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39:33

문남규

1. 서귀포시 출신 독립운동가, 문남규2. 삭주군 출신 독립운동가, 문남규

1. 서귀포시 출신 독립운동가, 문남규

성명 문남규(文南奎)
생몰 1870년 6월 23일 ~ 1932년 2월 28일
출생지 전라도 대정현 동좌면 석송리
(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1]
사망지 제주도 남제주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문남규는 1870년 6월 23일 전라도 대정현 동좌면 석송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우 문남은과 함께 평소 법정사(法井寺)에서 승려 김연일(金連日) 등과 교류했고, 김연일로부터 민족의식을 주입받았다. 김연일은 일제의 무단통치로 조선 민중이 고통받는 것에 분노해 독립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1918년 봄에 동료 승려 강창규(姜昌奎), 방동화(房東華)와 함께 항일 비밀결사를 결성한 후 신도들을 널리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했다. 문남규 역시 여기에 가담했고, 1918년 10월 무렵엔 그 숫자가 3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1918년 10월 5일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옹위하고 도대장(都大將) 이하 군직(軍職) 체제로 조직을 편성한 뒤, 제주도 내의 일본인 관리를 처단하고 일본인을 제주도에서 내쫓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행동에 앞서 각 면의 이장에게 격문을 배포해 동참할 것을 권유해 400명의 군중을 확보했다. 이후 문남규 등은 일본 경찰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을 절단하여 각 주재소를 고립시킨 뒤 중문 주재소를 습격했으며, 주재소에 감금되었던 13명의 구금자들을 석방하고 일본인 상인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사태의 심각성을 조기에 눈치채고 투입했고, 결국 이틀 만에 문남규를 비롯한 모든 동지들이 체포되었다. 문남규는 이 일로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치청에서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32년 2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문남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삭주군 출신 독립운동가, 문남규

성명 문남규(文南奎)
생몰 1890년 ~ 1920년 6월 19일
출생지 평안북도 삭주군
사망지 평안북도 삭주군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문남규는 1890년경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태어나 일찍이 만주로 이주했고, 1920년경 복벽주의를 추구하는 무장독립단체인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대원으로 배속되었다. 그는 1920년 6월 19일 고향으로 잠입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문남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정홍원 총리가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 뒤 총리후보로 지명된 문창극은 2014년 6월 23일 자신의 조부가 독립운동가 문남규였다고 밝혔다. 국가보훈처는 문남규의 문의를 받고 조사한 결과 "독립유공자 문남규와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 문남규가 동일인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보훈처는 “1921년 독립신문에 보도된 독립유공자의 성명과 후보자 조부의 한자까지 동일하며 독립유공자 문남규의 전사·순국 지역과 문 후보자의 조부 문남규의 원적지가 평북 삭주로 동일하다”고 밝혔다. 또 문 후보자의 부친인 문기석씨가 생전 “내가 일곱 살이었던 1921년 독립운동을 하셨던 아버지가 숨졌다”고 진술했는데, 보훈처는 독립신문에 나온 문 선생의 순국연도와 문기석씨의 증언이 일치한다는 점도 동일인으로 보는 이유로 꼽았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국가보훈처의 발표에 의문을 제기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유은호 책임연구원은 “현재 발굴된 사료로는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를 알 수 없다"며 "다만 대한독립단 주00 휘하 소대 대원으로 1920년(민국2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고 이 같은 내용이 1921년 4월9일자 <독립신문>에 실려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국가보훈처 발표와 달리 <독립신문> 기사의 문맥을 볼 때 선생은 1921년이 아니라 1920년에 전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독립신문>의 기사는 당시 여건상 사건 발생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실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지적했다.#

당시 문창극 후보자는 2011년 온누리교회 양재캠퍼스 수요여성예배에서 "일본의 식민지배와 남북 분단은 하나님의 뜻", 조선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된 것은 이씨조선 시대부터 게을렀기 때문", "이를 고치기 위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하나님이 받게 한 것"이라고 발언한 사실이 2014년 6월 11일 KBS 보도로 밝혀지면서 심각한 논란에 휩싸여 있었다. 여기에 친일파 윤치호를 옹호하기도 했고,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으로부터 위안부 문제를 사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던 사실도 드러나면서 총리 후보 사퇴 압박에 직면해 있었다. 이 때문에 세간에서는 그가 자신의 조부가 독립운동가 문남규라고 주장한 것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난을 무마시키려는 의도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일었다.

결국 문창극은 2014년 6월 24일 오전 10시 서울 정부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총리지명 14일 만에 사퇴 의사를 밝혔다.#


[1]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후에야 마을 이름이 도순동(道順洞)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