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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6 20:29:40

스털링 다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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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털링 다리 전투
영어: Battle of Stirling Bridge
시기 1297년 9월 11일
장소 스코틀랜드 왕국 스털링 성 인근 스털링 다리
원인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스코틀랜드인들의 항쟁.
교전국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스코틀랜드 왕국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왕국
지휘관 파일:WallaceSeal.png 윌리엄 월레스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앤드류 모레이
파일:Warenne_Arms_2.svg.png 존 드 워렌
파일:Arms_of_Hugh_de_Cressingham_(d.1297).svg.png 휴 드 크레싱엄
병력 기병 180명, 보병 5,000~6,000명 기병 300명, 보병 5,000~6,000명
피해 불명. 기병 100명, 보병 1500여 명 전사.
결과 스코틀랜드 왕국의 승리.
영향 잉글랜드 왕국의 스코틀랜드 지배력 약화, 윌리엄 월레스의 위상 급등.
1. 개요2. 배경3. 경과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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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인 1297년 9월 11일,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스털링 성 인근 스털링 다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한 전투.

2. 배경

1296년 4월 27일,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에드워드 1세던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손쉽게 물리치고 7월 10일에 존 발리올폐위런던 탑에 가두었다. 그 후 8월 22일에 베릭에서 의회를 소집한 후 스코틀랜드 통치에 관한 칙령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스콭르랜드 왕국은 해체되지 않지만, 새로운 가신 왕이 임명되지도 않았다. 에드워드 1세 본인이 "스코틀랜드의 왕"이라는 칭호를 쓰지도 않았다. 그는 스코틀랜드를 몰수된 영지로 간주했고, 워렌 백작 존 드 워렌을 총독으로 세우고, 휴 드 크레싱엄을 재무장관으로, 아머샴의 월터를 법무관으로, 윌리엄 옴스비를 스코틀랜드 대법원장으로 선임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각지에 보안관과 성주들을 직접 선임하거나 현지 귀족이 그 직위를 맡는 걸 승인했다. 또한 스코틀랜드 왕관, 휘장, 그리고 역대 스코틀랜드 국왕들이 대관식 때 사용했던 운명의 돌런던으로 가져갔다. 이후 플란데런 백국의 반란 세력과 손잡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에 대적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은 에드워드 1세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왕국의 주권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고, 왕국의 상징이었던 운명의 돌을 빼앗기고, 잉글랜드 관리와 총독들의 수탈에 시달리는 상황을 견딜 수 없다고 여겼다. 여기에 스코틀랜드 현지 성직자들은 캔터베리 대주교가 스코틀랜드 교회를 자신의 주권하에 두려는 걸 두려워했다. 1297년 초 스코틀랜드 서부 고지대에서 잉글랜드 관리들의 수탈에 저항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났고, 5월 초 애버딘셔와 갤러웨이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그해 5월, 윌리엄 월레스가 스코틀랜드 남부의 라나크셔의 잉글랜드 보안관 윌리엄 헤실릭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후 월레스는 세인트앤드루스 주교 윌리엄 램버튼의 지원을 받아 무리를 끌어모은 뒤 반란을 일으켰다. 그해 여름에는 앤드류 모레이가 스페이 강과 디 강 사이의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급기야 스코틀랜드의 중심지 스콘에서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에 호응하는 봉기가 발발했고, 스코틀랜드 대법원장 윌리엄 옴스비는 간신히 반군을 피해 달아났다. 그 후 베릭의 전 수호자 윌리엄 더글러스가 윌리엄 월레스에게 가담했고, 본킬의 존 스튜어트, 케릭 백작 알렉산더 린제이도 반란에 합류했다. 앤드류 모레이는 인버네스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어쿼트 성을 순조롭게 공략했고, 8월 초까지 인버네스, 엘긴, 벤프 등 잉글랜드 성주들이 지키던 성들을 모조리 제압했다. 이리하여 잉글랜드 왕국의 스코틀랜드에 대한 통제력은 허물어졌고, 단지 북부 스코틀랜드의 성 몇 개만이 잉글랜드인의 지배를 받았다. 당시 스코틀랜드 총독으로서 반란을 진압할 책임이 있었던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은 스코틀랜드의 혹독한 기후에 시달리기 싫어서 휴 드 크레싱엄에게 위임하고 영지로 돌아갔고, 이 때문에 현지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은 반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재무장관 휴 드 크레싱엄은 스코틀랜드 전역을 삽시간에 휩쓴 반란을 진압할 군대를 모집할 여력이 없었기에, 에드워드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297년 6월, 에드워드 1세는 베드녹의 영주 존 3세 코민과 뷰컨 백작 존 코민을 스코틀랜드로 파견했다. 그들은 애버딘의 헨리 체인 주교, 제7대 마르 백작 가르트나이트의 지원을 받았다. 여기에 초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 초대 클리퍼드 남작 로버트 드 클리퍼드도 군대를 일으켰다. 이들은 애넌데일과 니스데일을 지나 6월 말에 에어에 도착했다. 이에 본킬의 존 스튜어트와 윌리엄 더글러스는 강력한 무장과 전투력을 갖춘 잉글랜드군에 대적할 엄두를 못 내고 어바인에서 항복했다. 이 소식을 접한 에드워드 1세는 반란이 곧 평정되리라 여기고 1297년 8월 플란데런으로 원정을 떠나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맞섰다.

그러나 이후의 전개는 에드워드 1세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윌리엄 월레스는 1297년 7월 셀커크 숲에서 보병대를 집결한 뒤 8월 던디 성을 포위 공격헸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이후 테이 강을 건너 북쪽으로 진군한 뒤,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위세를 떨치던 앤드류 모레이와 합류했다. 여기에 에드워드 1세의 지시를 받고 반란을 진압하러 갔던 존 코민 부자는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반란군에 가담했다. 이 소식을 접한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총독 존 드 워렌에게 당장 반란을 진압하라고 독촉하는 서신을 보냈다. 존 드 워렌은 휴 드 크레싱엄과 함께 잉글랜드 기사, 웨일스 궁수, 대규모 보병대를 소집했다.

그 결과 7월에 기병 300명과 보병 10,000명이 베릭에 집결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내부로 진군하는 과정에서 탈영병이 끊임없이 발생했고, 9월 무렵에는 보병의 수가 5,000~6,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초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는 기병 300명과 보병 8,000명을 추가로 보내겠다고 제안했지만, 휴 드 크레싱엄은 현재 확보한 병력 만으로도 반란을 진압하기 충분하다고 여겼고, 군자금을 절감하기 위해 거절했다. 한편,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는 기병 180명과 5,000~6,000명 가량의 무장이 거의 되지 않았고 훈련을 받지 않은 보병대를 이끌었다. 모레이의 군대는 4,000~5,000명으로 스코틀랜드 군대의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전해지며, 윌리엄 월레스의 군대는 1,000명에 불과했다.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는 포스 강 북쪽 기슭의 약간 가파른 언덕인 애비 크레이그(Abbey Craig)의 남쪽 경사면에 군대를 배치했다. 이들은 스털링 성의 좁은 다리에서 북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진군로는 다리 북쪽 끝에서 애비 크레이그 시작 지점까지 제방 위로 이어져서 초원과 곡물밭을 지났으며, 양쪽으로는 구불구불 흐르는 강이 경계를 이뤘다. 습지는 없었지만, 땅이 대체로 부드러워서 기병 돌격에 적합하지 않았다. 9월 초 스털링 성에 도착한 존 드 워렌과 휴 드 크레싱엄은 스코틀랜드 대집사 제임스 스튜어트와 제4대 렌녹스 백작 맬컴과 합류한 뒤, 9월 10일 지원군을 데려오고 스코틀랜드군에게 항복을 설득하는 임무를 맡겨 보냈다.

3. 경과

9월 11일 아침, 잉글랜드 보병대가 스털링 다리를 건넜다. 그러나 존 드 워렌이 늦잠을 자고 있다는 이유로 진지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나중에 깨어난 그가 도로 출격 명령을 내리자, 보병들은 다리 건너로 다시 보내졌다. 이후 제임스 스튜어트와 레녹스 백작 맬컴이 스코틀랜드 병사 40명을 데리고 왔다. 이때 그들은 약탈을 일삼는 잉글랜드 병사들을 보고 격분해 이를 막아섰고, 이후 벌어진 짧은 충돌 와중에 잉글랜드 장병 1명이 살해되었다. 이에 잉글랜드군 내부에서는 스튜어트와 레녹스가 배신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나중에 소식을 접한 존 드 워렌이 달려와서 상황을 수습했고, 스튜어트와 레녹스가 본대로 들어왔다.

존 드 워렌은 두 사람이 스코틀랜드군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전해주길 기대하며, 보병들을 도로 진영으로 불러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자신들을 따르던 가신들조차 항복시키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이에 존 드 워렌은 두 사람을 윌리엄 월레스에게 보내 항복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게 했지만, 윌리엄 월레스는 단 번에 거부했다. 이에 존 드 워렌은 무력으로 적군을 섬멸하기로 했다. 잉글랜드 편에서 복무하던 스코틀랜드 기사 리처드 런디는 군대의 일부와 함께 서쪽의 넒은 여울을 통해 강을 건너 스코틀랜드군을 뒤에서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휴 드 크레싱엄은 아침에 지연이 있었으므로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고, 존 드 워렌은 스코틀랜드 반란군은 오합지졸일 뿐이니 정면 돌격으로도 손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전군에 다리를 건너라는 명령을 내렸다.

휴 드 크레싱엄과 초대 트윙 남작 마마듀크 트윙이 지휘하는 기병 150명과 보병 1,800명이 먼저 다리를 건너갔다. 이때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가 선제 공격을 명령했고, 스코틀랜드 보병들은 언덕을 내려와 초원을 건너 댐을 향해 달려갔다. 그 후 일부 스코틀랜드 장병들이 쉴트론[1]을 결성한 뒤 다리로 진군해 길목을 막아버렸고, 이미 포스 강 북쪽 기슭으로 건너간 잉글랜드군은 더 이상 지원군을 받지 못한 데다 전투 대형을 제대로 갖추기도 전에 적의 맹공에 시달렸다.

그 결과 학살이 일어났고, 휴 드 크레싱엄을 비롯한 상당수 지휘관들이 피살당하고 기병 100명과 보병 1,500명 가량도 사살되었다. 마마듀크 트윙을 비롯한 소수의 장병 만이 적의 포위를 뚫고 강을 건너 후퇴할 수 있었다. 수탈을 자행해 스코틀랜드인들의 증오를 받았던 휴 드 크레싱엄의 유해는 스코틀랜드인들에 의해 가죽이 벗겨지는 등 온갖 모욕을 당했다. 한편, 다리를 아직 건너지 않았던 존 드 워렌은 전투에서 패했다는 걸 깨닫고 다리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살아 돌아온 마마듀크 트윙에게 스털링 성 방위를 맡긴 뒤, 자신은 베릭으로 퇴각했다. 잉글랜드 수송대는 폴커크로 가는 길을 통해 탈출을 시도했지만, 여러 개의 개울이 교차하는 늪지대에서 스코틀랜드 반란군 편으로 돌아서기로 한 제임스 스튜어트와 레녹스 백작 맬컴이 습격하는 바람에 모조리 노획당했다. 다만 스코틀랜드군도 이 전투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었는데, 특히 앤드류 모레이가 전투 도중 중상을 입었고, 2달 만에 부상이 악화하여 사망했다.

4. 이후

스털링 다리 전투의 승리를 이끈 윌리엄 월레스는 앤드류 모레이가 사망한 후 스코틀랜드의 지도자로 떠받들어졌고, 아직 잉글랜드에 포로로 있던 존 발리올을 대신해 스코틀랜드를 다스릴 '수호자'를 자칭했다. 1297년 10월과 11월, 그는 국경을 넘어 노섬벌랜드를 습격해 코커머스와 뉴캐슬 사이의 지역을 초토화하고 수많은 인명을 살육하고 여인들을 강간했다. 성직자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은 이들을 피해 타인 강 남쪽의 더럼 주로 도피했다. 1297년 크리스마스 직전, 존 드 워렌과 로버트 클리퍼드는 각자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진격했다. 클리퍼드는 에넌데일로 들어가서 마을 10개를 불태웠지만, 기병대 일부가 매복 공격을 받고 큰 손실을 보았다. 존 드 워렌은 스코틀랜드 동부로 가서 베릭을 탈환하고 록스버러를 포위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1298년 3월, 윌리엄 월레스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스코틀랜드 백작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고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로 선출되었다. 이후 스털링 성을 포위해 식량이 떨어진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지만, 공성 무기가 없어서 에든버러, 베릭 및 기타 성을 공략하지 못했다. 1298년 2월 중순, 에드워드 1세는 플란데런에서 돌아온 뒤 존 드 워렌에게 서신을 보내 자기가 친히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원정을 떠날 테니, 그때까지 독자적으로 출진하지 말고 대기하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한편, 던바 전투 때 포로로 잡혔던 수많은 스코틀랜드 기사와 귀족들은 에드워드 1세의 플란데런 원정에 참여했다. 에드워드 1세는 그 대가로 그들에게 석방을 약속했지만, 플란데런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아솔 백작 스트라스보기의 존을 비롯한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이 프랑스로 망명했고, 필리프 4세의 지원 덕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뒤 윌리엄 월레스와 합류했다.

1298년 여름, 에드워드 1세는 요크에 본부를 설치한 뒤 기병 2,000명, 보병 12,000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를 편성했다. 그해 7월, 더럼 주교 앤서니 베크와 더럼 보안관 존 피츠마마듀크가 이끄는 선봉대가 디르턴 성을 포위했다. 공성 무기와 보급품이 부족했던 피츠마마듀크는 왕에게 돌아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그러나 보급품을 실은 3척의 배가 포위군에 도착하면서, 잉글랜드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한편, 스코틀랜드를 침공한 잉글랜드군 주력 역시 식량난에 시달렸다. 바람이 불리하여 스코틀랜드에 도착한 보급선은 몇 척뿐이었다. 그러던 중 잉글랜드군은 윌리엄 월레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군대가 폴커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에드워드 1세가 친히 폴커크로 진군하면서, 폴커크 전투의 막이 올랐다.
[1] Shiltron: 최전방에 창병이 있는 조밀한 원형 대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