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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1 19:55:57

랄프 드 몬테르머

파일:랄프 드 몬테르머.jpg
성명 랄프 드 몬테르머
Ralph de Monthermer
생몰년도 미상 ~ 1325년 4월 5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더럼 주교구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런던
배우자 아크레의 조앤, 이사벨라 르 디스펜서
자녀 메리, 조앤, 토머스, 에드워드
직위 글로스터와 하트퍼드의 백작, 애솔 백작, 초대 몬테르머 남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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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참여했다.

2. 생애

평민 출신이며, 부모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더럼 주교구 출신이라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클레어 가문의 궁정에서 일하는 시종으로 언급되었다. 1295년 제7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가 사망한 후, 길버트의 미망인이자 에드워드 1세의 딸인 아크레의 조앤은 랄프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아버지를 설득해 랄프를 기사로 삼도록 했고, 에드워드 1세의 시종을 맡도록 주선했다. 1297년 1월, 조앤은 랄프와 비밀리에 결혼했다.

그 후 에드워드 1세가 조앤을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5세와 재혼시키려 했을 때, 그녀는 자기가 이미 랄프와 결혼했다고 고백했다. 이에 분노한 에드워드 1세는 랄프를 브리스톨 성에 투옥했다. 이에 조앤은
"위대한 백작이 가난하고 천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불명예스럽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백작부인이 용감한 청년을 사모하고 존경하도록 장려하는 것 역시 비난받을 만한 일도 아니고 너무 어려운 일도 아니다"
라고 주장했다. 그 후 딸이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된 에드워드 1세는 결국 몬테르머를 1297년 8월에 석방하기로 했고, 몬테르머는 왕에게 경의를 표한 뒤 조앤의 남편 자격으로 글로스터 백작과 하트퍼드 백작의 작위를 받았다.

랄프는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298년 7월 폴커크 전투에 참전해 에드워드 1세가 윌리엄 월레스를 격파하는 데 일조했으며, 1300년 칼라버록 공방전과 1301년, 1303년, 1304년, 1306년 스코틀랜드 원정에 잇달아 참여했다. 에드워드 1세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고 스트라스보기의 존으로부터 몰수한 스코틀랜드의 아솔 백작 작위와 애넌데일 영지를 수여했다. 1306년, 랄프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자 중 한 명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잉글랜드에 반기를 든 로버트 1세에 의해 에어 성에서 포위되었지만, 구원군이 올 때까지 굳건히 버텼다. 1307년 6월 10,000 마크에 아솔을 스트라스보기의 존의 아들 데이비드에게 양도했다.

1307년 7월, 에드워드 1세가 사망했다. 그 후 랄프는 하프터드 백작과 글로스터 백작 작위를 상실했고, 의붓아들인 길버트 드 클레어가 작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길버트는 미성년자였고, 랄프는 웨일스에 있는 길버트의 광대한 소유지에 대한 관리권을 받았다. 1309년 3월 4일, 그는 몬테르머 남작으로서 의회에 처음으로 소환되었다. 1309~1310년, 랄프는 새 국왕 에드워드 2세로부터 자신과 자식들을 위해 데번, 윌트셔, 햄프셔에 있는 많은 영지를 받았다.

1311년부터 1312년까지 스코틀랜드의 왕실 부관을 맡았고, 봉급으로 300마크를 받았다. 1314년 6월 23~24일 벌어진 배넉번 전투에 참전했다가 생포되었지만, 로버트 1세는 그와 친분이 있었기에 몸값을 받지 않고 풀어줬다. 1315년, 랄프는 트렌트 강 남쪽의 왕립 삼림 관리인을 맡아 1320년까지 이 직위를 유지하면서,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가 고를스턴과 그레이트 야마스에 대해 제기한 영지 주장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1325년 4월 5일 런던에서 열린 대평의회에 초대받고 런던에 이르렀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3. 가족


[분류:1325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