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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19 21:02:02

토머스 랜돌프(초대 모레이 백작)

파일:토머스 랜돌프.jpg
이름 토머스 랜돌프
Thomas Randolph
출생 1278년
스코틀랜드 왕국
사망 1332년 7월 20일 (향년 53~54세)
스코틀랜드 왕국 이스트로디언 머슬버러
아버지 토머스 랜돌프
어머니 로버트 1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누이
배우자 이사벨라 스튜어트
자녀 토머스 랜돌프, , 아그네스, 이사벨라
직위 초대 모레이 백작, 스코틀랜드의 수호자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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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로버트 1세의 심복으로서 잉글랜드군에 대적했다.

2. 생애

스코틀랜드 왕국의 법관이 록스버러의 보안관이었던 토머스 랜돌프와 로버트 1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누이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1306년 3월 외삼촌 로버트 1세가 스콘에서 대관식을 거행할 때 참석해 지지를 표명하고, 니츠데일 경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 해 6월 메스번 전투에 참여했지만 참패를 면치 못하고 생포되었고, 아담 드 고든 경과 제3대 링컨 백작 헨리 드 라시의 감시를 받았다. 나중에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로버트 1세를 토벌하기 위한 군대에 배속되었다.

1309년 에트릭 숲에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던 제임스 더글러스가 소규모의 잉글랜드군과 스코틀랜드 동맹군을 습격해 생포했따. 이들 중에는 토머스 랜돌프도 있었는데, 제임스 더글러스는 그의 신원을 확인한 뒤 곧장 로버트 1세에게 데려갔다. 이후 에드워드 2세는 토머스 랜돌프의 영지를 몰수한 뒤, 자신의 총신인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에게 수여했다.

1312년, 로버트 1세는 조카 토머스에게 모레이 백작이라는 작위를 내렸다. 그는 하이랜드의 광대한 영지의 통치자가 되었는데, 그 영토는 기존에 로우랜드에 보유했던 가문의 영지보다 훨씬 넓었다. 1313년, 토머스는 맨섬의 영주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이 시기에 로버트 1세가 가장 신뢰하는 군사 지휘관 중 한 명이 되었고, 대부분의 군사 작전에 동행했다. 1314년 3월 14일 절벽을 올라가는 비밀 경로를 통해 에든버러 성을 기습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전과를 거두면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1314년 6월 23일 ~ 6월 24일 배넉번 전투에서 쉴트론[1] 3개 중 하나를 이끌었고, 다른 2개는 각각 로버트 1세와 캐릭 백작이자 로버트 1세의 동생 에드워드 브루스가 이끌었다. 그는 이 전투에서 로버트 1세의 지휘하에 분전해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1315년 에드워드 브루스의 아일랜드 원정에 참여해 아일랜드 영지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그 해 9월 중순, 아일랜드에서 전리품을 실은 선박 5척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배 1척은 항해 도중 침몰했지만, 나머지 4척은 무사히 도착했고, 스코틀랜드 전사 500명을 태운 뒤 아일랜드로 돌아갔다. 다만 토머스는 스코틀랜드에 그대로 남았다.

1317년 1월 로버트 1세와 함께 아일랜드로 돌아온 토머스는 그 해 2월 로버트 1세, 에드워드 브루스, 돔날 막 브라이언 오닐과 함께 약탈 행진을ㅇ 시작했다. 그들은 미스의 슬레인을 불태운 뒤, 2월 23일 이전에 더블린 인근으로 진군하면서 진군로 주변에 있는 모든 마을을 약탈했다. 잉글랜드 수비대는 더블린 성벽 바깥의 건물들을 불태워서 적이 쓰지 못하게 했고, 얼스터 백작 리처드 드 버러는 더블린 성벽 뒤에서 버텼다. 그러나 얼마 후, 잉글랜드 당국은 리처드 드 버러가 로버트 1세의 장인이라서 로버트 1세와 내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해 체포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은 아일랜드에 들이닥친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 보급품을 제대로 마련할 수 없어서[2] 더블린 공방전을 벌일 수 없음을 인지하고, 더블린을 우회한 뒤 남서쪽으로 이동해 렌스터와 먼스터를 거쳐 4월 초에 리머릭에 도착했다. 에드먼드 버틀러가 이끄는 잉글랜드-아일랜드 연합군이 그들을 추격해 스코틀랜드군의 진군을 방해했지만, 전면전은 회피했고, 스코틀랜드-아일랜드 동맹군은 리머릭 성을 함락하지 못했다.

1317년 4월, 국왕의 부관을 맡은 로저 모티머가 지원군을 이끌고 아일랜드 남부에 상륙했다. 이후 로저 모티머는 에드먼드 버틀러와 합세한 뒤 반격하기 시작했고, 스코틀랜드군은 현지 주민들의 비협조로 곤경을 겪다가 얼스터로 철수했다. 스코틀랜드 측은 이 원정에서 길고 힘든 작전을 치르고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지만,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려 많은 손실을 입었다. 1317년 5월 22일, 로버트 1세와 토머스 랜돌프는 스코틀랜드로 귀환했다. 에드워드 브루스는 아일랜드에 남았지만, 더 이상 아일랜드 소왕 및 귀족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얼스터에서 지위를 유지하는 데 급급하다가 1318년 10월 포하트 전투에서 전사했다.

1319년 9월 7일, 에드워드 2세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베릭을 탈환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토머스와 제임스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은 베릭을 구원하기 위해 출진했다. 두 장성은 베릭을 포위한 잉글랜드 정규군과 직접 맞붙으면 승산이 적다고 판단하고, 그들이 포위를 저절로 풀도록 유도하고자 베릭을 우회한 뒤 요크셔로 진격했다. 1만에서 1만 5천 사이의 스코틀랜드군은 칼라일을 거쳐 컴벌랜드를 지난 뒤, 노섬벌랜드와 더럼을 거쳐 요크셔의 버러브릿지와 마이톤까지 행군하며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약탈했다.

1319년 9월 12일 마이톤 전투에서 요크 대주교 윌리엄 멜튼과 잉글랜드 왕실 대집사 존 호담이 급히 소집한 잉글랜드 민병대 10,000 ~ 20,000명을 격파했다. 랭커스터 백작은 마이톤 전투 소식을 접하자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 영지로 돌아갔고, 에드워드 2세는 9월 17일에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철수했다. 이후 제임스 더글러스와 토머스는 요크 성을 공격하지 않고 더 남쪽의 캐슬포드로 이동했다. 이곳은 랭커스터 백작의 가장 중요한 성 중 하나인 폰트프랙트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9월 14일, 그들은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한동안 이동했다가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에어 강 주변 지역과 워프 강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이후 페나인 산맥 서쪽 지역으로 진군해 그 지역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농작물을 불태우고 많은 가축을 사로잡았다. 그 후 스테인무어, 길슬랜드, 칼라일을 지난 뒤 스코틀랜드에 무사히 귀환했다.

1320년 스코틀랜드 영주들이 잉글랜드 국왕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 내용의 아브로스 선언을 채택한 후, 토머스는 교황 요한 22세에게 스코틀랜드를 독립 왕국으로 인정해 달라고 설득하기 위한 사절단의 대표로서 아비뇽으로 향했다. 1324년, 토머스는 아비뇽에 두 번째로 찾아갔다. 그는 이 회담에서 교황 요한 22세를 설득해 로버트 1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하게 했다. 그 해 11월 18일, 토머스는 새인트앤드루스의 윌리엄 램버튼 주교와 함께 요크에서 잉글랜드 사절단을 만났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 국왕이 스코틀랜드 왕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스코틀랜드가 요크까지 이르는 잉글랜드 북부의 대부분을 넘겨받을 것을 요구했으며,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 동부 에식스에 있는 그의 가문의 옛 영지를 돌려받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잉글랜드 측은 스코틀랜드의 전통적인 대관식에 사용되는 운명의 돌을 반환해야 했다. 그 대가로, 로버트 1세는 자기 딸 한 명과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인 에드워드 왕자 사이의 결혼 동맹을 프랑스 국왕과 교황이 지켜보는 가운데 체결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측은 그들의 주장이 지나치다고 여기고 거부했다.

1325년, 교황은 토머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평화를 이루려는 노력에 대한 자신의 희망과 신념을 밝혔으며,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묘 교회를 방문하는 걸 허락했다. 같은 해, 토머스는 스콭르랜드 대표단을 이끌고 프랑스로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샤를 4세를 설득해 잉글랜드에 대항하여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을 갱신하는 코르베유 조약에 서명하도록 했다. 1327년 7~8월 웨어데일 전역에서 제임스 더글러스, 돔놀 2세와 함께 스코틀랜드군을 지휘해 에드워드 3세로저 모티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의 공세를 물리쳤다. 결국 잉글랜드 왕국은 스코틀랜드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접고 1328년 스코틀랜드 왕국의 독립을 인정하는 노샘프턴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1329년 6월 7일, 로버트 1세가 사망했다. 이때 로버트 1세는 당시 5살이었던 아들 데이비드 2세의 후견인이자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로 토머스를 지명했다. 그 후 어린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던 토머스는 1332년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쳐들어온 잉글랜드 귀족들을 물리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지만, 7월 20일 머슬버러에서 급사했다. 세간에서는 그가 잉글랜드인들의 사주로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학자들은 기록에 전해지는 그의 증세를 볼 때 요로결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 뒤를 이어 돔놀 2세가 스코틀랜드 수호자를 맡았지만 1332년 8월 11일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패사했고, 스코틀랜드 왕국은 또 다시 잉글랜드와의 전쟁에 휘말렸다.

3. 가족



[1] Shiltron: 최전방에 창병이 있는 조밀한 원형 대형.[2] 당시 아일랜드를 포함한 유럽 대부분 지역이 소빙하기로 인해 기근에 시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