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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11:10:23

김수환/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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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2월 6일자 KBS2 <11시에 만납시다> 인터뷰 영상.
1. 유년 및 학창 시절2. 학도병 징병과 광복, 그리고 주교 수품 전까지의 신부 시절3. 대주교 승품과 추기경 서임4.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5. 민주화 후6. 사망과 그 후

1. 유년 및 학창 시절

1922년 7월 2일 경상북도 대구부(現 대구광역시)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경상북도 군위군(現 대구광역시 군위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5남 3녀 중 막내로, 7살 때 아버지 김영석 요셉(1868-1929)을 여의고 홀어머니 서중하 마르티나(1880-1956) 슬하에서 자랐다. 서중하 마르티나는 사제의 길을 걷게 된 두 아들 동한과 수환을 위해 정말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도 물심양면 뒷바라지를 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신학교 방학 중에 아들들이 찾아오면 이웃집에 간곡히 부탁해 흰 쌀밥과 고기반찬을 준비해 주던 터라, 두 형제가 너무 죄송스러워 식사를 제대로 못 했다고 한다. 조부 김보현 요한은 가톨릭 신자로 1866년 병인박해 때 관군에게 잡혀 순교했다. 어머니의 강요(?)로 자신의 형 김동한(金東漢) 가롤로 신부와 함께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한다.

김수환 추기경의 본래 이름은 '김수한'이였는데, 신학교에 입학할 즈음에 관청에서 관련서류를 떼던 중에 이름이 '김수환'으로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출생신고 당시 담당직원의 기재 실수인 듯한데, "'김수환'이란 이름도 괜찮다"는 어머니의 말씀과 당시 천주교인들은 서로를 이름이 아닌 세례명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굳이 고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지금이야 세례를 받은 신자도 젊은 신자들 사이에서는 대부분 이름으로 부르지만 중/노년층의 신자들은 여전히 세례명으로 부르는 경향이 크며, 그 당시에는 세례를 받았다는 것에 의미를 지금보다 훨씬 크게 부여했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면 세례명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동성상업학교(現 동성중학교 & 동성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동성상업학교는 갑조와 을조로 나뉘어 있었는데, 갑조는 일반학급이고 을조는 사제가 되려는 소신학교였다. 소신학생 김수환은 사제의 길을 가는 데 고민이 많았지만, 당시 을조를 지도하던 프랑스인 앙투안 공베르 신부가 "신부는 자신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되기 싫다고 해서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며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동성상업학교 재학 시절, "천황 폐하의 생신을 맞이하여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윤리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그러므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써서 제출했다. 이를 본 당시 교장이던 장면은 김수환을 불러 일본인 장학사 앞에서 노발대발 하며 따귀를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아직 나이어린 학생 김수환이 경찰에게 해코지라도 당할 지 몰라서 일부러 "교장이 직접 애를 이렇게 훈육했으니 넘어가 달라"는 액션을 취한 것이다. 즉 장면이 적절하게 쇼맨십을 발휘하여 김수환의 목숨을 구해준 셈이다.[1] 사실 장면은 평소 성품이 인자하여 주변 사람에게 한번도 화를 내거나 큰 소리를 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 후 장면은 김수환이 일본 조치대학으로 유학을 갈 때, 추천서를 써주는 등 적극적으로 그를 지원해 주었다. 또한 장면의 셋째 아들 장익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로 있다가 김수환 주교가 마산교구장에서 서울대교구장으로 이임해왔을 때 교구장 비서로 함께 일했다. 이처럼 김수환 추기경과 장면의 인연은 장익 주교를 통해 2대에 걸쳐 이어진 셈이었다.

김수환 추기경도 훗날 "장면 선생님이 해주시는 영어 강의 때 미국의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흥미롭게 들었고, 여러 가지로 나를 도와주신 분이라 존경한다"고 언급했다. 비록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김 추기경은 "장면 총리의 시복시성을 희망한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로 존경심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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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품을 받고 어머니 서중하 마르티나와 찍은 기념사진

조치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수학하던 시절,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와중에도 자신을 차별하지 않은 독일인 테오도어 게페르트 신부(1904~2002)에게 감명받아 사제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당시 김수환의 은사였던 독일인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는 광복 후 한국에 건너가 서강대학교의 창립을 주도하여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김 추기경은 2002년 게페르트 신부의 장례 미사를 주례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게페르트 신부님은 사제로서 훌륭했을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자상한 분이었으며, 특히 한국 유학생들에게 늘 자애롭게 대해주었다"고 회고했다.

2. 학도병 징병과 광복, 그리고 주교 수품 전까지의 신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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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오른쪽에 군복을 입은 사람, 왼쪽에 있는 사람은 훗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전석재 이냐시오 신부(1988년 사망).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학병으로 강제 징집된 일본 육군 일등병으로 치치시마에서 복무했으며, 일본군의 대표적 전쟁범죄중 하나인 치치시마 사건에 미군 조종사 살해를 목격한 조선인 징용 노무자들과 함께 1946년 5~8월에 괌에서 열린 전범 재판의 증인으로 참석하였다.

1951년 9월 15일 사제품을 받고, 안동 성당(현재의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 주임 신부를 시작으로 대구대목구장 최덕홍 사도 요한 주교 비서, 김천 성당(현재의 대구대교구 김천황금 성당) 주임신부, 성의중학교 및 성의고등학교 교장 등 주로 대구대목구에서 사목했다. 이 당시의 대구대목구는 한국 전쟁의 여파로 교구 사정이 매우 열악했고 대부분의 신자들이 찢어지게 가난한 극빈층이라 사목활동이 보통 힘든게 아니었으며, 김수환 신부는 맨땅에 헤딩하는 자세로 임하며 최선을 다해 많은 신자들에게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1956년 유럽의 선진 가톨릭 교리 및 학문을 배워와 한국 가톨릭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생각에 당시 대구대목구장 서정길 주교의 허락을 받아 독일 뮌스터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열심히 공부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까지 준비했지만 당시 독일에 일하러 온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서 이래저래 활동하면서 공부 시간이 부족했던데다 담당 교수신부였던 요제프 회프너가 독일 뮌스터교구 주교로 성성되어 떠나게 되는 등의 일이 겹치면서 결국 1964년에 박사 학위 취득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정확히는 요제프 신부가 떠나고 다른 지도교수가 1년이 넘도록 배정되지 않은 데다 만약 지도교수가 교체되면 논문을 처음부터 다시 작성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포기했다. 그 회프너 주교는 훗날 독일 쾰른대교구 대주교로 승품되고, 1969년엔 제자 김수환과 함께 추기경에 서임되었다.[2]

1964년 6월에 서정길 대주교의 지명을 받아 가톨릭신문의 전신인 '가톨릭시보사'의 사장으로 취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관해 일반 신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고 해설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66년 6월 15일, 사제 수품 15년차에 교황 바오로 6세천주교 마산교구를 신설하고 초대 교구장으로 김수환 신부를 임명한다. 이에 따라 김수환 신부는 주교로 성성되었다.

1967년에 바티칸에서 열린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 대한민국 대표 주교로 참석한다. 본래는 윤공희 주교가 참석해야 하는데, 노기남 대주교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서울대교구와 본래 맡고 있던 수원교구 업무를 다 보느라 도저히 시간을 쪼갤 형편이 안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가장 젊은축에 속한 김수환 주교가 대리로 참석한 것이다. 이 회의에서 가톨릭 신자와 비신자간 결혼인 혼종혼(混宗婚)에 대한 의제가 나오자 김수환 주교가 발언권을 얻어 이를 현대시대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며 논리정연하게 설명해 큰 주목을 받았다. 대의원 회의에서 나오는 안건과 관련 내용에 대해 문서화 하는 작업이 그에게 주어질 만큼 그가 교황청 중요 인사들로부터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김수환 주교에 의해 개정된 가톨릭 혼인성사 관련 교회법이 현재까지 전세계적으로 유지되고 있으니, 현대 가톨릭 교회사에서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3]

3. 대주교 승품과 추기경 서임

대한뉴스 제 728호-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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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추기경 서임식에서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비레타를 받는 김수환 추기경
서울대교구장 착좌 미사에서
순명서약을 받는 김수환 추기경

1968년 4월, 마산교구장에 임명된 지 2년차에 교황 바오로 6세가 김수환 주교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에 임명하며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이 일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어서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들이 나에 대한 순명을 거부하면 어떡할까'라고 고민하였지만, 착좌식 미사에 원로 신부를 필두로 한 서울대교구 사제단 전원이 아무런 이의없이 순명서약을 하는 것을 보자 그런 우려를 걷어내었다.

이러한 항의가 사치스러운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서울대교구의 재정형편은 매우 안 좋아서, 교구청으로 고리대금업자들이 나타나 돈을 갚으라고 을러대는 일이 다반사였다. 성모병원가톨릭대학교/성의교정을 다른 학교에 매각하니 마니 하는 말까지 떠돌았다.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일대기를 담은 책 <추기경 정진석>에서는, "매일같이 빚쟁이가 몰려와 수없이 구타당하고 발길질 받았다."라고 했다. 1967년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가 이 문제로 은퇴한다. 그 후 1년간 서울대교구장 자리가 공석일때 서울대교구장 서리로 봉직한 천주교 수원교구 윤공희 빅토리노 주교가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서울대교구의 재정형편을 개선시켰다. 서울대교구청의 교구장 집무실에서 잡일을 도맡아 했던 수녀의 말에 따르면, 휴지통을 비울 때마다 코피를 틀어막은 휴지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은 윤공희 주교의 노고에 대해 두고두고 고맙게 생각하였다. 김수환 대주교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할 즈음 재정문제가 말끔히 해결될 수 있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969년 3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됨으로써 한국 최초이자 47세의 나이로 추기경이 되었다. 김수환 대주교의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났다는 점을 바티칸에서 인정했을 뿐더러 서울대교구장이 천주교 평양교구를 함께 관장하고 있다는 특수성이 더해져 서임되었다는 평이 많다. 외국에서는 지방 교구장이 추기경으로 임명되기도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침묵의 교회가 북한에 있기 때문에 서울대교구장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 이 때문에 서울대교구장이 추기경으로 임명되는 관례가 자리잡았다. 그리고 경기도 부천시에 위치한 소명여자고등학교의 이사장으로도 활동하였다. 훗날 추기경은 "보잘것 없던 나를 주교에서 대주교로, 다시 추기경으로 임명한 바오로 6세가 죽었을 때 크게 슬퍼했다."라고 회고록에서 술회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임명된 추기경 중에서는 서임 당시 나이가 가장 젊은 추기경이다. 현재 프란치스코 시기까지 서임 당시 나이 기준 김수환 추기경보다 어린 추기경은 없다.

4.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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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미사를 집전하는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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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10 항쟁 당시 명동성당을 빠져나오는 모습
김수환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70~80년대 격동기를 헤쳐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갖고 한 일은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 주려고 했을 따름이다."고 회고했다. 1995년 서울대 강연에서는 보수적 성향의 천주교회가 정치에 참여하게 된 이유에 대해 "70년대의 언론탄압, 전태일 군의 분신자살과 유신 선포 긴급조치 발동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인권유린 앞에서 교회도 그냥 방관자로만 있을 수는 없었다"고 밝혔다.

1970년 12월 23일에 김 추기경은 불교의 청담스님과 개신교의 한경직 목사, 그리고 조덕송 조선일보 논설위원 등과 함께 어수선한 시국을 논의했다. 이 당시에는 종교를 초월해서 군사정권에 대한 심각성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다고 보인다. 일부 박정희 시대 옹호자들은 "저 세 사람이서 이야기한 것 가지고 뭘 그러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청담스님은 당시 조계종 종정이었고,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천주교의 대표자였다. 한경직 목사 역시도 당시 한국의 개신교 목사들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이었으니, 이 세 사람이 거의 각 종교를 대표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군사정권 시절에 광주대교구윤공희 대주교, 원주교구지학순 주교, 인천교구윌리엄 존 맥나흐톤 굴리엘모(나길모) 주교, 안동교구두봉 주교, 전주교구김재덕 주교와 함께 사회참여파 주교로 활동하였다.

또한 다른 성직자보다 높은 권위가 있는 추기경으로서 많은 방면의 민주화 운동에 기여하였다. 1971년 12월 25일 밤 KBS로 중계된 예수 성탄 대축일 자정 미사 강론 중 김 추기경은 작심한 듯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 만일 현재의 사회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독재 아니면 폭력 혁명이라는 양자택일의 기막힌 운명에 직면할지도 모른다"며 박정희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 발언을 TV로 보고 있던 박정희는 매우 격노했지만, 추기경은 바티칸 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못 건드렸다가는 국제법상으로 큰 문제가 될 수 있을 뿐더러 공교롭게도 이날 아침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이 터지면서 김 추기경에 대한 처벌은 흐지부지 되었다. 대신 미사 실황을 중계한 KBS의 아나운서와 PD, 제작진은 모조리 남산으로 끌려가 "왜 추기경의 발언을 그대로 중계했느냐?" 라며 호되게 추궁당하고 매까지 맞아야 했다. 그나마 KBS는 이건 위험하다 싶어서 바로 미사 중계를 끊었는데도 말이다.

김 추기경은 박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박정희의 정교분리 주장에 대해 "교회는 단지 개개인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 뿐 아니라 한 사회의 윤리와 도덕의 파수꾼 역할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 추기경은 또 "종교계가 노동 문제에 개입한다"고 박 대통령이 불만을 표시하자 "사용주는 개개 노동자에 비해 원래부터 엄청난 강자인 데다 중앙정보부, 경찰 심지어 노동청까지 기업주 편이고, 노동자 편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박 대통령을 설득했다.

1970 ~ 80년대 수많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중심에는 명동성당이 있었다. 명동성당은 종교시설이라는 특성상 경찰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고, 따라서 이곳은 개신교의 향린교회나 불교의 조계사처럼 강압적인 정권에 맞서는 운동가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의 소도와 같은 역할을 하는 피신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항상 명동성당의 중심을 지키고 있었다.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들어선 군부독재와 5공화국 체제에서도 김수환 추기경은 독재를 비판하는 날선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아래 어록에도 나오는 '카인의 대답'이 대표적. 결국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된 6월 항쟁은 전두환 정권이 몰락하는 가장 큰 계기가 된다. 당시 명동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려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 일갈한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다만 말이 일갈이고, 이때 김 추기경의 말투는 들어올 테면 들어와 봐라 같은 위협조가 아니라 '매주 주일에는 성당에서 주일미사가 있습니다' 같은 평범하고 당연한 사실을 알려주는 듯한 매우 일상적인 투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에게 편지와 함께 "긴급구호를 위해 쓰라"며 당시 거액이었던 1,000만원 수표를 보내고, 전두환을 직접 찾아가 "그만해 달라"고 부탁하는 등 사태를 막아 보려고 애를 쓰기도 했으나, 전두환이 귓등으로도 듣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나중에 김수환 추기경은 "가장 가슴아팠던 일은 광주의 5월"이라 회고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을 찾아가 병력을 투입해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전두환은 "미안하지만 지금 도저히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국방부에 가 봐야겠습니다"고 말하며 자리를 떴고 김 추기경은 글라이스틴 미국 대사를 만나 "유혈 사태를 피해야 한다.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병력 투입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전해 달라."고 말했다. 글라이스틴 면담 후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김 추기경을 찾아와 "광주에 병력을 투입한다고 한 것은 경고일 뿐이고 사실은 투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김 추기경은 "이 장군을 믿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5월 27일 병력이 광주에 투입되어 유혈 진압이 있었다. 김 추기경은 1995년 서울대 강연에서 "5.18 기간이 가장 괴로웠던 때"라며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으려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후회했다. 회고록에서는 "나도 사태 전면에 나서고 싶었다. 아니, 광주로 내려가 몸으로라도 계엄군을 막고 싶었다. 혼자서라도 강경한 항의성명을 내려고 쓰고 찢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신문방송에서 보도해 주지 않으면 유인물을 찍어서라도 항의하려고 했다. 그러나 만일 젊은층 요구대로 내가 자극적 표현을 써가면서 신군부를 연일 비판했더라면 유혈사태는 서울까지 번졌을지도 모른다."고 회고했다.

김 추기경은 광주 유혈진압 후 정부의 사과와 책임자 엄단을 요구하는 담화문을 냈고, 5.18 구속자 가족들이 사형 집행을 막기 위해 명동성당을 점거하자 환대하며 추기경 집무실을 내줬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시 광주 방문을 적극 추진하여 교황이 직접 금남로와 전라남도청 등을 방문하게 된 사실이 밝혀졌다.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때도 당국 관련자들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파렴치'하다고 강하게 비판하는 등, 당시 정부에 대한 공개적인 일갈을 서슴지 않았다.

한편 여러 민주화 사건에 많은 신경을 쓰고 서울대교구를 총괄하는 업무가 너무 중하다 보니 이 즈음엔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젊은 후배 사제에게 교구장을 넘기는 게 교구 발전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도 있던 터라 한국식 나이로 71세가 된 1992년 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서울대교구장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보낸 답장이 걸작이다. "나는 김 추기경보다 2살이나 많은데 지금도 교황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 후에도 계속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다가 임기를 약간 넘긴 1998년에야 정진석 니콜라오 대주교에게 서울대교구장 자리를 넘길 수 있었다.

5. 민주화 후

5.1. 김영삼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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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창립 법회에서 법정스님과 함께

우여곡절을 거쳐 문민정부가 탄생하고 인권과 민주화에 관한 김수환의 역할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95년 한국통신 파업 사태에서 김수환은 다시 인권의 현장에 선다.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많은 사람의 시련과 희생을 바탕으로 탄생한 현 정부가 그 모태라고 할 도덕적 힘을 물리적 힘으로 유린하고 대화보다 힘의 논리를 선택한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일갈하였다. 한편 95년 12월 관훈토론에서는 국민들을 향해 '우리 모두의 추악한 얼굴'을 지적하며 엄하게 꾸짖는다. 요지는 한국인의 가치관 부재와 망국병이 부정부패로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천주교 신자인 이회창 당시 총리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95년 11월 이 총리의 회갑연에서 참석해 이회창 전 총리를 '청렴과 결백으로 모든 이의 사표가 되는 사람이며, 우리 민족 모두에게 보물과 같은 사람'이라고 한 바 있으며 그 당시 이미 전 총리였다. 1993년 12월 ~ 1994년 4월 총리 재임. 1996년 1월에는 총리 사임 후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던 중 김영삼 대통령의 권유를 받고 정치계 입문을 고민하던 이 전 총리에게 "나라가 어렵고 역사 바로세우기가 중요한 만큼 힘을 합치는 것이 좋겠다"며 "하나의 밀알이 되는 심정으로 일하는 것이 어떻냐"는 말로 이회창의 정치입문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이회창 역시 김대중과 마찬가지로 장면을 통해 가톨릭에 입교했다. 이회창의 부친이 자유당으로부터 탄압받을 뻔 한 걸 장면이 구해준 계기로 온 가족이 세례를 받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김수환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며, 2002년 11월 이회창의 아버지 이홍규가 죽었을 때는 김수환이 직접 장례 미사를 집전해주기도 하였다.

1997년 1월에는 노동법, 안기부법 통과로 노동계 총파업이 일어나자 김영삼 대통령을 단독으로 만나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도 한다. 그 후에도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발언을 많이 했다. 1997년 10월 길상사 창립 법회에 법정스님과의 인연으로 직접 참석해 축사를 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한 보답으로 법정도 1998년 2월 명동성당에서 강연을 했다.

5.2. 김대중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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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6월 22일, 서울대교구장 은퇴 미사 후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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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혜화동 성당에서 성탄 미사를 집전하는 김수환 추기경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김 추기경의 활동이 그나마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보수와 진보 양대 세력의 거두가 모두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1997년 12월 15대 대선이 끝난지 4개월 뒤, 봉두완 전 의원의 설득으로 1998년 2월 14일 이회창 후보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를 축하하러 당선자 축하 미사에 나왔다. 김 당선자는 놀라며 덕담을 아끼지 않았고, 김 추기경도 큰 찬사를 보냈다. 그도 그럴게, 내키지 않았던 이회창 후보가 설득 된 것이 김수환 추기경의 전화였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화합의 장면이 펼쳐졌다.[4]

한편으로는 대북화해 움직임에 발맞춰 남북화해를 위한 한반도 평화라는 주제로 많은 강연을 하였다. 그러던 1998년 6월 22일, 공식적으로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 직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위 문단에 서술된 것처럼 본래 1992년에 사임하려고 했으나 요한 바오로 2세의 권유로 6년 더 맡은 것이었고, 이미 나이가 80에 가까워지는 고령이었기에 더 이상의 직무 수행에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일주일 후 정진석 추기경이 새로운 서울대교구장으로 취임했다.

교구장 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왕성하게 사목활동을 했으며, 이 시기에는 김 추기경이 정치적 발언 같은 건 거의 하지 않고 온전히 사목활동만 했던 시기로 평가된다. 이 시기 PC통신과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혜화동 할아버지' 라는 닉네임으로 계정을 만들어 직접 글을 남기거나, 신자들의 편지에 답장을 해주었다. 김 추기경은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아서 처음에는 타자를 치는 것도 연습이 필요했다고 하는데, 나중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도움 없이도 글을 남길 수 있을 정도로 인터넷을 능숙하게 썼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들어 김 추기경의 건강이 조금씩 나빠지면서 온라인에서의 활동은 중단하게 된다.

5.3. 노무현 정부

파일:김수환 추기경 - 2005.10.21.jpg
2005년 10월 21일, 동아일보와 특별대담을 하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
파일:강재섭-김수환.jpg
2006년,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의 예방을 받으며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불안하고 과도하게 좌경화되었다고 판단했는지, 김수환 추기경은 보수 야권 진영으로 돌아서서 정부를 적극 비판했다. 문민정부 이후로 가장 많은 정치적 발언을 했던 시기가 바로 노무현 정부 시기였다. 선명한 반공보수 성향을 보이며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비판하지 않았던 햇볕정책도 강력히 비판했고, 참여정부에서 추진한 국가보안법 폐지, 수도 이전, 사학법 개정 등에 반대를 하며 당시 여당 지지자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노기남 등 천주교계 친일을 옹호하면서 "나도 창씨개명하고 신사참배했다"고 말해 일부 여당 지지자들에게 친일경력이 있니 없니 하는 비난과 구설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이래저래 참여정부와는 좋지 않은 관계가 되었다. 자세한 것은 후술된 어록 참조.

2004년 프란츠 쾨니히 추기경의 사망에 따라 가톨릭 전체 추기경 중 최선임자가 되었고, 2005년 치러진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즉위 미사를 최선임 추기경으로서 공동집전하고 전체 사제를 대표하여 신임 교황에게 순명을 서약하였다. 본래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과 동시에 바티칸으로 날아가 장례 절차에 참여하는 등 최선임 추기경의 직무를 수행해야 했으나, 건강상 이유로 그러지 못해 베네딕토 16세의 즉위 미사에서만 최선임 추기경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최선임 추기경으로서의 나머지 직무는 브라질 출신 에우게니우 살레스 추기경(Eugênio Sales, 1920-2012)이 대행했다. 베네딕토 16세는 김수환 추기경보다 추기경 선임날짜가 8년 2개월 늦다. 김 추기경이 독일에서 유학하던 시절 그의 지도교수이기도 했다. 35년 전 최연소 추기경에서 최선임 추기경이 된 것이다. 참고로 김 추기경은 2002년 80세가 되며 콘클라베 선출권을 상실했다.

2005년 터진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 당시엔 사태를 언급하며 가슴 아파하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사태를 황 교수 논문에 국한시켜 생각하지 말자. 우리 모두의 문제다. 우직하고 정직하게 살자. 그것이 바로 치유책이고 수습책."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 외엔 일반적인 사목활동을 했으나, 2000년대 중반 들어 건강이 악화되면서 예전만큼의 활동량은 보여주지 못했다.
파일:정진석 김수환 추기경.jpg
2006년 2월 22일, 정진석 추기경과 축하를 나누는 모습

2006년 2월 22일, 정진석 니콜라오 대주교가 한국의 2번째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김 추기경은 콘클라베 선출권을 상실한 2002년 로마 교황청에 새 추기경을 서임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2004년 추기경 서임까지 무산되자 개인적으로 크게 상심해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06년, 베네딕토 16세 서임 후 정진석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서임되자 매우 기뻐했다고.

6. 사망과 그 후

"서로 사랑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파일:김수환 추기경 - 86번째 생일.jpg
2008년 6월 11일, 혜화동 주교관에서

2008년부터는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사목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으며, 2008년 9월부터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는데 중간중간 호흡곤란으로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2008년 예수 성탄 대축일 미사는 주례하지 못했고 휠체어에 탄 채 병원에서 미사에 참여했다. 그러던 2009년 2월 16일 18시 12분 경,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서 노환과 병으로 사망한다. 사인은 폐렴에 의한 호흡부전. 사망 당시 최장기간 재임 추기경이었다. 향년 86세. "그동안 많이 사랑 받아서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 추기경은 2년 전부터 건강문제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왔으며, 지난해 9월부터는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면서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김 추기경은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으며, 이미 사후 각막 기증을 서약한 상태였다. 그래서 사망 직후 안구 적출 수술이 진행되었고, 김 추기경의 시신은 명동성당 유리관에 안치되었다.

장례는 당초 서울대교구장으로 치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비록 자신이 참석하지는 않지만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을 특사로 임명하여 교황장으로 격상해서 치렀다. 교황장이란 교황 또는 교황이 임명한 특사가 직접 장례 미사를 집전하는 장례를 말하며, 미사 주례자는 교황의 자격으로 미사를 집전한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으며, 사망 당일과 장례 미사 당일을 제외한 3일의 조문 기간 동안 약 40만 명의 시민들이 명동성당에 줄서서 조문하였다. 당시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명동성당까지 줄지어 선 조문객 행렬의 총 길이는 300m였다고 한다.[5] 이때 단 한 번도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전두환도 조문을 위하여 명동성당을 방문하였으나 뒷짐 조문으로 욕을 먹기도 했다.

시신은 경기도 용인시의 사제 묘역에 안치되었다. 위치는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의 옆. 묘비에는 김 추기경의 사목표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와 시편 23편 1절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가 묘비명으로 새겨졌다. 이는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직접 묘비명으로 부탁한 구절이다.

사망 때 각막을 기증해서 2명의 환자에게 각막을 이식했고, 그 영향으로 각막과 장기를 기증하겠다고 서약하는 사람들이 폭증했었다. 특히 사망 후 1주일 간은 각막 기증자가 너무 많아 장기기증운동본부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서점가에는 김 추기경과 관련한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김 추기경의 자서전을 포함해 이미 절판된 책들도 수많은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재판되었다. 이러한 열기는 사망 1주기가 지나도록 계속되었는데, 이 와중에 한 출판업자가 무단으로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이름을 빌려 김 추기경 관련 서적을 출판하였다가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김 추기경이 안장된 용인 천주교 성직자 묘역에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다고 한다. 현재 용인 천주교 성직자 묘역에는 김수환 추기경을 포함하여 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와 전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김옥균 바오로 주교가 안장되어있다. 2021년 4월 27일 사망한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도 바로 옆에 안장되었다.

사망 후 남긴 재산은 통장 잔고 300만원이 전부였다고 하는데, 이것도 부의 축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혹시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비상금으로 모은 것이었다고 한다. 이 돈은 비서신부와 비서수녀가 생전의 김 추기경이 가입한 자선단체들에 전부 기부했다. 그리고 유품으로 사제복, 십자가, 묵주, 성경, 안경, 미사에서 사용했던 낡은 성작 & 성반 등을 남겼는데 현재 이것들은 서울 가톨릭대학 박물관에서 보존중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사망 및 장례 미사에 관한 영상 및 관련 기록은 국가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국가기록원에서 보존하고 있다.

2022년 6월 5일에 김수환 추기경 탄생 100주년 기념 미사가 명동 대성당에서 봉헌되었으며, 한국 가톨릭 교회 차원에서 시복시성 추진 방침을 밝혔다. 기사

서울대교구가 2024년 6월 18일 교황청 시성부로부터 김수환 추기경 시복 추진에 대해 ‘장애 없음(Nihil Obstat)’을 승인받았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김수환 추기경을 공식적으로 ‘하느님의 종’(일명 가경자. 시복 심사 대상자)으로 칭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본격적인 시복 추진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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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761회.[2] 비슷한 시기에 뮌스터 대학 경제학과에서 유학을 했던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의 회고록에선 김수환 학생신부를 지도할 새로운 교수로서 훗날의 베네딕토 16세가 되는 요제프 라칭거가 배정되었는데 라칭거 교수가 워낙 깐깐해서 학위를 포기했다는 언급이 있다. 지도교수가 끝내 배정되지 않았는지, 아니면 배정된 뒤에 김수환 신부가 학위 취득을 포기했는지가 김 추기경의 공식 전기와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의 회고록 간 충돌하는 부분이다.[3]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4. 마산 교구장 재직시절, 평화방송·평화신문, 2004.[4] 명동성당에서 만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이회창 명예총재 1998.2.14 mbc[5] 김정남 저, 이 사람을 보라, 두레, 2012.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