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 노병학(魯炳學) |
자 / 호 | 명중(明仲) / 호정(壺亭) |
본관 | 함평 노씨[1] |
출생 | 1849년[2] 9월 22일 |
전라도 흥덕현 이동면 신월리 (현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대흥리 신월마을)[3] | |
사망 | 1918년 3월 28일 |
전라북도 고창군 | |
묘소 |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대흥리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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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노진룡은 그의 장손자이다.
2. 생애
노병희는 1849년 9월 22일 전라도 흥덕현 이동면 신월리(현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대흥리 신월마을)에서 아버지 노주상(魯周相, 1831. 11. 3 ~ 1876. 6. 6)[4]과 어머니 남평 문씨(1828. 3. 26 ~ 1918. 5. 10) 문사흠(文思欽)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888년부터 1893년까지 최익현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의술에 능해서 1902년 7월 혜민원 주사(惠民院主事)에 임용되기도 했으나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사직했다. 그러다가 1903년 영친왕을 진료한 뒤 품계가 6품에서 3품으로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의관(醫官)으로 재직 중이던 1904년 10월 순헌황귀비의 병세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는 이유로 법부(法部)로 압송되었다. 승정원일기에 이후 노병희가 어떻게 처벌받았는지에 대한 후속 기사는 나타나지 않으나, 파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귀향한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그는 최익현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군자금에 충당시킬 목적으로 현금을 준비해뒀다.
1906년 4월 최익현이 의진의 거점을 전라남도 태인군으로 확정하고 남하하자, 그는 미리 태인군 산내이변면 종성리(현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에 당도했다가 최학엽(崔學燁)·고석진·고제만(高濟萬) 등과 더불어 면암 일행을 맞이했다. 그러나 최익현은 순창군에서 관군과 대치한 후 "동족끼리 싸울 수는 없다"며 의병을 해산했고, 최익현과 임병찬 등은 일본군에게 체포된 뒤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노병희는 의병이 해산되자 고향에 돌아갔다가, 그해 12월 최익현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한의(漢醫)의 자격으로 대마도로 가서 치료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최익현이 끝내 별세하자 그의 유해를 본국으로 반장했다.
이후 고향에 돌아와 은거했고 1918년 3월 28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노병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