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wcolor=#ffffff> 앙투안 공베르(Antoine Gombert) 공안국(孔安國) | |
출생 | 1875년 4월 25일 |
프랑스 공화국 미디피레네 아베롱 로데스 | |
사망 | 1950년 11월 12일 (향년 75세) |
평안북도 강계군[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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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가톨릭 신부이다. 한국명은 공안국(孔安國).
안성성당을 건축했다. 또한 안법고등학교의 설립자이자, 대한민국에 처음 포도의 묘목을 들여와 경기도 안성시에 포도를 재배하여 우리나라 포도 역사의 시발점인 안성포도의 주인공 신부로도 유명하다. 또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신학생 시절 은사이기도 하다.
2. 출생과 한국 입국
앙투안 공베르 신부는 프랑스 남부의 로데스(Rodez)시 캄블라제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농민 가정의 9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공베르 집안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 가정으로, 아들 4명이 신부가 되었고 딸 3명은 동정녀로 살았다.앙투안은 1877년 9월 7일에 태어난 남동생 줄리앙 공베르(Julien Gombert)와 함께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했고, 1900년 8월 1일 함께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2달 후인 10월 9일, 25세의 앙투안 신부와 23세의 줄리앙 신부 형제는 나란히 조선에 선교사제로 입국했다.
오랜 조선의 천주교 박해가 끝나고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아직 많은 한국인들은 외국의 종교와 낯선 서양인을 경계했다. 공베르 신부 형제도 처음에는 무척 많은 경계와 공격을 받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여 결국 한국인들의 마음을 여는 데 성공한다.
3. 안성에서의 활동
앙투안 신부는 1900년 경기도 안성군 안성성당에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성당을 건축한다. (현 천주교 수원교구 구포동성당) 로마네스크 양식과 한옥 양식을 절충한 구포동성당은 현재 경기도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되어 있다. 1927년에는 교세가 확장되어 평택성당을 신설, 분가시켰다.한편 1909년에는 주민들의 교육을 위하여 안법학교(安法學校)를 설립했다. ‘안법’이란 ‘안성(安城)’에서 安을, 프랑스의 한자 표기인 ‘법국(法國)’에서 法을 따와서 지은 교명이다. 안법학교는 여러 차례의 학제 개편을 거쳐 현재는 안법고등학교로 운영되고 있으며, 구포동성당 및 가톨릭계 유치원인 안법유치원과 이웃해 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안성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앙투안 신부는 주민들을 격려하고 지지하는 한편 평화시위를 당부하였고, 성당에 프랑스 국기를 걸고 치외법권 구역임을 주장하며 일본군과 일본 경찰에 쫓기는 주민들을 숨겨주었다. 또한 그 무렵 흉년이 들자 빈민과 고아를 구제하는 일에도 힘썼고, 이를 위해 모국 프랑스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했다.
1920년 6월 26일자 동아일보 <프랑스인 공안국 신부의 미담> 기사.
오늘날 안성시가 포도로 유명해진 것도 앙투안 신부의 공로이다. 주민들의 가난을 해결하고, 미사 거행에 필요한 포도주를 만들기 위하여, 앙투안 신부는 프랑스에서 포도(머스캣) 묘목 20여 그루를 들여와 심었다. 또한 포도 외에도 감자 재배와 양잠 등의 실용적인 기술들도 소개하여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안성시에서는 오늘날도 앙투안 신부의 이러한 업적들을 기념하고 있다.
‘포도 신부’ 공베르를 아십니까
안성시, 국내 포도 전래자 앙투안 공베르 신부 흉상 제작
한편 앙투안 신부의 동생인 줄리앙 신부도 한국에서 크게 활약했다. 공안세(孔安世)라는 한국식 이름을 지은 줄리앙 신부는 주로 충청남도(천주교 대전교구)에서 사목했다. 그가 초대 주임신부가 되어 건축한 부여군 금사리성당은 충청남도기념물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논산시 쌘뽈여자중학교ㆍ쌘뽈여자고등학교[2]와 이웃해 있는 부창동성당의 제2대 주임신부를 지내기도 했다.
4. 신학교 교수신부 및 수녀원 지도신부
1900년 안성에 부임한 앙투안 신부는, 수많은 신자들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1932년 안성을 떠나 서울의 신학교에 부임하게 된다. 당시 서울 동성상업학교[3]는 갑조(甲組)와 을조(乙組)로 나뉘어 있었는데, 갑조는 일반학급이고 을조는 신부를 양성하는 소신학교[4]였다. 앙투안 신부는 을조에서 신학생들을 지도하게 된다.당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신학생이었는데, 소년 김수환은 아직 사제 성소(聖召)[5]에 대해 분명히 확신하지 못하여 갈등하고 있었고, 앙투안 신부에게 “저는 신학교에서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상담하기도 했다. 이에 앙투안 신부는 “신부는 자신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되기 싫다고 해서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며 김수환 신학생을 격려해주었고, 김수환은 무사히 대신학교까지 마치고 신부가 되었다.
또한 앙투안 신부는 가르멜 봉쇄수녀원 및 성가소비녀(聖家小婢女會)의 지도신부 일도 맡았다. 성가소비녀회는 앙투안 신부와 마찬가지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사제이자 혜화동 성당 제4대 주임신부를 지낸 피에르 생제르(Pierre Singer, 1910-1992)[6] 신부가 1943년 12월 24일 창설한 수녀회로, 앙투안 신부는 피에르 신부와 함께 성가소비녀회의 회칙을 제정하였다.
5. 순교와 기념
1950년은 공베르 신부 형제의 사제서품 50주년(금경축)이자 한국 입국 50주년이었다. 6월 25일 서울 혜화동 대신학교에 여러 신부들,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포함한 여러 신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고 흥겨운 축하식이 열렸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인천 분원(分院) 지도신부로 있던 동생 줄리앙 신부도 참석하여 형 앙투안 신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25세와 23세의 청년시절에 선교사로 한국에 왔던 공베르 형제 신부는, 이제 75세와 73세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그런데 공베르 신부 형제를 위한 잔치가 열린 그날은, 하필 한국 전쟁이 시작된 날이었다. 잔치가 거의 끝날 즈음에야 누군가가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했다”는 소식을 다급하게 전했다. 하지만 외국인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성당과 신자들을 지키기 위하여, 외국으로 피신하지 않고 한국에 남았다. 공베르 신부 형제는 인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북한군에 체포되어 납북되어, 일명 죽음의 행진이라 불리는 대열에 끌려가게 된다. 북한 인민군은 포로로 잡은 종교인들을 평양으로 옮겼다가, 전세가 자신들에게 불리해지자 평안북도 강계군[7]의 고산진 수용소까지 끌고 간다.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길고 험한 길을 행진한 70대 고령의 공베르 신부 형제는 병을 얻었고, 형 앙투안 신부가 1950년 11월 12일에 먼저 사망했으며, 다음날인 11월 13일 동생 줄리앙 신부도 뒤따르듯 사망했다.
현재 한국천주교회에서는 교황청에 공베르 신부 형제의 시복(諡福)을 청원 중에 있으며, 2020년 안법고등학교에서는 천주교 수원교구 이성효 리노 보좌주교의 주례로 공베르 신부 형제의 순교 7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1] 현 자강도 만포시[2] 가톨릭 미션스쿨로, 교명은 ‘성 바오로(Saint Paul)’의 프랑스어식 발음이다.[3] 현 동성중학교ㆍ동성고등학교.[4] 중고등학교 과정의 가톨릭 신학교. 오늘날은 폐지되었다. 대신 교구와 수도회마다 예비신학생 모임이 있고, 이 모임에 성실히 출석해야 가톨릭 신학대학(대신학교)에 지원할 수 있다.[5]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뜻. 넓은 의미로는 다양한 삶의 방식 모두가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하며, 특별히 좁은 의미로 쓰일 때는 ‘사제나 수도자로의 부르심’을 뜻한다.[6] 한국 이름 성재덕(成載德)[7] 오늘날 북한/행정구역상 자강도 만포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