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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2 21:20:42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Thomas, 2nd Earl of Lancaster
파일:토머스와 성 조지.jpg
이름 랭커스터의 토머스
(Thomas of Lancaster)
출생 1278년
잉글랜드 왕국 랭커스터 백작령
사망 1322년 3월 22일 (향년 43~44세)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폰트프랙트
배우자 앨리스 드 라시 (1294년 결혼/1318년 결혼 무효)
아버지 랭커스터의 에드먼드
어머니 블랑슈 다르투아
형제 헨리, 존, 메리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3. 사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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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참여했으며,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피어스 개버스턴과 휴 르 디스펜서 부자에 대적하다가 디스펜서 전쟁에서 패배하여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

2. 생애

1278년생으로, 아버지는 초대 랭커스터 백작이자 더비, 레스터, 샹파뉴 백작이며,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 왕비의 차남인 랭커스터의 에드먼드이고, 어머니는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1세 다르투아의 딸 블랑슈 다르투아다. 형제로 헨리, 존[1], 메리[2]가 있었다. 토머스는 1296년 6월 5일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 랭커스터, 레스터, 페러스, 더비 백작령을 물려받았다. 1294년 제3대 링컨 백작 헨리 드 라시의 딸 앨리스와 결혼했으며, 1311년 장인이 사망한 뒤 링컨와 솔즈베리 백작, 홀튼 남작, 보일랜드 경의 작위를 받았다. 그는 5개 주의 영지를 소유하면서 잉글랜드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대귀족이 되었다. 그의 수행원은 왕의 수행원과 거의 같은 수의 기사로 구성되었다. 특히 잉글랜드 북부에 소재한 많은 군사적 거점을 소유했으며, 폰트프랙트 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했으며, 1313년에는 노섬벌랜드에 던스턴버러 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막강한 영지를 누린 토머스는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여러 차례 가담했으며, 에드워드 2세 치세인 1308년 5월 9일 대시종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자신의 영지가 왕국 내에서 가장 드넓고, 따르는 이도 많으며, 에드워드 2세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므로, 왕의 수석 고문이 되어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가스코뉴 출신의 하급 귀족이었던 피어스 개버스턴을 더 총애했고, 부왕 에드워드 1세 말기에 추방되었던 개버스턴을 즉위하자마자 복귀시킨 뒤 콘월 백작에 선임하고 수석 고문으로 삼았다. 그는 이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1308년 3월 의회 회기 중에 귀족들이 처음으로 개버스턴의 추방을 요구했을 때는 일단 개버스턴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지만, 그 해 11월 에드워드 2세와 불화가 생기자 귀족들 편에 서서 개버스턴을 비난했댜.

1309년 여름 왕실에서 일하던 자기 가신 한 명이 개버스턴의 조언에 설득된 에드워드 2세의 명령으로 해임되자, 토머스는 1309년 10월 요크 의회에 참석하길 거부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의회 개최를 1310년 2월까지 연기하면서 참석을 종용했다. 그는 일단 참석하기로 했지만, 왕명을 어기고 무장한 수행원을 거느리고 요크에 나타나 왕에게 개버스턴에 대한 지나친 총애를 중단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3월 16일, 에드워드 2세는 토머스 및 귀족들의 강력한 압력에 못 이겨 귀족 21명으로 구성된 '개혁 위원회' 설립에 동의했다. 토머스는 개혁 위원회의 일원이자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1310년과 1311년에 에드워드 2세가 스코틀랜드에서 벌이려 했던 2차례의 군사 작전이 군자금 확보 미비와 귀족들의 비협조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자, 개혁 위원회는 이를 빌미 삼아 왕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1311년 여름 런던 의회에서, 에드워드 2세는 개혁 위원회의 압박에 못 이겨 자기 권한을 제한하는 41개 법령을 승인햇다. 이때 제20 조항에서는 피어스 개버스턴을 "국왕과 그의 국민의 공공연한 적"으로 규정하면서, 왕국 바깥으로 추방한다고 선언헀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1312년 초 개버스턴을 재차 불러들였다. 이에 토머스는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 그리고 아룬델 백작 에드먼드 피츠앨런 등과 함께 하급 귀족 출신으로서 지나치게 출세해 왕을 현혹한 간신 개버스턴을 처단하겠다고 맹세했다.

1312년 4월 초, 토커스는 자기 추종자와 다른 귀족들과 함께 군대를 일으켜 왕실이 있던 요크로 접근했다. 에드워드 2세는 개버스턴을 데리고 뉴캐슬로 향했지만, 토머스가 5월 4일에 뉴캐슬로 진군하자 그곳에서 도주했다. 토머스는 당시 타임머스 수도원에 있던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에게 서신을 보내 그녀를 해칠 의도는 없으며, 오직 개버스턴을 추방하는 것만 원한다고 밝혔다. 이후 토머스 등은 개버스턴이 숨어있던 스카버러 성을 포위했다. 5월 19일, 개버스턴은 8월 1일 의회에서 열리는 재판에 참석할 때까지 월링포드 성에 가택 연금을 유지하며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조건으로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토머스와 워릭 백작, 아룬델 백작, 헤리퍼드 백작 등은 재판까지 갈 것 없이 개버스턴을 당장 죽이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월링포드 성으로 이동하던 개버스턴을 납치해 워릭으로 끌고 간 뒤, 개혁 위원회 인사들을 소집한 후 약식 재판을 거행했다. 그는 개버스턴이 추방령을 3번이나 어겼으니 죽어 마땅하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에이머 드 발랑스가 개버스턴을 8월 1일에 열리는 재판 때까지 신변을 보장하기로 한 자신의 약속을 상기하며 당장 풀어달라고 요구했지만, 토머스 등은 듣지 않고 6월 19일 밤 참수형을 집행하게 했다. 개버스턴은 자비를 간청했지만, 그는 이를 묵살하고, 헤리퍼드와 아룬델 백작에게 개버스턴을 자기 영지로 끌고 가서 처형을 감독하게 했다.

개버스턴은 생전에 가스코뉴의 하급 귀족 출신으로서 지나치게 출세해 왕의 총애를 독차지한 점 때문에 잉글랜드 귀족들의 반감을 샀지만, 왕의 허락 없이 그를 처형한 것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다. 많은 성직자들은 부당하고 잔혹한 처사였다고 비난했고, 초대 윈체스터 백작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 등 여러 영주 역시 토머스가 왕권을 실추했다고 규탄했다. 하지만 토머스의 추종자들은 나라를 망친 간신을 정당하게 처형했을 뿐이라며 토머스를 옹호했다. 1312년 8월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는 토머스와 에드워드 2세 간의 갈등을 조정하여 평화를 구축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러나 토머스는 워릭 백작, 헤리퍼드 백작과 함께 9월 3일에 군대를 일으켜 런던으로 진군했다. 이에 왕실군이 웨이크 마을에서 이들을 저지했다.

이제 내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듯 했지만,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와 에이머 드 발랑스가 이를 저지하고 협상을 중재했다. 이자벨 왕비의 삼촌인 에브뢰 백작 루이 데브뢰와 교황 특사들도 자제할 것을 호소하자, 양자는 협상을 통해 평화를 이루기로 했다. 협정은 1313년 2월 13일에 체결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개버스턴을 살해한 자들을 사면하기로 했고, 토머스 등은 왕권을 더이상 침해하지 않고 스코틀랜드 원정에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개버스턴을 범죄자로 규탄하라는 토머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리하여 양자간의 응어리가 잘 해소되지 않았고, 토머스 등 일부 귀족은 개버스턴의 처형을 합법화하지 않은 것에 항의하며 의회 출석을 거부했다. 1313년 10월, 에드워드 2세는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의 중재에 따라 랭커스터, 워릭, 헤리퍼드 백작과 그들의 지지자 500명을 정식으로 사면했다.

1314년 여름, 에드워드 2세는 스털링 성을 포위한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를 응징하고자 대규모 병력을 일으켰다. 그러나 토머스는 왕이 군사 작전을 벌이는 것에 대해 의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후 에드워드 2세가 배넉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에게 참패하면서 위상이 실추되자, 토머스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1314년 9월 요크에서 열린 의회에서, 토머스는 원정 실패 책임을 에드워드 2세에게 돌리면서, 왕에게 군자금을 제공하길 거부했으며, 왕실 유지 비용을 절감하라고 요구했다. 에드워드 2세는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토머스는 개혁 위원회의 수장으로서 잉글랜드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의 추종자들이 대다수 요직을 차지했고, 행정은 그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에드워드 2세는 토머스의 동의 없이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1315년 8월, 토머스는 잉글랜드 북부의 왕실 총독에 선임되었고, 1316년 겨울에 열린 의회에서 국왕의 수석 고문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자기가 무능한 통치자임을 드러냈다. 잉글랜드 전역에 기근이 창궐했고, 북부 국경 지역은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의 연이은 침략으로 황폐해졌다. 또한 웨일스에서는 잉글랜드의 지배에 항거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그러나 토머스는 이 일련의 사태 해결에 별다른 열의를 보이지 않고, 거의 모든 시간을 자기 영지에서 보냈다. 이에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토머스에 대한 불만이 갈수록 커졌다. 1316년 여름에 열린 의회에서, 에드워드 2세는 잉글랜드 북부를 파괴하는 스코틀랜드인들을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단행하려 했지만, 토머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8월 15일에 둘째 아들 앨섬의 존을 낳은 이자벨 왕비는 토머스와 왕의 화해를 유도하고자 토머스를 존의 대부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그 의식에 참석했다는 언급이 없기 때문에, 아마도 거절당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이후에도 잉글랜드 북부를 지속적으로 습격했지만, 랭커스터 가문의 영지에는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않아 많은 이들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1317년 2월 9일 클라렌던에서 열린 의회에서, 에드워드 2세는 토머스가 로버트 1세와 공모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배신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고, 토머스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317년 여름,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로의 원정을 재차 계획했다. 이 작전은 원래 7월 8일에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국왕을 대신하여 외교 사절로 대륙에 파견되었던 펨브로크 백작과 배들스미어 남작이 아직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않아 연기되었다. 이후 8월 11일 뉴캐슬에서 재차 원정을 떠나기로 했지만, 이보다 전인 7월 8일에 스코틀랜드 군대가 국경을 넘어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토머스에게 스코틀랜드에 대한 공동 원정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토머스는 이에 받아들이는 듯한 자세를 취했지만, 끝내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지 않았고, 원정은 9월 15일로 연기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주교 7명과 펨브로크 백작, 헤리퍼드 백작으로 구성된 고위 사절단을 랭커스터 백작령의 중심지인 폰트프렉트 성으로 보내 토머스에게 합류를 요청하게 했지만, 토머스는 목숨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에 갈 수 없다며 끝내 가지 않았다. 에드워드 2세는 일단 단독으로 진군하기로 하고, 1317년 9월 4일 요크로 출진했다. 그러던 중 폰트프렉트 성 근처를 지나갔는데, 토머스는 왕이 지나가자마자 다리를 막아서 지원군이 왕에게 도달하지 못하게 했다. 이후 에드워드 2세는 뉴캐슬에서 기병 1,500명, 경기병, 궁수, 석궁병 및 보병으로 구성된 상당히 큰 규모의 군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더럼에서 새로 선출된 주교인 루이스 드 보몽과 그의 추기경인 고슬랭 드 장, 루카 피에스키가 길버트 미들턴에게 공격받아 재산을 약탈당했다. 에드워드 2세는 토머스가 이 습격을 주도했다고 의심하고, 9월 8일 직후 원정을 중단했다. 그 후 1317년 11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휴전 협약을 맺기로 결의했다.

얼마 후, 토머스의 아내 앨리스가 리처드 드 생 마르탱에게 도싯의 캔포드에 있는 자기 영지에서 납치되어 워렌의 리게이트 성으로 이송되었다. 사실 이 납치는 자작극이었다. 앨리스는 오래 전부터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의 시종인 유불루스 르 스트레인지와 불륜 관계를 이어갔고, 서리 백작은 아내 바르의 조안과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는 걸 토머스가 협조해주지 않아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선고받게 한 것에 불만을 품고 앨리스의 동의 하에 납치한 것이었다. 토머스는 이에 분노해 앨리스와의 결혼이 무효라고 선언하고 서리 백작의 두 성을 몰수했다.

그 후 랭커스터 백작령과 서리 백작령 사이에 무력 충돌이 여러 차례 벌어졌다. 에드워드 2세는 두 사람에게 당장 사적인 전쟁을 중단하고 법정에서 해결하라고 요구하면서, 그러지 않으면 엄중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토머스는 자신의 안전을 두려워해 왕실 법정에 참석하는 걸 거부했다. 이 일로 위상이 실추된 토머스는 1317년 9월 궁정으로 돌아왔지만 많은 이들에게 경원시되었다. 그의 옛 동지였던 헤리퍼드 백작 , 아룬델 백작과 모티머 가문, 그리고 레이놀즈 대주교는 토머스를 떠나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가 이끄는 소위 '온건파' 집단에 가담했다. 이들은 왕과 토머스 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원칙에 따라 나라를 안정시키는 걸 목표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궁지에 몰린 토머스는 에드워드 2세에게 새로운 총신인 제2대 몬터규 남작 윌리엄 드 몬터규, 초대 오들리 남작 휴 드 오들리 등을 해임하라고 요구했다. 에드워드 2세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1318년 여름 의회에서 토머스의 추종자들과 왕을 옹호하는 이들 간의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이후 펨브로크 백작 등의 중재 노력 끝에, 양자는 1318년 8월 9일 리크 조약을 맺고 화해하기로 했다. 이 조약에 따르면, 에드워드 2세는 마그나 카르타를 따르고 총신들을 해임하기로 했고, 토머스는 왕의 수석 고문 직에서 물러나고 개혁 위원회에서 사퇴하기로 했다. 그 후 에드워드 2세는 펨브로크 백작이 이끄는 귀족 17명으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의 통제를 받았다. 이 위원회에는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가 있었는데, 그는 곧 왕의 전폭적인 총애를 받는 대신이 되었다.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는 리크 조약에 반대했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특별 위원회에 포함되었고, 아들의 새로운 지위를 이용해 세력을 확장했다. 그 후 에드워드 2세와 귀족들 사이의 평화가 약 2년간 이어졌지만, 에드워드 2세는 개버스턴의 죽음을 복수하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토머스 역시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고 싶었다.

1318년 4월 초, 스코틀랜드군이 야간에 기습 공격해 베릭 성을 함락했다.(베릭 공방전) 이리하여 스코틀랜드에 남아있던 유일한 요충지인 베릭 성이 스코틀랜드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 후 로버트 1세는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기로 마음먹고, 5월에 요크셔로 쳐들어가 하보트, 워크 및 미트포드 성을 점령한 뒤 노샐러튼, 리폰, 폰트프랙트까지 진군했다. 리폰 주민들은 대성당으로 피신한 뒤 도시가 파괴되지 않는 조건으로 1,000 마크를 지불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은 나레스버러를 불태운 후 스키튼을 거쳐 철수했다.

베릭이 함락된 사건은 잉글랜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이에 에드워드 2세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화해한 뒤 1319년 늦여름에 함께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진군해 9월 7일부터 베릭을 포위했다. 그러나 월터 스튜어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수비대는 적의 공세를 잘 막아냈다. 제임스 더글러스와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는 적이 포위를 저절로 풀도록 유도하고자 베릭을 우회하여 요크셔를 위협했다. 요크의 대주교 윌리엄 멜튼과 보안관 존 호담이 그를 물리치기 위해 군대를 모았지만, 9월 12일 마이톤 전투에서 제임스 더글러스와 토머스 랜돌프에게 패배했다. 토머스는 마이톤 전투 소식을 접하자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 영지로 돌아갔고, 에드워드 2세는 9월 17일에 베릭을 공략할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철수했다.

이후 디스펜서 가문의 급격한 부상에 대한 불만이 영주들 사이에서 커졌다. 특히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가 배넉번 전투에서 전사한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 상속녀의 남편으로서. 자기가 길버트 상속 재산을 더 많이 상속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글로스터 백작령이 포함된 웨일스 변경지대의 영주들이 격분했다. 토머스는 이 때를 틈타 제3대 위그모어 남작 로저 모티머, 제4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 등을 회유해 디스펜서 가문의 영지를 공격하도록 사주했다.

1321년 5월, 로저 모티머 등이 이끄는 영주들이 디스펜서 전쟁을 시작했다. 그들은 디스펜서 가문의 땅으로 쳐들어가서 뉴포트, 카디프, 케어필리를 점령하고, 글로스터셔와 글래모건 영지를 황폐화했다. 그 후 모티머 등은 폰트프랙트 성에서 토머스와 만났고, 토머스는 동지들의 땅을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했다. 6월28일 셔브룬인엘멧에서 열린 회의에서, 반란 귀족들은 디스펜서 가문의 영지를 몰수할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로저 모티머는 분견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이동하면서, 장병들에게 왕의 권위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고자 왕실 문장이 있는 녹색 유니폼을 핍도록 했다. 7월 말, 모티머는 런던 탑을 포위했고, 8월 1일에는 토머스와 다른 영주들이 합류했다. 반군은 왕에게 디스펜서 부자 등 총신들을 추방하라고 요구하면서, 이를 들어주지 에드워드 2세를 더는 따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옹립하겠다고 선언했다.

에드워드 2세는 디스펜서 부자를 해임하길 거부하면서,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에게 저들과 협상하라고 지시했다. 펨브로크 백작은 이자벨 왕비를 중재자로 모셨고, 왕비는 반란 귀족들의 의견을 접수한 뒤 왕에게 나아가 무릎 꿇고 나라의 안정과 국민의 이익을 위해 총신들을 추방해달라고 간청했다. 에드워드 2세는 이에 마음이 흔들렸고, 일단 반군 귀족들과 휴전을 맺고 협상을 좀더 이어가기로 했다. 이제 디스펜서 부자 등이 추방되고 토머스가 권좌에 다시 오르는 건 시간 문제인 듯 했다.

그러던 1321년 10월, 이자벨 왕비가 캔터베리로 가던 중 개혁 위원회의 일원이자 왕실 집사인 바스톨로뮤 배들스미어가 소유한 리즈 성에 들리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그 후 성 수비대와 왕비의 수행원들 사이에서 충돌이 벌어졌고, 왕비의 하인 6명이 살해되었다. 이에 1321년 10월 말, 펨브로크 백작이 지휘하는 왕실군이 왕실군이 리스 성벽 외곽에 주둔하여 압박을 가했다. 로저 모티머와 험프리는 리즈 성을 구원하러 달려갔ㄱ지만, 토머스가 지원을 거부했기 때문에 왕실군에 감히 대적하려 하지 않았다. 10월 31일, 리즈 성이 항복했고, 성주와 그의 병사들은 처형되었으며, 베들스미어의 가족들은 런던으로 보내졌다.[3] 로저 모티머와 험프리는 에드워드 2세의 복수를 두려워해 북쪽으로 철수했다.

1321년 12월 중순, 에드워드 2세는 반역자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한다고 선언했다. 그 후 왕실군이 추격하자, 로저 모티머와 험프리는 서둘러 도주했다. 이중 로저 모티머는 폰트프랙트 성에 피난처를 마련하고 토머스에게 구원을 호소했지만 별다른 응답이 없었다. 결국 모티머는 1322년 1월 22일 슈루즈버리에서 에드워드 2세에게 항복하고 런던 탑으로 압송되었다. 그 해 2월, 에드워드 2세는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영지로 진군해 테트버리 성을 함락했다. 이렇듯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토머스는 로버트 1세와 협상해 스코틀랜드군의 지원을 받아내려 애썼고, 런던에 서신을 보내 왕이 배신했다고 주장하고 자신을 국가 이익의 옹호자로 묘사했다. 그러나 런던 시민들은 그를 지지해주지 않았고, 로버트 1세 역시 그를 위해 피를 흘려주고 싶지 않아 군대를 보내주지 않았다.

파일:랭커스터의 토머스의 처형.jpg

그 후 토머스는 테트버리 성을 함락한 왕실군과 버튼 다리에서 교전했으나 패배한 뒤 북쪽으로 이동해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과 합세했다. 1322년 3월 16일, 초대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가 지휘하는 왕실군이 버러브리지 인근 나무 다리에서 반란군과 대면했다. 이어진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험프리는 다리를 뺴앗으려 했다가 전사했고, 토머스는 달아아났다가 다음 날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에드워드 2세에게 항복했다. 그 후 폰트프랙트로 이송된 뒤 약식 재판을 받았다. 영주로 구성된 재판관들은 그를 반역자로 규탄하고 교수형 후 사지 절단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2세는 그가 왕실의 혈통을 물려받아씩 때문에 참수형으로 감형하기로 했다. 토머스는 1322년 3월 22일에 처형되었고, 추종자 23명이 그와 함께 참수되었으며, 다음 날에는 6명이 더 처형되었다.

토머스의 유해는 폰트프랙트에 있는 세인트 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동생 헨리는 토머스의 반역 행위로 인해 몰수된 가문의 영지를 계승하고자 에드워드 2세에게 청원해 1323년 레스터 백작령을 돌려받았다. 나중에 토머스의 반역 혐의가 무효로 처리된 뒤 랭커스터, 더비, 솔즈베리, 링컨 백작령을 추가로 돌려받았다.

3. 사후 이야기

토머스가 처형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매장지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퍼졌고, 폰트프랙트에 있는 그의 무덤과 백작의 초상화가 있는 기념비가 성립된 조례를 기념하여 세인트 폴 대성당 기둥에 고정되면서 순례의 대상이 되었다. 14세기 프랑스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는 그의 연대기에서 토머스가 "신중하고 독실한 사람이었으며, 폰트프랙트의 무덤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적었다. 그가 생전에 저질렀던 실책과 단점은 잊혀졌고, 그의 이미지는 성 조지의 이미지와 연관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이에 분개해 세인트 폴 대성당 석판을 파괴하라고 명령헀고, 토머스의 무덤에 경비병들을 배치해 순례자들을 막도록 했지만, 숭배 열기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1323년 토머스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과 경비대 사이에 충돌이 발생해 경비원 2명이 살해되기도 했다. 1326년 에드워드 2세가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와 로저 모티머의 쿠데타로 폐위된 뒤, 토머스에 대한 판결은 무효로 선언되었다. 그 후 새 국왕 에드워드 3세는 교황 요한 22세에게 토머스를 성인으로 삼아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토머스에 대한 숭배 의식은 헨리 8세 치세에 종교 개혁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 1286 ~ 1317, 보퍼트 영주[2] 1284 ~ 1289, 요절[3] 당시 바스톨로뮤 배들스미어는 옥스퍼드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