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는 1846년 부천 소사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서양 문물이 인천항을 통해서 전해져 왔기에 인천도 1889년 5월 1일 제물포 성당(지금의 답동주교좌성당)[1]이 창설되어 초대 주임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천주교 선교사인 니콜라 빌렘 신부가 임명되었다.
그 후, 1961년 6월 6일 서울대목구(지금의 서울대교구)에서 당시 경기도 인천시 일대가 분리돼 인천대목구가 설정되었으며, 메리놀외방선교회[2]의 미국인 윌리엄 존 맥나흐톤 굴리엘모 신부가 초대 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그후 1년 후 1962년 한국 천주교에 정식교계체계가 설정되면서 정식교구인 인천교구로 승격하였다.
본래 인천교구는 경기도 인천시와 김포군(지금의 김포시), 강화군, 부천군 도서지역(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과 경기도 안산시 대부동)만을 관할하였으나, 1970년 인천에 인접한 부천군 내륙지역(지금의 부천시 전 지역, 계양구 북부, 시흥시의 옛 소래읍 지역)을 수원교구에서 편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대 교구장 윌리엄 존 맥나흐톤 굴리엘모(나길모) 주교는 무려 41년간 교구장으로 재임했다. 그 후 부교구장이던 최기산 주교가 2002년 4월 25일 2대 교구장으로 착좌했으나 2016년 5월 30일 최기산 주교가 재임 중 사망하여 보좌주교인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가 교구장 서리를 맡았다. 정신철 주교는 2016년 11월 10일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제3대 교구장 주교에 임명됐으며 2016년 12월 27일 제3대 교구장에 착좌해 현재까지 교구장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시흥시 일부와 안산시 대부도는 인천교구 관할 지역이다. 시흥시 신천동과 은행동 일대는 과거 부천군 지역이었던데다 실질적으로 이 지역은 현재도 생활권이 수원보다는 부천·인천과 가까운 지역이다. 대부도는 원래 부천군, 옹진군 소속의 섬이었으나 시화방조제 건립으로 시흥시와 이어지면서 소속 지역이 바뀐것이다.
인천광역시가 도시와 농촌의 혼합도시이기에 이 교구에서도 도시 성당과 농촌 성당의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인천 본토와 부천시, 시흥시의 본당은 대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성당 이미지를 나타내지만 도서 지역인 강화군, 옹진군 쪽의 성당의 분위기는 농촌 성당 특유의 소박한 이미지를 나타낸다.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공소 역시 강화군·옹진군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매년 1월 초에 사제·부제서품식을 진행한다. 다만 주교좌성당인 답동성당의 규모가 작은데다 답동성당이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어서 마음대로 고치거나 증축할 수 없다. 그래서 1월에 하는 서품식은 수품자들이 많으면 서울대교구처럼 지역의 대형 실내체육관인 남동체육관에서 행사를 거행한다. 수품자들의 숫자가 적을 경우 원칙대로 답동성당에서 서품식을 거행하기도 하며 최근에는 인천가톨릭대학교 강화캠퍼스 내 대성당에서 서품식을 거행하고 있다.
교구청은 교구 설정 때부터 2016년까지 줄곧 교구 주교좌성당인 답동성당 바로 옆에 있었다. 이 문서 첫 부분에 나온 사진 왼쪽 아래의 흰 건물이 바로 교구청이 있던 건물이다. 신포국제시장 건너편 가톨릭회관과 답동성당 뒤편의 옛 박문초등학교 건물에 교구청 내 각 부서의 사무실이 있었다. 그러나 동구 송림동에 있던 박문여자중학교와 박문여자고등학교가 2014년과 2015년에 연이어 송도국제도시로 이전하고 학교 건물이 리모델링됨에 따라 2016년 하반기부터 순차적으로 기존 가톨릭회관에 입주했던 교구청 내 각 부서 사무실이 옛 박문여중고 건물로 옮겨왔다. 2017년 2월 초 이전 작업을 마무리하여 교구청 주소가 중구 답동에서 동구 송림동으로 변경되었다. 기존 답동 청사(옛 박문초등학교 교사)는 사회사목 중심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송림동 옛 박문여중 건물은 청소년과 청년들을 위한 전담 공간인 '인천교구 가톨릭 청소년센터'로 꾸며지고 옛 박문여고 건물은 교구 내 조직의 사무실이 있는 인천교구청과 교구 내 조직에서 일하는 사제들의 거주공간인 사제관으로 사용된다. 교구청 부지 동쪽의 옛 박문여고 도서관 건물은 피정의 집으로 운영되는데 인천광역시 출신 복녀인 심조이 바르바라(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참조)의 이름을 따서 '복자 심조이 바르바라 피정의 집'으로 명명됐다. 교구 내 조직의 사무실이 떠난 가톨릭회관은 2018년 5월 철거됐다. 옛 회관 터에는 주차장과 가로공원이 조성될 예정이다.
[1] 인천의 역사를 알면 실상 제물포라고 불리는 지역은 현재 제물포역이 위치한 숭의동 일대 지역과는 차이가 있다. 원래는 인천항 지역을 제물포라고 불렀으며 지금의 인천역부터 동인천역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였다. 제물포역 근처에 진짜로(!!) 제물포성당이 있지만 답동성당의 역사와는 무관하다.[2] 서울시 광진구 중곡동에 지금도 한국지부가 위치해 있다. 청주교구도 초대 교구장 파디 야고보 주교가 메리놀회 소속이였었다.[3] 기존 성전은 2022년 7월 철거됐으며 그 자리에 새 성전이 건립중이다. 현재 미사는 기존 성전 옆에 있던 교육관에서 거행 중이다.[건립중][꼰]꼰벤뚜알프란치스코수도회 소속[꼰][마] 마리아수도회 소속[마][작]작은형제회 소속[작][11] 본래 목적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유골을 봉안하는 곳이다. 따라서 일반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공간과는 목적이 다소 다르다.[12] 인천교구 관할 하늘의문 묘원 내.[건립중][성]성아우구스띠노수도회 소속[15] 김포성당 내에 있다. 예전에 김포성당 대성전으로 쓰던 건물이다.[16] 인천교구청 앞 마당으로 과거 박문여중고가 있을 때는 운동장으로 쓰였던 부지다.[17] 원래 인천교구에서 운영하는 바다의별 청소년수련원이 있었으나 폐원했다.[18] 해안성당 주임 겸직[19] 마리스텔라성당 주임 겸직[20] 인천가톨릭사회복지회 회장 겸직[21] 용현동성당 주임 겸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