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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5 22:55:38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

성명 휴 르 디스펜서
Hugh le Despenser
생몰년도 1261년 3월 1일 ~ 1326년 10월 27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디스펜서 남작령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브리스톨 성
아버지 휴 르 디스펜서
어머니 알리나 바셋
누이 엘리노어, 조안, 앤
아내 이사벨라 드 뷰챔프
자녀 앨렌, , 이사벨라, 필립, 마거릿, 엘리자베스
직위 제2대 디스펜서 남작, 초대 윈체스터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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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아들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와 함께 에드워드 2세의 총신으로서 강력한 권세를 누렸지만, 에드워드 3세를 앞세운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와 로저 모티머의 정변으로 몰락했다.

2. 생애

1261년 3월 1일, 초대 디스펜서 남작 휴 르 디스펜서와 어퍼 위컴 남작이자 대법원장이며 4개 주 보안관을 역임한 필립 바셋의 딸인 알리나 바셋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엘리노어[1], 조안[2], 앤[3]이 있었다. 아버지 휴 르 디스펜서는 시몽 드 몽포르의 동지로, 제2차 남작 전쟁에서 왕실과 맞서다가 1265년 8월 14일 이브샴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 필립 바셋이 딸 알리나와 외손자 휴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ㄷ 모든 영향력을 행사했고, 디스펜서 가문의 영지가 몰수되지 않고 외손자에게 넘어가도록 했다.

그 후 성인이 될 때까지 왕실의 후견을 받은 휴는 1281년 5월 성인이 되면서 아버지의 재산을 되찾았고, 1281년 8월 어머니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1283년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원정에 참여해, 에드워드 1세의 사촌인 콘월의 에드먼드의 지휘를 받았다. 1286년 왕의 허락 없이 제9대 워릭 백작 윌리엄 드 뷰챔프의 딸 이사벨라와 결혼했다가, 이로 인해 왕에게 2,000마크의 벌금을 납부해야 했다. 1287년 에드워드 1세와 함께 가스코뉴로 갔고, 1294년 6월 오디햄 성주로 선임되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독일왕 아돌프와 베스터부르크 대주교 지크프리트에게 파견된 잉글랜드 사절단의 대표를 맡았다.

1294년 말, 프랑스와의 전쟁이 막 발발한 가스코뉴로 돌아와서 전투에 참여했고, 이듬해 의회에서 에드워드 1세에 의해 디스펜서 남작으로 선임되었다. 1296년 4월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해 던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1296~1297년 겨울 동안 플란데런 백작 기드 담피에르에게 파견되어 그와 함께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1297년 2월 5일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트렌트 강 남쪽의 삼림 관리인과 왕립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300년 여름, 스코틀랜드에서 새로운 군사 작전을 수행한 에드워드 1세를 수행한 귀족 중 한 명이었다.

1300년 11월, 제3대 링컨 백작 헨리 드 라시와 함께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게 파견된 잉글랜드 사절단의 대표를 맡았으며, 1302년 4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궁정으로 가서 가스코뉴서의 평화 협정을 체결해 적대 행위를 종식했다. 1305년 10월 교황 클레멘스 5세예루살렘에서의 프랑스-잉글랜드 십자군 합동 원정에 관해 논의하기 위해 리옹으로 파견되었다. 여기에 1303년, 1304년, 1306년에 스코틀랜드로 가서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에드워드 1세는 이렇듯 많은 일을 한 그에게 보상으로 1296년 커틀링턴을 수여했고, 1301년에는 옥스퍼드셔의 여러 영지를 줬다. 또한 휴는 1306년 장남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를 에드워드 1세의 손녀 중 한 명인 엘리노어의 클레어와 결혼시키면서, 잉글랜드 왕실과 좀더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1307년 7월, 에드워드 1세가 사망했다. 1308년 2월 25일 새 국왕 에드워드 2세대관식이 거행되었을 때, 휴는 왕실 휘장의 일부를 착용했다. 1308년 3월 트렌트 강 남쪽의 삼림 관리인을 인정받아, 평생 동안 그 직위를 역임했다. 한편, 그는 왕의 총애를 받지만 대귀족들의 미움을 산 피어스 개버스턴을 옹호한 몇 안 되는 귀족이었다. 이 때문에 귀족들은 1309년 8월 노샘프턴 의회에서 개버스턴을 추방할 때 그가 궁정에 참여하는 걸 막았다. 하지만 디스펜서는 곧 왕의 부름을 받고 궁정에 복귀했다.

1312년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등이 망명에서 돌아온 피어스 개버스턴을 참수하자, 휴는 왕의 허락 없이 피어스를 살해한 것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을 규합해 토머스를 견제했다. 1313년 5월 에드워드 2세와 함께 프랑스로 가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로부터 자기 두 아들이 기사 작위를 받는 걸 지켜봤다. 1313년 12월, 가스코뉴에 관한 협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몽트뢰유에서 프랑스 국왕을 다시 만났다. 이렇듯 에드워드 2세의 굳건한 신임을 받았지만, 1314년 6월 배넉번 전투에서 에드워드 2세가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에게 참패해 위신이 실추되고 랭커스터 백작이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하자, 자기 영지에 은거했다.

1316년 봄, 랭커스터 백작이 연이은 실정을 저질러서 위신이 실추되자, 휴는 궁정으로 복귀하여 에드워드 2세의 수석 고문이 되었다. 그 후 1317년 아들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와 함께 에드워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으며, 1318년 아들 휴가 에드워드 2세의 시종으로 임명되어 언제든지 왕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굳건한 총애를 얻게 되자, 이를 발판 삼아 영지와 재산을 대거 늘렸다. 1320년, 초대 베틀스미어 남작 바스톨로뮤 드 베틀스미어와 함께 가스코뉴로 파견되어 그곳의 행정을 감독했으며, 몇 달 후 아미앵으로 가서 에드워드 2세가 프랑스의 신임 국왕 필리프 5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디스펜서 가문이 이렇듯 에드워드 2세의 총애를 받으며 급격하게 부상하자, 영주들은 강한 불만을 품었다. 특히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가 배넉번 전투에서 전사한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 상속녀의 남편으로서, 자기가 길버트 상속 재산을 더 많이 상속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글로스터 백작령이 포함된 웨일스 변경지대의 영주들이 격분했다.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이 때를 틈타 제3대 위그모어 남작 로저 모티머, 제4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 등을 회유해, 디스펜서 가문의 영지를 공격하도록 사주했다.

1321년 5월, 로저 모티머 등이 이끄는 영주들이 디스펜서 전쟁을 시작했다. 그들은 디스펜서 가문의 땅으로 쳐들어가서 뉴포트, 카디프, 케어필리를 점령하고, 글로스터셔와 글래모건 영지를 황폐화했다. 그 후 모티머 등은 폰트프랙트 성에서 토머스와 만났고, 토머스는 동지들의 땅을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했다. 6월28일 셔브룬인엘멧에서 열린 회의에서, 반란 귀족들은 디스펜서 가문의 영지를 몰수할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로저 모티머는 분견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이동하면서, 장병들에게 왕의 권위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고자 왕실 문장이 있는 녹색 유니폼을 입도록 했다. 7월 말, 모티머는 런던 탑을 포위했고, 8월 1일에는 토머스와 다른 영주들이 합류했다. 반군은 왕에게 디스펜서 부자 등 총신들을 추방하라고 요구하면서,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에드워드 2세를 더는 따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옹립하겠다고 선언했다.

에드워드 2세는 디스펜서 부자를 해임하길 거부하면서,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에게 저들과 협상하라고 지시했다. 펨브로크 백작은 이자벨 왕비를 중재자로 모셨고, 왕비는 반란 귀족들의 의견을 접수한 뒤 왕에게 나아가 무릎 꿇고 나라의 안정과 국민의 이익을 위해 총신들을 추방해달라고 간청했다. 에드워드 2세는 이에 마음이 흔들렸고, 일단 반군 귀족들과 휴전을 맺고 협상을 좀더 이어가기로 했다. 결국 아버지 휴는 1321년 8월 14일에 추방되어 보르도로 피신했고, 그의 아들 휴는 도버 해협에서 해적 행위를 저질렀다. 1321년 12월 1일, 에드워드 2세는 랭커스터 백작과 대적하기로 결심하고 그들을 잉글랜드로 불러들였다.

1322년 초, 에드워드 2세는 반군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고, 디스펜서 가문은 3월 초 사병대를 이끌고 왕실군에 합류했다.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그 해 3월 16일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패배하고 생포된 뒤 반역죄를 선고받고 참수형에 처해졌다. 반란에 가담한 인사들은 모조리 처형되거나 런던 탑에 감금되었고, 그들의 영지는 모두 몰수되어 디스펜서 가문에 분배되었다. 이때 아버지 휴는 덴비와 브림프스필드를 받았다. 1322년 5월 10일, 에드워드 2세는 아버지 휴를 윈체스터 백작으로 선임되었다.

1323년 여름, 생사르도 요새를 둘러싸고 잉글랜드-프랑스 간의 갈등이 벌어졌다. 이에 프랑스 국왕 샤를 4세는 잉글랜드 왕실의 프랑스 영지인 아키텐과 퐁티외를 몰수하겠다고 발표했고, 1324년 여름에 군대를 동원해 아키텐과 퐁티외를 침공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가 평화를 간청하자, 샤를 4세는 그해 성탄절 직후에 협상을 하고 싶으니 에드워드 2세의 왕비이자 자신의 누이인 이자벨과 에드워드 왕자를 프랑스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잉글랜드 왕실은 미래의 왕위 계승자를 프랑스에 보냈다가 인질이 될 것을 우려해 섣불리 보내지 않기로 하고, 그 대신 이자벨 왕비가 파리로 가서 평화 조약의 조건을 협상했다. 샤를 4세는 아키텐 공작이자 퐁티외와 몽트뢰유 백작인 에드워드 왕자가 자신에게 경의를 표한다면, 영지를 그대로 가지도록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이자벨 왕비는 무기력한 남편 에드워드 2세에게 불만을 품었고, 휴 디스펜서 부자가 자기 남편을 좌지우지하는 데다 자기 영지까지 눈독 들이는 것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에게 돌아가기 위해 서두르지 않았고 파리에 거주했다. 에드워드 2세는 아내의 심기를 눈치채고 아들을 섣불리 보냈다가는 디스펜서 부자를 제거하려는 아내의 원정에 내세워질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프랑스 왕실의 압력이 갈수록 강해지고, 아버지 휴 디스펜서도 샤를 4세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게 좋겠다고 설득하자, 결국 에드워드 2세는 아들을 보내기로 했다. 1325년 9월 10일, 에드워드 2세가 아키텐과 퐁티외를 에드워드 왕자에게 양도하는 내용의 문서가 작성되었다. 이후 휴 디스펜서의 동맹자였던 엑서터의 주교 월터 스테이플던, 왕실 특사인 존 쇼어디치와 글로서트의 리처드, 그리고 에드워드 왕자의 멘토인 헨리 드 보몽, 윌리엄 몬터규가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프랑스로 가기로 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9월 12일 도버에서 출항했고 9월 22일 파리에 도착해 어머니와 합류했다.

1325년 9월 24일, 에드워드 왕자는 뱅센에서 많은 고위 성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적으로 아키텐 공작이자 퐁티외와 몽트뢰유 백작으로서 샤를 4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후 에드워드의 수행원들은 지체 없이 잉글랜드로 돌아갔지만, 이자벨은 아들과 함께 프랑스에 남았다. . 잉글랜드 왕실은 이자벨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에게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잉글랜드로 돌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이자벨은 남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휴 디스펜서를 타도할 때까지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이자벨은 1325~1326년 겨울에 런던 탑에서 탈출하여 프랑스로 망명한 후 반 휴 디스펜서 진영을 이끌었던 로저 모티머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

1326년 1월, 에드워드 2세는 디스펜서 부자의 설득에 따라 에드워드 왕자의 모든 재산을 왕실에 이전하라고 명령했고, 2월에 잉글랜드에 도착하는 대로 이자벨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를 즉시 체포할 것이며, 그들을 따르는 해외 망명자들을 왕실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해 3월엔 자신을 아키텐과 퐁티외의 행정관이자 총독으로 선포하여 이자벨이 아들을 내세워 반기를 일으킬 권력을 박탈하려 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오히려 샤를 4세가 프랑스군을 동원해 아키텐을 다시 침공하는 빌미만 제공했다. 1326년 6월, 에드워드 2세는 프랑스 국왕, 남작, 주교들에게 이자벨 왕비의 귀환을 촉구해달라는 절박한 호소를 보냈지만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했다. 그해 7월, 에드워드 2세는 아키텐 침략에 보복하기 위해 잉글랜드 왕국에 있는 모든 프랑스인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샤를 4세는 이에 대응해 프랑스에 있는 모든 잉글랜드인을 구금하고 그들의 물품을 압수하라고 명령했다.

1326년 여름, 에드워드 2세는 이자벨이 군대를 일으켜 잉글랜드 해안에 상륙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방비에 나섰다. 그는 교회 주교들더러 관할 주교구에 있는 신민들에게 충성을 촉구하게 했으며, 왕국의 거물들에게 각 카운티를 잘 지키게 했다. 그리고 본인은 웨일스로 가서 모병했으며, 이자벨의 군대가 브리스톨에 상륙할 것이라고 에상하고, 딘의 포레스트에 정찰병을 배치했다. 9월 23일, 이자벨, 모티머, 에드워드 왕자와 그들의 추종자들은 도르드레흐트에서 출항했다. 그들은 에드워드 2세의 예상과는 달리 브리스톨이 아니라 이스트 앵글리아의 오웰호 어귀에 상륙했다. 이자벨은 상륙한 직후 잉글랜드 왕국의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에게 서신을 잇따라 보내 왕국의 이익을 위해 자신과 함께할 것을 촉구했으며, 런던 당국과 서신을 교환했다.

노퍽 백작과 여러 주교들은 재빨리 이자벨 편에 섰고, 이자벨의 군대가 던스터블에 도착했을 때 제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가 합류했다. 켄터베리 대주교 레이놀즈는 9월 30일 런던에서 이자벨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를 파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런던 시민들이 격분해 봉기를 일으켰고, 에드워드 2세, 레이놀즈, 그리고 휴 디스펜서 부자는 10월 2일에 런던에서 도주했다. 그 후 에드먼드 피츠앨런과 함께 브리스톨에서 병력을 소집해 반란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이내 포위된 뒤 수비대가 저항하기를 거부하자, 결국 10월 26일에 항복했다.

파일:프랑스의 이자벨과 아룬델 백작, 휴 르 디스펜서 더 앨더.jpg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 앞에 무릎 꿇은 에드먼드 피츠앨런과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 장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삽입된 그림.

다음날 이자벨의 진영에 끌려간 그는 레스터 백작 헨리, 노퍽 백작 브라더턴의 토머스, 켄트 백작 우드스톡의 에드먼드 등 여러 귀족들의 심판을 받았다. 그는 아들의 불법 행위를 독려한 혐의, 다른 사람을 희생하여 자신을 부유하게 한 혐의, 교회를 약탈한 혐의, 1322년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를 처형한 혐의 등을 적용받아 사형을 선고받고, 갑옷을 입은 채 브리스톨 성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뒤 사지가 절단되었다. 그의 머리는 윈체스터로 보내졌고, 시체는 개들에게 던져졌다. 아들 휴 디스펜서도 몇 주 뒤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

3. 가족



[1] ? ~ 1328, 오케햄턴 기사 휴 드 코트니의 아내.[2] 초대 퍼니월 남작 토머스 드 퍼니월의 아내[3] 그로비 기사 윌리엄 드 페러스의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