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출생 | 1892년 6월 5일 |
경기도 개성유수부 (現 개성시)[1] | |
사망 | 1926년 10월 24일 |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現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 |
본관 | 연주 현씨 |
자녀 | 아들 현승종 |
서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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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2년 6월 5일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경상도 풍기군 서부면 금계동(현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라는 설과 경기도 개성유수부(현 개성시)라는 설이 제기되는데, 1996년 7월 31일 중앙일보 기사에 의하면,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는 조선 후기 유행한 도참서《정감록》의 60여 종 이본을 통틀어 '제1승지(勝地)'로 꼽혔고,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살기(殺氣)가 없어 사람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손꼽혀 구한말로부터 일제강점기, 8.15 광복 직후 이북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실제로 1959년 조사연구에는, 풍기로 이주해온 사람들 중 8%가 이주의 동기를 '정감록'의 영향으로 꼽았고, 풍기읍 금계리 주민들 중 이주해온 사람들은 대개 평안도·황해도 사람으로, 많은 가구가 인삼을 재배한다고 했다.# 이로 보아, 강택진은 경기도 개성유수부 출신으로 구한 말에 풍기군 서부면 금계동으로 이주해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한 후 1911년 만주로 망명하였고, 1919년 3월 지린성에서 결성된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 재무부원으로 독립운동 자금모집에 힘을 쏟았다. 그해 6~7월경 조선에 귀국한 그는 10월 서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연통제 기관으로 조선 13도총간부를 조직하고 교섭부장을 맡았다. 그는 경북 일대를 무대로 독립운동자금 수백원을 모집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부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20년 말 연통제 조직이 파괴되는 상황에서 체포되어 1921년 6월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농민의 삶에 관심을 가진 그는 1923년 1월 풍기소작인조합(豊基小作人組合)과 동년 9월 전조선노농대회준비위원회(全朝鮮勞農大會準備委員會)의 발기에 참여했다. 또한 공산주의에 감화되어 고려공산청년동맹(高麗共産靑年同盟)에 참여하여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4월에는 동아일보에 "지주권을 포기하고 소작인 제군에게 고백하노라"라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하고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전재산인 19,000평의 토지를 풍기소작인조합에 기부했다.# 이후 서울로 상경해 사회 활동에 매진하면서 조그만한 가게를 열어 생계를 유지했다.
1923년 10월 조선노농대회준비회(朝鮮勞農大會準備會)를 결성한 그는 공산주의 활동을 수행하다가 또다시 체포되어 몇달간 고초를 겪어야 했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결성되자 중앙위원·상무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농민운동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 고려공산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검사부 책임을 맡았으며, 12월에 사회주의자 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1925년 4월 '경북사회운동 자간친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926년 봄 병보석으로 출옥했다. 7월 풍기로 귀향하여 요양하다가 그해 10월 2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강택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2019년에 특별시로 승격됐으나 개성특별시로 부르지 않고 그냥 개성시가 옳은 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