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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0:33:05

윌리엄 몬터규(제1대 솔즈베리 백작)

파일:William Montagu_1st Earl of Salisbury.jpg
성명 윌리엄 몬터규
William Montagu
출생 1301년
잉글랜드 왕국 옥스퍼드셔 캐싱턴
사망 1344년 1월 30일 (향년 42~43세)
잉글랜드 왕국 버크셔 윈저
아버지 윌리엄 몬터규
어머니 엘리자베스 드 몽포르
형제 존, 시몬, 에드워드, 앨리스, 캐서린, 메리, 엘리자베스, 하와이즈, 모드
부인 캐서린 그랜디슨
자녀 윌리엄, 존, 엘리자베스, 시빌, 필리파, 아그네스
직위 솔즈베리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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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활약했다.

2. 생애

1301년경 옥스퍼드셔 캐싱턴에서 제2대 몬타구 남작 윌리엄 몬터구와 워릭셔 보데서트의 기사 피터 몽포르의 딸인 엘리자베스 드 몽포르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존[1], 시몬[2], 에드워드[3], 엘리스[4], 캐서린[5], 메리[6], 엘리자베스[7], 하와이즈[8], 모드[9]가 있었다.

아버지 윌리엄 몬타구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 통치 기간에 스코틀랜드 원정에서 활약했고, 에드워드 2세 치세 때 왕실 청지기로 일했다. 이후 아키텐으로 가서 세네샬[10]을 맡다가 1319년 10월 18일에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가 사망할 당시 아직 미성년자였고, 1320년에 에드워드 2세의 후견을 받고자 런던으로 보내졌다. 1323년 2월 21일에 아버지의 직위와 영주 소유권을 부여 받았다. 1320년과 1325년에 가스코뉴로 가서 비밀 임무를 수행했고, 1326년 기사 작위를 받았다.

1327년 에드워드 2세가 폐위된 뒤에도 새 국왕 에드워드 3세를 섬겼다. 1327년 스코틀랜드군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 일조했고, 1328년 군기를 짊어진 기사로 선임되었다. 1329년 외교 사절단에 선임되어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와 에드워드 3세간의 결혼 동맹을 협상했다. 하지만 이것은 명목상의 임무일 뿐이었고, 실제로는 어머니 프랑스의 이자벨과 이자벨의 애인이자 권신인 로저 모티머로부터 독립하길 희망한 왕의 뜻을 아비뇽 유수 중이던 교황 요한 22세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요한 22세는 그로부터 에드워드 3세의 메시지를 전달받은 뒤, 자신이 왕이 직접 상대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특별한 징표를 달라고 요청했다. 몬타구가 돌아간 후, 옥새상서인 리처드 버리는 에드워드 3세가 직접 기술한 pater sancte (거룩한 아버지) 라는 단어가 포함된 편지만이 실제로 왕에게서 온 것임을 교황에게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이후 그는 에드워드 3세를 위해 모티머를 몰아낼 음모를 꾸몄다. 모티머는 그를 체포해 심문했지만, 그가 그런 일이 없다고 끝까지 잡아떼자 풀어줬다. 이후 그는 에드워드 3세에게 모티머에게 용감하게 대항할 것을 조언했다. 1330년 10월 19일, 모티머와 이자벨이 노팅엄 성에 머물렀을 때, 노팅엄 성주는 그에게 비밀 입구를 보여줬다. 그는 윌리엄 드 보훈, 리처드 우포드, 존 네빌 등과 함께 성에 들어가 왕과 합류했고, 뒤이어 짧은 육탄전을 벌인 끝에 모티머를 체포했다. 이자벨이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채고 황급히 뛰어들어와 아들 에드워드에게 모티머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호소했지만, 에드워드 3세는 이를 따르지 않고 몇 주 후 런던에서 모티머를 반역 혐의로 처형했다. 이후 이자벨은 수녀원에 유폐되었고, 그는 모티머를 타도한 공로로 모티머가 소유했던 웨일스의 덴비 영주권을 포함한 1,000 파운드 상당의 토지 수임료를 받았다.

그 후 윌리엄은 에드워드 3세의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서 활약했다. 1331년 4월, 두 사람은 상인으로 위장한 채 프랑스에서 몇달간 비밀 임무를 수행했다. 그해 9월, 윌리엄은 칩사이드에서 기사 토너먼트를 열었고, 왕과 함께 타타르 의상을 입었다. 1333년부터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앉히기 위한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해 할리돈 힐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다. 1334년 2월, 그는 에드워드 발리올에게 에드워드 3세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요구하기 위해 에든브러로 파견되었다. 1335년 여름, 180명의 맨앳암즈와 136명의 궁수병을 이끌고 에드워드 발리올을 축출한 스코틀랜드인들을 공격해 로우랜드 일대를 약탈했다. 1337년 다시 스코틀랜드 원정을 개시했지만, 던바 백작부인 아그네스 랜돌프와 댈하우지의 알락산더르 램지를 상대로 한 던바 공방전에서 실패를 맛본 후 프랑스와 일전을 벌이려 하는 왕의 부름을 받고 철수했다.

1337년 3월 16일 솔즈버리 백작에 선임되었고, 연간 1,000마르크 상당의 토지와 임대료를 수여받았다. 1337년 4월 플란데런 백국 및 독일 제후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 발랑시엔으로 파견된 사절단의 대표를 맡았다. 1338년 7월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해 123명의 맨앳암즈와 50명의 궁수병을 제공했다. 그해 9월 잉글랜드 원수로 선임되었으나, 1338년 말 에드워드 3세가 잉글랜드로 돌아가기 위해 플란데런으로 떠났을 때 에드워드 3세의 가족 및 귀족들과 함께 에드워드 3세가 플란데런 상인들에게 빌린 돈을 꼭 갚겠다는 보증으로서 볼모로 남아 있어야 했다.

1340년 4월 플란데런 반란군과 함께 프랑스를 침공했지만 릴에서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파리에 투옥되었다. 그해 9월 가석방되었고, 잉글랜드로 돌아왔지만 1341년 에드워드 3세와 존 드 스트랫퍼드 총리 사이의 갈등을 제대로 중재하지 못했다. 그해 5월 스트랫퍼드가 불순한 마음을 먹고 군자금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았다는 왕의 고발을 심리하기 위한 위원회에 참가했지만 별다른 결과를 도출해내지 못했다. 1342~1343년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에서 친 잉글랜드 파인 몽포르파를 지원했고, 1343년 말레트르와 휴전 협상에 참여했다. 1343년 후반에 더비 백작 그로스몬트의 헨리와 함께 카스티야 연합 왕국으로 파견되어 잉글랜드와 카스티야간의 동맹을 모색했다.

1344년 초 잉글랜드로 돌아와 윈저에서 열린 대규모 토너먼트에 참가했지만, 그 해 1월 30일 토너먼트에서 중상을 입고 곧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버크셔의 비스햄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 ~ 1317, 기사를 맡다가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함[2] ? ~ 1345, 우스터와 엘리의 주교[3] ? ~ 1361, 몬터구 남작[4] 기사 랄프 도비니의 부인[5] 기사 윌리엄 캐링턴의 부인[6] ? ~ 1368, 뱀튼 남작 리처드 코간의 부인[7] 홀리웰 수도원의 수녀[8] 기사 로저 바벤트의 부인[9] 바킹 수도원의 수도원장[10] 남부 프랑스의 지방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