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제5대 레녹스 백작 맬컴 Malcolm, 5th Earl of Lennox |
출생 | 미상 |
스코틀랜드 왕국 레녹스 백작령 | |
사망 | 1333년 7월 19일 (향년 미상) |
스코틀랜드 왕국 할리돈 힐 | |
아버지 | 제4대 레녹스 백작 맬컴 |
어머니 | 마조리 |
배우자 | 마거릿 |
자녀 | 도널드 |
직위 | 제5대 레녹스 백작 |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과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잉글랜드 왕국에 맞서 싸웠지만, 할리돈 힐 전투에서 전사했다.2. 생애
12세기 이래로 스코틀랜드 남서부 고지대의 유력한 귀족 가문이었던 레녹스 클랜 출신으로, 제4대 레녹스 백작 맬컴의 아들이다. 어머니 마조리의 기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1290년대 초 아버지가 사망한 뒤 레녹스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1286년 알락산더르 3세가 사고사한 이래로, 스코트랜드 왕위 계승을 놓고 분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제5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를 지지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에드워드 1세가 1292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존 발리올을 지명했을 때 승복했다.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이 발발한 후, 그는 초기엔 잉글랜드군의 편에 섰다. 1297년 스털링 다리 전투 때, 그는 스코틀랜드 대시종장 제임스 스튜어트와 함께 존 드 워렌이 이끄는 잉글랜드 진영을 찾아가서 스코틀랜드 측 가신들에게 항복을 설득하고 싶다고 청했다. 존 드 워렌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두 사람은 시간을 끌다가 돌아와서 가신들이 자기들 말을 듣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그 사이 전투 대형을 결성한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는 이어진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대파했다. 이에 그는 제임스 스튜어트와 함께 도망치는 잉글랜드군을 공격해 타격을 입혔다.
1298년 폴커크 전투에 참여했지만 패배를 면치 못했고, 이후에도 스코틀랜드 반란군의 일원으로서 에드워드 1세에 대적했지만, 갈수록 상황이 악화하자 1304년 초 대다수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함께 에드워드 1세에게 항복하고 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1306년 초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 국왕을 칭하고 에드워드 1세에게 맞서자, 그는 즉시 로버트 1세를 지지했다. 1306년 3월 25일 로버트 1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백작 3명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러나 1306년 6월 메스번 전투와 8월 달리그 전투에서 완패한 뒤 로버트 1세와 함께 쫓기는 몸이 되었고, 에드워드 1세는 그의 영지와 작위를 몰수하고 클라이드 만에서 자시는 지지하던 존 드 멘티스 경에게 수여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추종자가 여럿 있었고, 로버트 1세가 레녹스를 거쳐 스코틀랜드 서부와 헤브리디스 제도 또는 아일랜드로 탈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07년 에드워드 1세가 사망한 뒤 로버트 1세가 점차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고 스코틀랜드를 재정복할 때, 그도 자기 영토를 되찾았다. 1308년 로버트 1세의 스코틀랜드 서부 원정에 참전했고, 1309년 3월 로버트 1세가 개최한 첫번째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프랑스 왕에게 보내는 편지에 서명했다. 1314년 배넉번 전투에 참전했고, 그 후 몇 년간 왕실 헌장에 이름을 자주 올렸으며, 1320년 교황 요한 22세에게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인정해달라고 청원하는 아브로스 선언에 서명했다.
1314년 로버트 1세가 자신에게 반기를 든 제10대 아솔 백작 데이비드 2세 드 스트라스보기의 영지를 몰수했을때 일부 영지를 받았으며, 클랙맨난의 세습 보안관을 맡았고, 1321년 레녹스에서 가장 중요한 성인 덤버튼 성의 보안관 겸 사령관을 맡았다. 1329년 로버트 1세가 사망한 후 후계자인 데이비드 2세의 왕위 계승을 지지했다. 3년 후 제2차 스코틀랜드 전쟁이 발발하자 에드워드 발리올을 앞세운 잉글랜드군에 대적했지만, 1333년 7월 19일 할리돈 힐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는 마르 백작 돔날 2세의 자매로 알려진 마거릿과 결혼해 외아들 도널드를 두었다. 도널드는 아버지 사후 제6대 레녹스 백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