (졸업) |
경력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상교참모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총무처장 해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제9대 해군사관학교장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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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해군 제독. 제9대 해군사관학교장.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1909년 7월 21일 한성부 종로에서 민제호[1]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부친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운영하는 인성학교를 거쳐 원동중학교, 만국항해학교를 졸업하였다.중일전쟁 발발 당시 상해화풍수선회사의 선장으로 근무해 한커우에서 난징으로 군수품을 수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하자 지달수[2], 김태산, 나태섭과 주계장에 임명되고, 1941년 광복군에서 경리업무를 맡았다. 1942년에는 창사와 광저우에서 항일 선전공작을 전개하였고, 동년 12월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에 근무하며 회계업무를 담당했다.
1943년 독립운동가 가족들을 이끌고 류저우로 이동해 항일가극단을 조직해 항일 선무공작에 힘썼고, 광복군 총사령부 주계과장으로 광복군 대원들의 보급을 담당했다. 1944년 6월에는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과원으로 경호업무를 맡았고, 1945년 2월에는 임시정부 재무부 경리국장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총무처장으로 행정, 재무업무를 맡다가 1947년 11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대한민국 해군장교로 임관하여 인천만 기지 사령관을 지냈고, 6.25 전쟁 당시 해군본부 항무관으로서 군수물자 및 병력 수송에 공을 세워 미국 동성훈장을 수여받았다. 전후 미 대사관 해군무관을 지내고, 해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1956년 해군 후방참모부장, 1959년 해군사관학교 교장에 임명됐다. 1960년 해군 소장(임시계급)에 진급하였으나, 군수품 착복으로 인한 해군사관생도들의 불신임 운동으로 교장직을 그만두었다. 1961년 군수품 착복 건은 기소유예로 풀려났고, 동년 해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1976년 2월 11일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하였다.
3. 여담
이종찬 초대 국정원장이 육군사관학교지원을 할 때 김관오 장군과 함께 추천서를 작성해주었다. 당시 추천서를 본 생도대장 이용이 "소위 독립운동가의 집안이란 건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 사실을 들은 민영구 제독은 당시 교장이던 이종찬[3]장군에게 항의하였다. 다만 항의하기 전에 이미 육군사관학교 시험에 합격했다고 한다.4. 가족관계
아버지 민제호를 포함하여 가족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아버지 민제호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역임하였고, 숙부 민필호는 임시정부 외무차장, 주화대표단 부단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며 건국 후에는 중화민국초대 총영사를 지냈다. 동생 민영완은 1927년 상해 청소년 비밀결사인 화랑사를 조직했고, 중국 중앙항공학교 졸업 후 중국 공군에 복무하면서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해방 후에는 이시영 초대 부통령의 비서관으로 근무했다. 사촌이자 숙부 민필호의 아들인 민영수는 중국중앙군관학교 18기를 졸업하고 광복군에 복무하며 OSS훈련에 참여하였고, 해방 후에는 외교관으로서 주 중화민국 공사를 역임하였다. 민영수의 동생 민영주도 광복군 제2지대에서 활동하였고, 김준엽 전 고려대학교 총장의 부인이다.5. 참고자료
독립유공자 공훈록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