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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0년 8월 17일 |
함경북도 부령군 부거현 사구리 | |
사망 | 1945년 8월 17일 (향년 45세) |
중국 지린성 용정촌 |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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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박노영은 1900년 8월 17일 함경북도 부령군 부거현 사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로 상경해 경성고등보통학교(京城高等普通學校)에 재학하다가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강기덕, 박쾌인, 김백평(金栢坪) 등과 함께 동교생들을 규합해 서울 시내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독립선언서 200매를 인사동, 낙원동, 관훈동 일대 군중에게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했다.또한 3월 6일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서울에서의 2차 만세시위에 참가해 한위건(韓偉健)이 쓴 선언문 800여매를 등사하여 서울 시내에 배포하고 3월 8일에서 10일까지 ‘동포여 일어나라’는 격문을 인쇄하여 배포했다. 그러다가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공소했지만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고향으로 돌아간 박노영은 1931년 3월 2일 함북도민 항일결사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경찰에게 또다시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중국 지린성 용정촌으로 망명해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 교사로 근무하다가 일제 경찰들이 그를 체포하려 하자 피신한 후 신분을 숨긴 채 은거했다. 그러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지만 불과 이틀 뒤인 1945년 8월 17일에 사망했다. 덧붙여 그의 생일이기도 했다. 그나마 생전에 광복을 보고 간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박노영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