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리원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승룡
성명 | 박승룡(朴承龍) |
생몰 | 1872년 9월 21일 ~ 1957년 6월 1일 |
출생지 | 함경남도 리원군 리원읍 서문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박승룡은 1872년 9월 21일 함경남도 리원군 리원읍 서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도교 신자로,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 이원지단(利原支團)의 이름으로 동지 이도재(李道在)·김병준(金秉濬)·공시우(孔時祐)·장홍규(張弘奎) 등과 더불어 3월 10일 이원에서 만세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동지들을 이원읍내와 인근 부락에 파견하여 거사계획을 알리도록 하였다. 이후 3월 10일 아침 700명의 군중이 읍내 장터에 모이자, 그는 이도재, 김병준 등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하다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된 그는 1919년 6월 30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아 8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기각되었고, 10월 25일 고등법원에서도 역시 상고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서울로 이주해 조용히 지내다 1957년 6월 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박승룡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명천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승룡
성명 | 박승룡(朴承龍) |
이명 | 박승훈(朴承勳) |
생몰 | 1897년 12월 29일 ~ ? |
출생지 |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포항리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박승룡은 1897년 12월 29일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포항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4일 하가면 화대동 거리에서 5,000명의 시위대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가 일제 헌병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5명이 숨지고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3월 15일 화대시장에서 최계락(崔啓洛)ㆍ허을ㆍ허영준(許英俊)ㆍ김성련(金成鍊)ㆍ김익련(金益鍊)ㆍ김재한(金在漢)ㆍ허현 등과 함께 천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2차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들은 하가면사무소에 이르러, 면장 동필한(董弼漢)[1] 을 끌어내어 "너도 조선 사람이니 우리의 대열에 참가하여 같이 만세를 부르자"고 했다. 그러나 동필한이 "나는 조선총독이 임명한 면장이니 총독의 지시가 없이는 만세를 부를 수 없다."고 하자, 군중들은 격분해 면장에게 침을 뱉고 이리저리 쳤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된 박승룡은 1919년 8월 22일 경성복심범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 상해죄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박승룡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성구동 광천 동씨 집성촌 출신. 아래와 같이 구한말부터 지역 유지로 군림하였다. 구한말이던 1907년 10월 23일 함경남도 관찰도주사(觀察道主事)에 임명되었다.# 이후 1910년 11월 5일 조선총독부 도서기를 그만두었고 1911년 7월 12일부터 1912년까지 경성군 서기로 근무했고, 1915년 9월 9일에 화태금융조합(花台金融組合)을 설립하여 대표로 취임, 1933년 4월 당시에도 대표로 있었다.# 1918년 8월 28일 함경농공은행 주주로서 조선식산은행 창립에 참여하였다. 1919년 전후부터 명천군 하가면장을 지낸 사실이 확인된다.조선총독부 직원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