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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5 22:55:11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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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최악의 영국인 10명'을 선정. 다만 현직 정치인은 제외되었다.
1위2위3위4위5위
잭 더 리퍼 토머스 베켓 에아드릭 스트레오나 존 왕 리처드 리치
6위7위8위9위10위
타이터스 오츠 윌리엄 오거스터스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 토머스 애런들 오스왈드 모슬리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위대한 영국인 }}}}}}}}}
성명 휴 르 디스펜서
Hugh le Despenser
생몰년도 1288년 ~ 1326년 11월 24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디스펜서 남작령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헤리퍼드
아버지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
어머니 이사벨라 드 뷰챔프
형제 앨렌, 이사벨라, 필립, 마거릿, 엘리자베스
아내 엘레노어 드 클레어
자녀 휴, 에드워드, 이사벨라, 조앤, 길버트,. 존, 엘레노어, 마거릿, 엘리자베스
직위 디스펜서 남작, 글래모건의 영주, 잉글랜드 수석 시종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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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아버지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와 함께 에드워드 2세의 총신으로서 강력한 권세를 누렸지만, 에드워드 3세를 앞세운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와 로저 모티머의 정변으로 몰락했다.

2. 생애

1288년경 제2대 디스펜서 남작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와 제9대 워릭 백작 윌리엄 드 뷰챔프의 딸 이사벨라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앨렌[1], 이사벨라[2], 필립[3], 마거릿[4], 엘리자베스[5]가 있었다.

1306년 5월 22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젊은 귀족 267명과 함께 에드워드 왕자에게 기사 작위를 받았다. 같은 해 제7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의 딸이자 제8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의 누이이며,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외손녀인 엘레노어 드 클레어와 결혼했다. 1309년 5월 14일, 에드워드 2세로부터 이전에는 성전 기사단이 소유했던 노퍽주 서튼의 토지와 연금 200 파운드를 받았다. 1310년, 어ㅏ버지로부터 캠브리지셔, 서퍽, 에식스의 여러 영지를 받았는데, 이는 할머니 알리나 바셋의 상속 재산이었다.

1313년 여름, 프랑스로 여행을 떠난 에드워드 2세와 동행했으며, 아직 미성년자였던 윌리엄 헌팅필드의 후견인을 맡았다. 1314년 제8대 글로스터 백작이자 처남인 길버트 드 클레어가 배넉번 전투에서 자식을 두지 못한채 사망했다. 엘리노어, 마거릿, 엘리자베스라는 세 누이가 있었다. 당시 길버트가 사망했을 당시 그의 수입은 연간 6,000 파운드였는데, 이는 간 수입이 8,000파운드였던 랭커스터 백작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수입이었다. 길버트의 미망인인 마틸다가 아이를 임신했다고 발표하면서 재산 분할이 미뤄졌지만, 1316년 임신한 게 사실이 아니라는 게 밝혀지면서 기각되었고, 1317년 세 누이와 그들의 남편 사이에 재산이 분배되었다. 길버트는 클레어 가문 상속 영지의 1/3을 확보했고, 매년 1,500 파운드의 연금을 받게 되었으며, 글래모건의 영주 칭호를 사용했다.

1318년 에드워드 2세의 수석 시종이 된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는 1316년 글래모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된 뒤 런던 탑에 수감되었던 허웰린 압 그루퍼드를 왕에게 인도받은 뒤 재판도 없이 처형한 후 허웰린의 영지를 몰수했다. 그 후 사우스 웨일스에서 자신의 영지를 확대하는 데 골몰하면서 다른 영주들의 영지에 눈독들였다. 초대 오들리 남작 휴 오들리가 그윈루그를 공식적으로 차지하기 전에, 그는 그곳의 귀족들을 매수해 자기를 지지하도록 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그윈루그를 휴에게 넘겨줬고, 오들리는 좀더 규모가 작은 영지로 만족해야 했다. 여기에 제2대 기퍼드 남작 존 기퍼드가 받을 예정이었던 드라이슬윈 성에서도 비슷한 공작을 벌여 자기 것으로 삼았다. 이에 웨일스 변경 지대의 영주들은 휴에게 강한 반감을 품었다.

휴는 수석 시종으로서 왕과 언제든지 직접 접촉할 수 있었고, 다른 영주들, 심지어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 조차도 왕에게 접근하기 어려워졌다.. 한 연대기 작가는 에드워드 2세가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를 몸과 영혼을 다해 사랑했다고 기록했다. 휴가 왕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증거는 전혀 없지만, 두 사람이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는 건 분명하다. 이렇듯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그에 대한 대귀족들의 반감은 갈수록 심해졌고,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 역시 그가 왕을 좌지우지하고 왕과 자신의 사이를 이간질한다고 여겨 반감을 품었다.

1320년, 고워의 영주 윌리엄 7세 드 브라우즈는 자기 작위를 사위인 존 드 모브레이에게 팔기로 했다. 이때,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는 왕에게 존 드 모브레이 대신 자신에게 고워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고워를 몰수한 뒤 휴에게 수여했다. 이 조치는 대다수 웨일스 변경지대 영주의 분노를 촉발했고, 휴를 타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제3대 위그모어 남작 로저 모티머, 제4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 휴 오들리가 동맹을 맺었고,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그들을 후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321년 5월, 로저 모티머와 험프리 드 보훈 등이 이끄는 웨일스 반군이 떨쳐 일어나 디스펜서 가문의 땅으로 쳐들어가서 뉴포트, 카디프, 케어필리를 점령하고, 글로스터셔와 글래모건 영지를 황폐화했다. 그 후 모티머 등은 폰트프랙트 성에서 토머스와 만났고, 토머스는 동지들의 땅을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했다. 6월28일 셔브룬인엘멧에서 열린 회의에서, 반란 귀족들은 디스펜서 가문의 영지를 몰수할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로저 모티머는 분견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이동하면서, 장병들에게 왕의 권위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고자 왕실 문장이 있는 녹색 유니폼을 입도록 했다. 7월 말, 모티머는 런던 탑을 포위했고, 8월 1일에는 토머스와 다른 영주들이 합류했다. 반군은 왕에게 디스펜서 부자 등 총신들을 추방하라고 요구하면서,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에드워드 2세를 더는 따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옹립하겠다고 선언했다.

에드워드 2세는 디스펜서 부자를 해임하길 거부하면서,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에게 저들과 협상하라고 지시했다. 펨브로크 백작은 이자벨 왕비를 중재자로 모셨고, 왕비는 반란 귀족들의 의견을 접수한 뒤 왕에게 나아가 무릎 꿇고 나라의 안정과 국민의 이익을 위해 총신들을 추방해달라고 간청했다. 에드워드 2세는 이에 마음이 흔들렸고, 일단 반군 귀족들과 휴전을 맺고 협상을 좀더 이어가기로 했다. 결국 아버지 휴는 1321년 8월 14일에 추방되어 보르도로 피신했고, 그의 아들 휴는 도버 해협에서 해적 행위를 저질렀다. 1321년 12월 1일, 에드워드 2세는 랭커스터 백작과 대적하기로 결심하고 그들을 잉글랜드로 불러들였다.

1322년 초, 에드워드 2세는 반군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고, 디스펜서 가문은 3월 초 사병대를 이끌고 왕실군에 합류했다.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그 해 3월 16일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패배하고 생포된 뒤 반역죄를 선고받고 참수형에 처해졌다. 반란에 가담한 인사들은 모조리 처형되거나 런던 탑에 감금되었고, 그들의 영지는 모두 몰수되어 디스펜서 가문에 분배되었다. 이리하여 디스펜서 가문의 권력과 부는 정점에 이르렀다. 아버지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는 윈체스터 백작으로 선임되었고, 아들과 함께 왕실을 장악했다.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는 궁정에 참여하는 충성파의 연락망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정부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디스펜서 부자는 막강한 권력을 활용해 영주들로부터 영지를 꾸준히 갈취했다.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미망인인 앨리스 드 라시는 왕에게 자기 재산을 헌납하도록 강요받았고, 제2대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의 미망인 마리 드 샤티용생폴은 디스펜서 가문으로부터 헐값에 영지를 팔라는 압력을 받았으며, 반란에 가담했다가 처형된 로저 다모리의 미망인 엘리자베스 드 클레어는 우스크에 있던 재산을 고워의 재산과 교환하도록 강요당했다. 이후 윌리엄 드 브라우즈가 엘리자베스 드 클레어를 설득해 고워를 돌려받았지만,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가 개입해 고워를 빼앗고 아들에게 넘겼다. 이후에도 디스펜서 부자는 체프스토, 에버게이브니, 실게란, 펨브로크셔 전체를 인수했다. 이제 그들의 영지는 와이 강에서 테이피 강까지 걸친 사우스 웨일스 일대를 거의 석권했으며, 아들 디스펜서는 7,000 파운드에 달하는 연금을 받았다.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는 자신의 부를 케어필리 성을 확장하고 조상들이 묻힌 튜크스베러 수도원을 장식하는 데 사용했다. 튜크스베리 수도원에는 그의 아내와 아들이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있었는데, 이 창문은 제5대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 피츠해먼과 제4대 하트퍼드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6]도 표현했다. 또한 합창대 창문에는 디스펜서 가문 인사들이 천국에 도착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1323년 여름, 생사르도 요새를 둘러싸고 잉글랜드-프랑스 간의 갈등이 벌어졌다. 이에 프랑스 국왕 샤를 4세는 잉글랜드 왕실의 프랑스 영지인 아키텐과 퐁티외를 몰수하겠다고 발표했고, 1324년 여름에 군대를 동원해 아키텐과 퐁티외를 침공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가 평화를 간청하자, 샤를 4세는 그해 성탄절 직후에 협상을 하고 싶으니 에드워드 2세의 왕비이자 자신의 누이인 이자벨과 에드워드 왕자를 프랑스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잉글랜드 왕실은 미래의 왕위 계승자를 프랑스에 보냈다가 인질이 될 것을 우려해 섣불리 보내지 않기로 하고, 그 대신 이자벨 왕비가 파리로 가서 평화 조약의 조건을 협상했다. 샤를 4세는 아키텐 공작이자 퐁티외와 몽트뢰유 백작인 에드워드 왕자가 자신에게 경의를 표한다면, 영지를 그대로 가지도록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이자벨 왕비는 무기력한 남편 에드워드 2세에게 불만을 품었고, 휴 디스펜서 부자가 자기 남편을 좌지우지하는 데다 자기 영지까지 눈독 들이는 것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에게 돌아가기 위해 서두르지 않았고 파리에 거주했다. 에드워드 2세는 아내의 심기를 눈치채고 아들을 섣불리 보냈다가는 디스펜서 부자를 제거하려는 아내의 원정에 내세워질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프랑스 왕실의 압력이 갈수록 강해지고, 아버지 휴 디스펜서도 샤를 4세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게 좋겠다고 설득하자, 결국 에드워드 2세는 아들을 보내기로 했다. 1325년 9월 10일, 에드워드 2세가 아키텐과 퐁티외를 에드워드 왕자에게 양도하는 내용의 문서가 작성되었다. 이후 휴 디스펜서의 동맹자였던 엑서터의 주교 월터 스테이플던, 왕실 특사인 존 쇼어디치와 글로서트의 리처드, 그리고 에드워드 왕자의 멘토인 헨리 드 보몽, 윌리엄 몬터규가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프랑스로 가기로 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9월 12일 도버에서 출항했고 9월 22일 파리에 도착해 어머니와 합류했다.

1325년 9월 24일, 에드워드 왕자는 뱅센에서 많은 고위 성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적으로 아키텐 공작이자 퐁티외와 몽트뢰유 백작으로서 샤를 4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후 에드워드의 수행원들은 지체 없이 잉글랜드로 돌아갔지만, 이자벨은 아들과 함께 프랑스에 남았다. . 잉글랜드 왕실은 이자벨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에게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잉글랜드로 돌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이자벨은 남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휴 디스펜서를 타도할 때까지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이자벨은 1325~1326년 겨울에 런던 탑에서 탈출하여 프랑스로 망명한 후 반 휴 디스펜서 진영을 이끌었던 로저 모티머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

1326년 1월, 에드워드 2세는 디스펜서 부자의 설득에 따라 에드워드 왕자의 모든 재산을 왕실에 이전하라고 명령했고, 2월에 잉글랜드에 도착하는 대로 이자벨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를 즉시 체포할 것이며, 그들을 따르는 해외 망명자들을 왕실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해 3월엔 자신을 아키텐과 퐁티외의 행정관이자 총독으로 선포하여 이자벨이 아들을 내세워 반기를 일으킬 권력을 박탈하려 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오히려 샤를 4세가 프랑스군을 동원해 아키텐을 다시 침공하는 빌미만 제공했다. 1326년 6월, 에드워드 2세는 프랑스 국왕, 남작, 주교들에게 이자벨 왕비의 귀환을 촉구해달라는 절박한 호소를 보냈지만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했다. 그해 7월, 에드워드 2세는 아키텐 침략에 보복하기 위해 잉글랜드 왕국에 있는 모든 프랑스인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샤를 4세는 이에 대응해 프랑스에 있는 모든 잉글랜드인을 구금하고 그들의 물품을 압수하라고 명령했다.

1326년 여름, 에드워드 2세는 이자벨이 군대를 일으켜 잉글랜드 해안에 상륙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방비에 나섰다. 그는 교회 주교들더러 관할 주교구에 있는 신민들에게 충성을 촉구하게 했으며, 왕국의 거물들에게 각 카운티를 잘 지키게 했다. 그리고 본인은 웨일스로 가서 모병했으며, 이자벨의 군대가 브리스톨에 상륙할 것이라고 에상하고, 딘의 포레스트에 정찰병을 배치했다. 9월 23일, 이자벨, 모티머, 에드워드 왕자와 그들의 추종자들은 도르드레흐트에서 출항했다. 그들은 에드워드 2세의 예상과는 달리 브리스톨이 아니라 이스트 앵글리아의 오웰호 어귀에 상륙했다. 이자벨은 상륙한 직후 잉글랜드 왕국의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에게 서신을 잇따라 보내 왕국의 이익을 위해 자신과 함께할 것을 촉구했으며, 런던 당국과 서신을 교환했다.

노퍽 백작과 여러 주교들은 재빨리 이자벨 편에 섰고, 이자벨의 군대가 던스터블에 도착했을 때 제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가 합류했다. 켄터베리 대주교 레이놀즈는 9월 30일 런던에서 이자벨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를 파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런던 시민들이 격분해 봉기를 일으켰고, 에드워드 2세, 레이놀즈, 그리고 휴 디스펜서 부자는 10월 2일에 런던에서 도주했다. 그 후 아버지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는 에드먼드 피츠앨런과 함께 브리스톨에서 병력을 소집해 반란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이내 포위된 뒤 수비대가 저항하기를 거부하자 10월 26일에 항복했고, 약식 재판 후 처형되었다.

한편,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는 에드워드 2세와 함께 런던을 떠나 서쪽으로 달아나서 웨일스에서 영주들의 지원을 받고 반격하려 했다. 그러다가 카디프에서 아버지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그곳을 떠나 케어필리에 며칠간 머물었다. 이후 영주들이 전혀 호응해주지 않자,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의 아들 휴가 케어필리 성을 맡기로 한 뒤 프랑스로 망명하려 했다. 그러나 11월 16일 레스터 백작 헨리에 의해 란트리산트에서 에드워드 2세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 후 헤리퍼드로 끌려간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는 감옥에서 굶어 죽으려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11월 24일 약식 재판을 받고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공개적으로 고문을 당한 뒤, 처형장까지 장애물을 통해 끌려갔다. 그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가 질식사하기 전에 끌어내려진 뒤, 산 채로 사지가 절단되었고, 최종적으로 목이 잘리기 전에 내장이 뽑혔다. 그의 머리는 얼마 후 런던에 전시되었고, 그의 시신은 4조각으로 잘려 브리스톨, 도버, 요크, 뉴캐슬어폰타인으로 보내졌다. 그의 가신인 레딩의 사이먼도 이자벨 왕비를 모욕한 혐의로 그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1330년 12월, 휴의 미망인은 에드워드 3세로부터 남편의 유해를 모아 튜크스베리 수도원에 묻는 걸 허락받았지만, 그녀는 두개골과 대퇴골, 척추 몇 개만 확보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3. 가족



[1] 1287 ~ 1353, 초대 버넬 남작 에드워드 버넬의 부인[2] 1290 ~ 1334, 토몬드의 영주 길버트 드 클레어와 초혼, 초대 헤이스팅스 남작 존 헤이스팅스와 재혼, 초대 몬테르머 남작 랄프 드 몬테르머와 삼혼.[3] 1292 ~ 1313, 슈롭셔, 요크셔, 에식스, 링컨셔의 여성 영주 마거릿 고실의 남편.[4] 1296 ~ ?, 초대 세인트 아망 남작 존 세인트 아망의 부인.[5] 1300 ~ ?, 초대 카모이스 남작 랄프 드 카모이스의 부인.[6] 두 사람 모두 디스펜서 가문 이전에 글로스터의 영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