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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25 22:09:10

1322년 로버트 1세의 잉글랜드 대약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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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2년 로버트 1세의 잉글랜드 대약탈
영어: Great Raid of 1322
시기 1322년 6월 17일 ~ 11월 2일
장소 잉글랜드 북부
원인 잉글랜드 왕실을 압박해 자신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하게 하려는 로버트 1세의 공세
교전국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스코틀랜드 왕국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왕국
지휘관 파일:Arms_of_Bruce.svg.png 로버트 1세
파일:Arms_of_the_House_of_Douglas.svg.png 제임스 더글러스
파일:fitz-randolf-coat-of-arms.jpg 토머스 랜돌프
파일:Arms of Stewart.png 월터 스튜어트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에드워드 2세
파일:Arms_of_Jean_de_Bretagne.svg.png 장 드 브르타뉴
파일:Warenne_Arms_2.svg.png 존 드 워렌
파일:Coat_of_Arms_of_William_de_Valence_as_Earl_of_Pembroke.svg.png 에이머 드 발랑스
파일:CoA_Andrew_Harclay.svg.png 앤드류 하클레이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존 드 버밍엄
결과 잉글랜드 북부 초토화.
영향 에드워드 2세의 위상 추락.
1. 개요2. 배경3. 경과4. 이후

1. 개요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인 1322년 6월 17일 ~ 11월 2일,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 북부를 대상으로 벌인 대약탈.

2. 배경

1319년 12월 22일, 스코틀랜드 왕국의 군주 로버트 1세와 잉글랜드 왕국의 군주 에드워드 2세는 최소 2년간 휴전을 맺기로 합의했다. 이때 잉글랜드 측은 1년 이내에 성을 철거하거나 스코틀랜드에 반환한다는 조건으로 노섬벌랜드에 있던 하보틀 성을 돌려받았다. 1320년 4월 6일, 스코틀랜드 백작 8명과 남작 30명이 아브로스 수도원에서 "우리는 절대로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선언서를 작성하고 서명한 뒤 교황 요한 22세에게 발송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사절단이 아비뇽으로 가서 교황과 협상하기 시작하자, 잉글랜드 당국은 교황이 로버트 1세를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철회할까 봐 두려워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가장 가까운 심복인 펨브로크 백작, 배들스미어 백작,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를 사절단 대표로 선임해 1320년 8월 칼라일에서 스코틀랜드 측과 협상하도록 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정부는 8월 14일에 스코틀랜드에 사절을 보내 협상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는데,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1321년 1월 19일,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와 평화 협상을 진행하기 위한 대표단을 결성했다. 이 사절단에는 요크 대주교, 칼라일의 존 홀튼 주교, 우스터의 토머스 콥햄 주교 , 윈체스터의 리고 드 아세리오 주교, 펨브로크 백작, 헤리퍼드 백작, 배들스미어 백작, 내각장관 로버트 불독, 윌리엄 에어민, 그리고 랭커스터 백작의 추종자인 스티븐 시그레이브, 니콜라스 시그레이브, 폴크 레스트랭, 존 드 클래버링이 포함되었다. 여기에 교황 특사와 프랑스 대표단도 참여했다. 다만 펨브로크 백작은 여전히 프랑스에 있어서 참여하지 못하고, 리치먼드 백작이 그를 대신해 사절단에 합류했다. 3월 26일, 밤버러에서 양측이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회의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9월 1일로 연기되었다.

얼마 후, 웨일스 변경 지방에서 왕의 총애를 받는 휴 르 디스펜서에 대항한 변경 지방 영주들의 반란이 발발했고, 헤리퍼드 백작도 여기에 가담했다. 1321년 여름에는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참여하면서 잉글랜드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스코틀랜드와의 평화 협상은 자연히 이뤄지지 않았다. 에드워드 2세는 어쩔 수 없이 반란 수습에 전념하는 한편, 사전에 약속한 대로 하보틀 성을 철거하도록 했다. 한편,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제임스 더글러스와 비밀 회담을 갖고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22년 1월 6일, 제임스 더글러스는 휴전 협정이 만료되자마자 잉글랜드 북부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티사이드를 약탈한 뒤 하틀풀과 클리블랜드를 약탈하고 몸값을 받아냈으며, 부관인 월터 스튜어트는 리치먼드셔를 약탈하거나 몸값을 확보했다. 당시 랭커스터 백작은 남부 요크셔에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스코틀랜드에 대항하지 않았다.

1322년 초, 에드워드 2세는 랭커스터에 대한 군사 행동을 취하고 그를 북쪽으로 몰아냈다. 컴벌랜드의 보안관인 앤드류 하클레이는 왕에게 스코틀랜드인에 관해 경고했고, 왕의 승인을 받아 경기병대를 모집했다. 하지만 그는 이 병력을 스코틀랜드인에 대항해서 쓰지 않고, 1322년 3월 북쪽으로 도망치는 랭커스터를 비롯해 헤리퍼드, 배들스미어를 포함한 나머지 반군을 공격해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반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랭커스터 백작을 체포했다. 그 사이 에드워드 2세는 랭커스터의 성을 접수한 뒤, 스코틀랜드인들과 비밀 협상을 한 증거를 발견했다. 결국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이렇듯 잉글랜드 정세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로버트 1세는 에드워드 2세를 압박하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3. 경과

1322년 6월 17일, 로버트 1세는 최측근인 제임스 더글러스,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 스코틀랜드 대집사 월터 스튜어트와 함께 칼라일을 향해 진격했다. 그들은 홀름컬트럼 수도원을 먼저 접수하고 심하게 파괴한 뒤, 코플랜드 영지를 철저하게 약탈했다. 이후 한여름에 에그레몬트를 지나가면서 방앗관 2개를 불태웠다. 퍼니스 수도원장은 로버트 1세에게 자기 영지를 보전해달라며 돈을 줬지만, 로버트 1세는 이를 무시하고 퍼니스 영지 역시 약탈하고 방화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은 랭커스터 시를 향해 진군하면서 네더 켈릿과 토리솔름을 파괴했고,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남쪽으로 이주했다. 라네르코스트 연대기에 따르면 그 지역에 있던 교회 2곳 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7월 2일 랭커스터에 도착한 스코틀랜드군은 나흘간 그곳에 머물다가 프레스턴을 거쳐 스커튼으로 이동하면서, 그곳에 있던 밀 작물을 모조리 뽑아 버렸다. 프레스턴은 이때 스코틀랜드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수십 년간 폐허가 된 채 방치되었다. 일부 스코틀랜드 분견대는 샘스베리로 진군해 그곳을 약탈했다. 이후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로 철수하다가 칼라일에 도착해 5일간 머물면서 부하들에게 그 주변의 모든 것을 약탈하도록 한 뒤, 7월 24일 국경을 넘어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스코틀랜드군은 이번 원정에서 막대한 가축과 전리품을 확보해, 잉글랜드군의 예상되는 반격에 대비할 보급품과 식량을 충분히 마련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를 응징하기로 마음먹고, 1322년 8월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 제7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 그리고 라우스 백작 존 드 버밍엄과 함께 2만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북상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수중에 넘어간 베릭 성을 우회한 뒤 에든버러로 진군했다. 로버트 1세는 이들과 대적하는 걸 회피하고자 군대를 포스 강 건너편으로 철수하면서, 잉글랜드군의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을 불태우고 식량을 가져갔다. 에드워드 2세는 로디언에서 적군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고 단지 절름발이 소 한 마리만 발견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서리 백작은 그 소를 보고 이렇게 농담했다고 한다.
"저 소는 내가 지금까지 본 소 중에서 가장 비싼 소일 것이다. 아마 천 파운드 이상 될 것이다!"

그 후 잉글랜드군은 8월 19일 머슬버러에서 야영한 뒤, 함대의 보급을 받고자 항구 도시인 리스로 이동했다. 그러나 수송 함대는 폭풍우로 인해 곳곳으로 흩어지면서 리스에 도착하지 못했다. 결국 잉글랜드군은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8월 말에 국경으로 후퇴했다. 이때 에드워드 2세의 사생아인 아담 피츠로이가 사망했다. 9월 2일 잉글랜드에 도착한 에드워드 2세는 잉글랜드 북부에 남을 의사를 밝혔고, 9월 26일 밤버러, 워크워스, 던스턴버러, 올닉 성주들에게 서신을 보내 스코틀랜드의 침략에 직면하여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을 질책했다.

한편,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군이 돌아가자 공세를 재차 벌이기로 했다. 9월 30일, 솔웨이 만에서 배를 타고 원더미어의 보우네스 인근으로 이동한 그는 10월 5일 칼라일 주변 지역을 파괴해,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가 군대를 모집할 여력이 없도록 했다. 그 후 페나인 산맥을 통과하면서 스콧비, 칼라튼, 컴류 교구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군이 이렇게 빨리 쳐들어올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군대를 해산한 뒤 리보 수도원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스코틀랜드인들이 자신을 추격하고 있으며, 이미 몇 킬로미터 떨어진 노스앨러튼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여러 귀족과 군대에 복귀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제때 도착하지 못했고, 10월 14일 스코틀랜드군이 올드 바이랜드 전투에서 리치먼드 백작이 이끄는 왕의 호위대를 격파했다. 에드워드 2세는 가까스로 체포를 모면하고 요크 지방으로 도주했고, 측근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와 함께 새로운 군대를 모집했다.

한편, 타인머스 수도원에 머물던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는 스코틀랜드군이 접근하자 남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에드워드 2세는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의 군대를 보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를 적대햇던 이자벨을 단호히 거부하고 다른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그러지 못했고, 타인머스는 곧 스코틀랜드군에 의해 고립되었다. 게다가 해상은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은 플란데런 백국 함대가 순찰했다.

이자벨은 적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호위대 일부를 배치하고, 나머지는 배를 징발하도록 했다. 그 후 이자벨과 수행원들이 배에 타는 동안, 스코틀랜드군이 도시로 진입하면서 싸움이 벌어졌고, 이자벨의 수행원 2명이 사살되었다. 이자벨은 배에 오른 뒤 플란데런 선박들을 피해 남쪽으로 이동하여 상륙한 뒤 요크로 가서 남편과 합류했다. 이자벨은 에드워드 2세가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에게 속아서 자신을 저버렷다고 비난했다. 에드워드 2세는 이에 맞서 이자벨과 동맹을 맺은 더럼 주교 루이스 드 보몽이 이자벨이 제때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비난했다. 이리하여 에드워드 2세와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의 결혼 생활은 파탄났다.

그 사이, 스코틀랜드의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는 별동대를 이끌고 랭커셔와 요크셔로 진군해 약탈을 자행했다. 그는 많은 종교 건물을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보존해줬다. 그 후 해안가를 따라 이스트 라이딩으로 진군하면서, 인근 교구에 있던 수도원들로부터 몸값을 뜯어냈다. 로버트 1세는 10월 20일 베벌리 타운으로부터 400파운드를 받아낸 뒤 스키튼으로 진군하면서 여러 마을과 도시로부터 역시 몸값을 받아내는 대가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지 않았다. 이윽고 스키튼에 도착한 스코틀랜드군은 행군을 멈췄고, 토머스 랜돌프는 10월 22일 왕의 군대에 합류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은 혹독한 겨울 날씨와 폭우가 닥치자 스코틀랜드로의 귀환길에 올랐고, 11월 2일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로버트 1세의 잉글랜드 북부 대약탈은 막을 내렸다.

4. 이후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는 에드워드 2세가 로버트 1세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칼라일 주변을 비롯한 잉글랜드 북부가 초토화되는 걸 목도하고, 더 이상 로버트 1세에 대적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에드워드 2세의 허락 없이 스코틀랜드와 협상하기로 했다. 1323년 1월 3일, 하클레이는 로크마벤에서 로버트 1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인정받고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그 대가로 잉글랜드 왕국에 4만 마크를 지불하고 에드워드 2세의 딸과 자신의 아들을 결혼하기로 했다. 또한 에드워드 2세가 이 조약을 존중하도록 하기 위해 무력 사용이 필요한 경우, 로버트 1세와 하클레이는 동맹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하클레이가 자기 허락 없이 그런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분노했다. 그는 즉시 체포령을 내렸고, 하클레이는 2월 25일 체포된 뒤 3월 3일 모든 직위와 영지를 박탈당하고 처형되었다. 그렇지만 에드워드 2세 역시 전쟁을 이어가는 건 무익하다는 걸 잘 알았기에, 로버트 1세와 재협상하기로 했다. 이후 양자는 1323년 3월 14일에 5월 22일까지 유효한 임시 휴전을 맺었다. 4월 29일 휴전 기간이 6월 2일로 연장되었고, 세인트앤드루스의 윌리엄 램버튼 주교가 대표하는 스코틀랜드 대표단이 뉴캐슬로 향했다. 5월 1일, 에드워드 2세는 펨브로크 백작, 엑서터의 월터 스테이플던 주교, 휴 르 디스펜서, 로버트 불독에게 장기 휴전 협정을 체결할 권한을 위임했다.

처음에는 협상이 느릿하게 진행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5월 11일 자 편지에서 펨브로크 백작에게 최근 몇 년 동안 스코틀랜드인들이 저지른 수많은 습격과 범죄에 대해 불평했다. 그러다가 1323년 5월 말, 대표단은 평화 조약에 합의하지 않고, 1336년 6월 12일까지 최소 13년간 유효한 휴전 협정에 합의했다. 로버트 1세는 이번에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두 대표단은 요크의 비숍소프에 도착했고, 요크 대주교의 궁정에서 국왕과 특별히 소집된 내무부는 5월 30일에 장기 휴전을 인정했다.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 왕국과 평화 조약을 통해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받기 위해 추가 협상을 시도했다. 1324년 11월 18일, 그의 사절인 세인트앤드루스의 윌리엄 램버튼 주교와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는 요크에서 잉글랜드 대표단을 만났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 국왕이 스코틀랜드 왕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스코틀랜드가 요크까지 이르는 잉글랜드 북부의 대부분을 넘겨받을 것을 요구했으며,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 동부 에식스에 있는 그의 가문의 옛 영지를 돌려받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잉글랜드 측은 스코틀랜드의 전통적인 대관식에 사용되는 운명의 돌을 반환해야 했다. 그 대가로, 로버트 1세는 자기 딸 한 명과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인 에드워드 왕자 사이의 결혼 동맹을 프랑스 국왕과 교황이 지켜보는 가운데 체결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측은 그들의 주장이 지나치다고 여기고 거부했다.

1327년 1월, 에드워드 2세가 로저 모티머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에 의해 폐위되고 장남 에드워드 왕자가 에드워드 3세로서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대관식 날인 1327년 2월 1일, 스코틀랜드군이 노럼 성을 기습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1327년 4월, 로버트 1세는 얼스터로 가서 그곳을 장악하려 했지만, 현지인들의 외면으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327년 7월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그 사이, 로저 모티머는 스코틀랜드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을 벌이기로 하고, 웨어데일 전역을 단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