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1:14:30

장익부

성명 장익부(張益富)
생몰 1891년 9월 9일 ~ 1938년 8월 4일
출생지 평안북도 철산군 백량면 장평리
사망지 만주 반석현 길림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익부는 1891년 9월 9일 평안북도 철산군 백량면 장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5월 정원범·정치민과 함께 비밀결사 숭의단(崇義團)을 조직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폈다. 숭의단은 국내로 잠입하는 독립운동자의 신변을 보호하고 군자금 모집에 힘을 쏟는 한편 만주의 독립군이 국내로 진공할 때 이에 호응하여 국내의 각 관공서를 습격하고 관공리를 처단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는 이 숭의단의 부단장을 맡고 단원의 확보에 힘쓰는 한편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주력했다.

1920년 11월 8일, 장익부는 네 명의 동지와 함께 철산군에 거주하는 유상겸의 집에 침입하여 군자금 100원을 모금받았다. 또한 선천군의 부호인 옥문진(玉文珍)으로부터 현금 6백원과 이후 4백원의 군자금을 희사하겠다는 증서를 받았고, 옥보찬(玉寶贊)에게서 현금 50원과 백원의 어음 제공을 약속받았다. 이렇게 확보한 군자금은 상하이에 소재한 독립단중앙총부(獨立團中央總部)로 송금했다. 한편 그는 광복군(光復軍)의 간부로 있으면서 이동일(李東日)·정병호(鄭炳浩)등과 함께 독립사상을 선전하고 항일유인물을 배포하기도 했다. 이들은 김상여(金尙汝)·이학필(李學弼)·이동근(李東根) 등을 광복군에 가입시킨 후 독립신문(獨立新聞)의 배포와 군자금 모집에 힘을 쏟았다. 1921년 12월엔 평남 평원군에 거주하는 이지돈(李枝敦)에게 군자금 5천원의 희사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은 그는 결국 서봉근(徐奉根)·김덕상(金德湘) 등의 동지와 함께 체포되었고,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6년 11월 6일에 출옥했다. 출옥 후 만주로 건너가 반석현 길림에 거주하며 독립운동에 관여하다 1938년 8월 4일에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장익부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