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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7 19:47:23

로버트 드 클리퍼드

성명 로버트 드 클리퍼드
Robert de Clifford
생몰년도 1274년 4월 1일 ~ 1314년 6월 24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헤리퍼드셔 클리퍼드 성
사망지 스코틀랜드 왕국 배넉번
아버지 로저 3세 드 클리퍼드
어머니 이사벨라 드 비퐁
배우자 모드 드 클레어
자녀 이도네아, 로저, 로버트
직위 텐버리의 클리퍼드 남작, 초대 클리퍼드 남작, 잉글랜드 마셜, 스코틀랜드 변경 수호자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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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활약했지만 배넉번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

1274년 4월 1일 애플비의 봉건 남작 로저 3세 드 클리퍼드와 웨스트모어랜드 내 상당한 영지를 다스린 로버트 드 비퐁의 딸 이사벨라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조부 로저 2세 드 클리퍼드는 웨일스 변경의 남작 중 한 명으로, 우스터셔, 헤리퍼드셔, 버크셔에 토지를 소유했다. 아버지 로저 3세는 1282년 11월 6일 허웰린 압 그리퍼드의 반란을 진압하는 작전을 수행하던 중 배다리를 건너다가 적의 급습을 받고 강에 빠져 익사했다. 이후 로버트는 아버지의 영지를 계승했고, 1286년 조부가 사망한 뒤 조부가 가졌던 영지도 계승했다. 어머니 이사벨라는 로버트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에게 후견을 맡기기로 했다.

1291년, 어머니 이사벨라가 사망한 뒤 애플비와 브루엄 성을 비롯한 웨스트모어랜드의 비퐁 영지를 물려받았다. 그 후 후견권은 왕실 인사인 콘월의 에드먼드에게 넘겨졌다가, 1294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직접 맡았다. 1295년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원정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5월 3일 자신의 영지에 대한 상속권을 인정받았다. 그 후 129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정기적으로 스코틀랜드에 대한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 1297년 7월 컴버랜드의 왕실 소유 성들의 보안관으로 선임되었고, 초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와 함께 갤러웨이에서 일어난 스코틀랜드 반란군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아 별다른 문제 없이 반란군을 물리쳤다. 그 해 말, 로버트는 애넌데일을 습격해 그 지역을ㅇ 파괴하고 마을 10개를 불태웠으며, 이듬해 2월에 애넌데일을 다시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1298년 7월 22일 폴커크 전투에 참여해 아군의 승리에 기여했으며, 1300년 에드워드 1세와 함께 케르버록 성 공방전에 참여했다. 1301/1302년 겨울에 스코틀랜드에서의 군사 작전에 참여했고, 1304년 에드워드 1세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재차 원정가서 3월 1일 피브스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같은 해 에드워드 왕자의 군대에 합류하여 스털링 성 공략전에 참여했다. 1302~3년과 1305~7년에 더럼의 수호자를 역임했고, 1306년 3월에는 셀커크의 수호자를 맡았다. 1305년 8월에 에드워드 왕자가 반포한 헌장은 로버트를 "우리의 사랑스럽고 매우 사랑하는 기사"라고 밝혔다. 한편, 그는 에드워드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로버트 1세를 추적하는 임무를 맡았다. 1307년 2월 갤러웨이로 진군해 산간지대에 숨은 로버트 1세의 행방을 쫓았지만, 그 사이에 로버트 1세의 심복인 제임스 더글러스가 더글러스 성을 함락하고 로버트가 배치했던 수비대를 섬멸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로버트는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대가로 많은 보상을 받았다. 1298년 11월 25일, 그는 잉글랜드 북서부의 록스버러셔 국경까지 스코틀랜드 영토를 관할하는 대장 겸 왕립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1298년 7월 7일에는 노팅엄 성의 수호자이자 트렌트 강 북쪽 지역의 재판관을 맡아 에드워드 1세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이 직위를 유지했다. 1298년 9월 26일 케버록 성을 받았고, 에드워드 1세가 제4대 더글러스 영주 윌리엄 더글러스에게서 몰수한 땅도 받았다. 이 일은 클리퍼드 가문과 더글러스 가문이 14세기 내내 불화를 겪는 배경이 되었다.

1299년 12월 29일, 로버트는 클리퍼드 남작 직함으로 잉글랜드 의회에 처음으로 소환되었다. 그 후 그는 1313년 11월 26일까지 의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했다. 1306년 5월, 로버트는 로버트 1세의 소유였던 더럼 교구에서 하트와 하트풀의 관리를 맡았고, 1302년, 1303년, 1305년에 더럼 교구의 보안관을 맡았다. 1305년 12월 11일, 로버트는 벨리올 영지 내 게인스포드와 버나드 성을 접수했다. 1307년 2월, 에드워드 1세는 클리퍼드에게 로버트 1세의 반란에 가담한 크리스토퍼 세튼이 소유했던 컴벌랜드 영지를 로버트에게 하사했다. 이렇듯 광범위한 영지를 소유한 그의 주요 거점은 웨스트모어랜드로,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1298년 브러 사워베리 영지를 인수했으며, 1300년 브루엄 성을 확장했다.

1307년 7월 7일 에드워드 1세가 사망했다. 그는 링컨 백작 헨리 드 라시,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와 함게 에드워드 1세의 임종을 지켜봤다. 이후 새 국왕이 된 에드워드 2세는 로버트를 잉글랜드 왕실 마셜로 선임했다. 그는 마셜의 자격으로 1308년 2월 25일에 거행된 에드워드 2세의 대관식을 주재했다. 그 해 3월 12일 노팅엄 성의 수호자이자 트렌트 강 북쪽 땅의 순회판사 직에서 해임되었지만, 이것이 왕의 은총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8월 20일에 스코틀랜드 국경 지대의 대장이자 보안관으로 선임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에드워드 2세의 허락하에 잉글랜드 북부에 남아 있던 비퐁 가문의 영지를 받았고, 그의 딸 이도네아와 앤윅의 퍼시 남작의 상속인인 제2대 엔윅의 퍼시 남작 헨리 퍼시와의 결혼을 이뤘다. 그는 이를 통해 스콭르랜드와의 국경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1308년 10월 13일, 로버트는 '왕의 명령에 따라' 어머니의 자매인 이도네아 드 비퐁과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인 존 드 크롬뭴과 협상을 마무리해, 비퐁 가문의 나머지 재산을 받았다. 1310년 에드워드 2세에게 노스요크셔에 있는 스키튼 성을 받았고, 스키튼 북서쪽에 있는 광대한 영토인 크레이븐의 관리인으로 선임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그의 힘을 빌려서 스코틀랜드에서 로버트 1세의 공세로 약화된 잉글래 왕국의 입지를 회복하기를 원했기에 이렇게 조치했을 것이다.

이후 에드워드 2세가 아버지 에드워드1세에 의해 추방되었던 총신 피어스 개버스턴을 궁정으로 불러들여서 콘월 백작의 직위를 내리고 조카딸 마거릿 드 클레어와 결혼시키자, 잉글랜드 귀족들이 분노했다. 하지만 로버트는 여전히 왕의 지지자 중 한 사람이었다. 1308년 1월 31일, 그는 불로뉴 귀족들이 작성한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에 따르면, 서명자들은 왕권을 옹호하겠다고 맹세했으며, 귀족들의 반대에 맞서 왕에게 지지를 표명했다. 또한 로버트는 1309년 8월 6일 귀족들의 스탬퍼드 서신에 서명해, 에드워드 2세를 지지했다.

그러던 1309년, 에드워드 2세는 귀족들의 압력에 버티지 못하고 개버스턴을 아일랜드 총독으로 선임하고,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를 왕을 대신해 개혁을 이끌 귀족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임했다. 로버트는 이때에도 스코틀랜드 국경에서 계속 근무했다. 1309년 10월 26일 칼라일 변경 지역의 수호자로 임명되었고, 12월 20일에는 기병 100명과 보병 300명으로 구성된 군대와 함께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로 선임되었다. 당시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 북부 전체를 지배했지만, 주요 요새는 여전히 잉글랜드의 손에 있었다. 그러나 개버스턴을 둘러싸고 에드워드 2세와 귀족들의 대립이 심해졌기 때문에, 로버트 1세를 토벌하기 위한 군대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

1310년 4월 1일, 로버트는 칼라일 변경 지역 수호자 직임을 사임했다. 7월 17일에 다시 수호자로 선임되었고, 12월 셀커크로 가서 로버트 1세와 회담을 가졌다. 1311년 4월 4일, 로버트는 스코틀랜드 남부 수호자로 선임되어 베릭에서 통치를 행사했다. 그 해 11월 스코틀랜드 습격 작전을 이끌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개버스턴이 1310년 12월 컴브리아의 펜리스 지배권을 획득하면서 잉글랜드 북서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자, 그는 개버스턴이 자신의 관할이던 잉글랜드 북서부에 손댄 것에 불만을 품었고, 이를 허용한 에드워드 2세와의 관계가 냉각되었다.

1312년, 로버트는 귀족들이 개버스턴을 무력으로 타도하기 위해 거병할 때 가담했다. 그 해 5월 4일, 그는 군대를 이끌고 에드워드 2세와 개버스턴이 있던 뉴캐슬에 입성했지만, 에드워드 2세와 개버스턴은 탈출에 성공했다. 그해 5월, 로버트는 개버스턴이 피난처로 삼았던 스카버러 성 포위전에 참여했다. 5월 19일, 개버스턴은 8월 1일 의회가 자기 운명을 결정할 때까지 월링포드 성에 가택 연금되는 것을 보장받는 대가로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에게 귀순했다. 그러나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와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는 재판까지 기다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두 사름은 개버스턴을 납치해 워릭으로 끌고 간 뒤, 6월 19일 개버스턴을 참수했다. 로버트는 개버스턴 살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에드워드 2세와 개버스턴이 남기고 간 귀중품 일부를 자기 것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왕에게 반환했다. 그 후 로버트는 1년간 국왕과 워릭 백작, 랭커스터 백작 사이의 중재를 맡았다. 1313년 10월 14일 교황청의 참여 하에 이뤄진 협상 결과, 개버스턴의 살인자들은 사면받았고, 이틀 후 로버트는 왕에게 반기를 든 모든 귀족 명단에 포함되어 사면받았다.

1313년 12월 23일, 로버트는 1314년 6월 스코틀랜드에 대한 원정에 합류하기 위해 베릭으로 소환되었다. 1314년 2월 20일, 에드워드 2세는 로버트 1세의 군대에 포위된 스털링 성을 구원하겠다는 의사를밝혔다.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서리 백작 존 드 워렌,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 제9대 아룬델 백작 에드먼드 피츠앨런을 포함한 여러 귀족들이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지만, 로버트는 참여할 의사를 표명했다. 에드워드 2세는 6월 10일 워릭에서 기사 2~3천 명과 창병 2만 명, 그리고 궁수대 수천 명을 모았다. 군대 지휘는 제4대 헤리퍼드 백작이자 왕실 순찰관 험프리 드 보훈이 이끌었다. 로버트 역시 여기에 소속되었으며, 그 외에도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 앵거스 백작 로버트 드 움프라빌, 시그레이브 백작 니콜라스 시그레이브, 그리고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가 참여했다.

이후 1314년 6월 23일에 벌어진 배넉번 전투에서, 로버트는 초대 보몽 남작 헨리 드 보몽과 함께 600~700명으로 구성된 기병을 이끌고 스코틀랜드군의 동쪽 측면을 돌아가서 북쪽에서 적의 후미를 치려 했다. 그러나 로버트 1세가 사전에 그들이 지나갈 숲의 좁은 통로에 창병 일부를 배치해두고 있었고, 로버트와 헨리는 좁디 좁은 통로에 배치된 적군을 물리치지 못했다. 그 사이에,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가 이끄는 분견대가 세인트 나니안의 작은 교회 근처에 있다가 로버트의 분견대를 향해 진군했다. 로버트는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기병대를 이끌고 진격했지만, 토머스 랜돌프의 스코틀랜드 창병대는 방패벽을 세우고 긴 창을 잔뜩 내세워서 대적했다. 기병들은 이들을 뚫지 못하고 고전하다가 결국 패주했다.

다음 날인 1314년 6월 24일, 로버트는 잉글랜드 본대로 돌아간 후 전날의 패배를 만회하고자 선봉을 이끌었지만,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의 맹공으로 전사했다. 그 후 잉글랜드군이 참패해 본국으로 패주했고, 로버트 1세는 로버트를 포함한 전사한 잉글랜드 지휘관들의 유해를 수습한 뒤 에드워드 2세에게 보내줬다. 로버트의 유해는 그의 부모를 위해 세운 예배당인 웨스트모어랜드의 샤프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