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88년 6월 6일 |
경상도 성주목 명암방 해평동 (현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1] 중동마을) | |
사망 | 1919년 6월 5일[2] (향년 30세) |
경상북도 성주군 | |
자 / 호 | 주여(周汝) / 둔암(遯巖) |
본관 | 성주 도씨 |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운정리 은행정마을 청룡산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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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88년 6월 6일 경상도 성주목 명암방 해평동(현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중동마을)에서 아버지 이계(伊溪) 도원상(都元相, 1852. 6. 12. ~ 1933. 5. 9.)[3]과 어머니 광산 이씨(1857. 2. 27. ~ 1936. 1. 13.)[4]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1919년 4월 2일 이기정(李基定) 등이 성주면 읍내 장날을 이용하여 3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전개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을 때, 그는 이 시위에 참가했다가 집에 돌아왔다. 그러던 중 같은 마을 사람인 여우룡(呂又龍)과 여왕연(呂旺淵)으로부터 일제 헌병대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분개한 도무환은 여홍연, 여호진(呂鎬鎭), 여문회(呂文會), 여우룡, 여왕연 등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성주면 독립만세시위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재규합하여 해평동에서 다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4월 2일 오후 11시, 그는 3백여 명의 시위 군중을 인솔하여 해평동 월회당 앞 도로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마을 내를 행진했다. 이때 벽진주재소에서 출동한 일본 경찰이 제지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조선인들이 이 같은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냐! 이것을 제지하려는 너희들의 행동은 참으로 부당한 것이다.
그는 시위 운동을 밤늦께까지 감행한 후 여홍연, 여우룡, 여왕연, 여문회, 여호진과 함께 일본 헌병들에게 체포되었다. 그 후 그는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태형 90대를 선고받고, 형벌을 당하는 동안 단식으로 항쟁하다가 병이 악화되어 형 집행유예를 받고 6월 4일 출옥했다.
그러나 자택에서 태형의 후유증으로 이튿날인 6월 5일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도무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