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 | 강재(剛齋) 또는 공염(公琰) |
본관 | 여흥 민씨[1] |
출생 | 1911년 8월 20일 |
경기도 경성부 동부 연화방 신기동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의동) | |
사망 | 1976년 1월 19일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성동 자택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424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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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민영구는 그의 형, 민영숙은 여동생이다.
2. 생애
민영완은 1911년 8월 20일 경기도 경성부 동부 연화방 신기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의동)에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민제호와 어머니 평산 신씨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뒤 부친 민제호, 형 민영구와 함께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고, 1929년 7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하에 청소년의 독립정신 계몽 등을 목적으로 조직된 화랑사(花郞社)의 총무 겸 재무간사로 선출되어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일에 주력했다. 1930년 9월 항저우에 있는 중앙항공학교(中央航空學校)에 입학하여 항공술 및 조종술을 익히고, 1933년 7월 졸업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그는 중앙항공학교 비행과 보험산실(保險傘室)에서 복무했다.
이후 1934년 2월부터 1942년 5월까지 중화민국 공군의 항주(杭州) 제1총참(第1總站) 지하 공작원(工作員)으로서 항일독립투쟁을 지속했으며, 1942년 5월부터 1944년 4월까지 운남성(雲南省) 곤명(昆明) 소재 중국 중앙공군군관학교(中央空軍軍官學校)에서 보험산실장(保險傘室長)을 역임했다. 이후 광복군에 입대하여 총사령부에 복무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여 1945년 11월 23일 김구 주석 등과 함께 귀국했다.
귀국 후 이시영 부통령의 비서관을 역임했으며, 1976년 1월 19일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성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민영완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의 유해는 본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에 있는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가, 1992년 12월 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
[1] 삼방파 28세 영(泳)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