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천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관준
성명 | 박관준(朴寬俊) |
생몰 | 1874년 4월 13일 ~ 1945년 3월 16일 |
출생지 | 평안남도 개천군 개천읍 군우리 |
사망지 | 평안남도 개천군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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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준은 1874년 4월 13일 평안남도 개천군 개천읍 군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개천교회 장로였는데, 1935년경 일제가 기독교 신도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에 항의하고자 1937년까지 평안남도지사와 조선총독부를 10회 방문해 항의했다. 1938년에는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를 방문해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경고했으며, 5회에 걸쳐 종교의 자유를 허용해달라는 내용의 건의문을 발송했다.
또한 1938년 3월 24일 제74회 일본제국의회를 방청하던 중 국교를 기독교로 바꾸고 신사참배를 폐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국교개종헌의서(國敎改宗獻議書)>를 회의장에 살포했다가 도쿄 경시청에 체포되어 1개월간 심문을 받고 국내로 호송되어 평양 형무소에서 수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었다. 1941년에도 신사참배 반대, 궁성요배 반대, 국교 개종 등을 주장하다가 일제 경찰에 다시 체포되었고, 온갖 고문을 받다가 예심 중에 병이 사경(死境)에 이르자 1945년 3월 13일에 병보석되었지만 자택에서 사흘 만에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박관준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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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화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관준
성명 | 박관준(朴觀濬) |
본관 | 강진 박씨 |
생몰 | 1873년 ~ 미상 |
출생지 | 평안남도 중화군 하도면 대정리[1] |
사망지 | 미상 |
추서 | 대통령표창 |
박관준은 1873년경 평안남도 중화군 하도면 대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3일 중화군에서 열린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19년 6월 1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이 항의했다.
만국평화회의에서 식민지를 해방하였으니 평등의 권리를 위해 조선 민족인 자로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어느 나라의 민족이 만세를 부를 것인가. 나는 죄가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1919년 7월 24일 고등법원은 박관준의 상고를 묵살했고, 그는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그의 생애가 어땠으며 언제, 어디서 사망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박관준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