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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19 19:32:54

던바 전투(12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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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바 전투
영어: Battle of Dunbar
시기 1296년 4월 27일
장소 스코틀랜드 왕국 동 로디언 지역 던바 인근 스팟 개울가
원인 존 발리올의 독립 선언을 응징하려는 에드워드 1세의 원정.
교전국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스코틀랜드 왕국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왕국
지휘관 파일:Arms_of_Ranulf_de_Blondeville,_6th_Earl_of_Chester_(died_1232).svg.png 존 코민 파일:Warenne_Arms_2.svg.png 존 드 워렌
병력 미상 기병 300명, 보병 2,000명
피해 상당함. 불명
결과 잉글랜드 왕국의 승리.
영향 존 발리올의 폐위 및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일시 정복.
1. 개요2. 배경3. 경과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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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96년 4월 27일, 존 드 워렌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존 코민이 지휘하는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한 전투.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의 첫번째 회전이다.

2. 배경

1286년 3월 19일, 스코틀랜드 왕국의 전신인 알바 왕국의 군주 알락산더르 3세가 임신 중인 욜란드 왕비가 있는 킹혼으로 가려고 야간에 비바람을 뚫고 이동하다가 말이 절벽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바람에 사고사했다. 당시 알락산더르 3세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된 이는 노르웨이 국왕 에이리크 2세와 알락산더르 3세의 딸 마거릿 사이의 외동딸인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였지만, 당시 3살인 데다 알바 왕국에서 멀리 떨어진 노르웨이에 있었다. 그해 4월, 스콘에서 긴급 의회가 소집되었다. 제6대 에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와 갤러웨이 영주 존 1세 드 발리올 모두 스코틀랜드의 섭정이 되겠다고 나섰지만, 의회는 둘 중 하나가 섭정이 되면 왕위까지 노릴 거라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의회는 '수호자' 6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했고, 브루스 가문과 발리올 가문 인사는 위원회에서 배제하기로 했다. 위원회에는 세인트앤드루스 주교 윌리엄 프레이저, 글래스고 주교 로버트 위셧, 파이프 백작 돈카드, 뷰컨 백작 알락산더르 코민과 바데녹 영주 존 3세 코민, 스코틀랜드 대순경 제임스 스튜어트가 소속되었다. 이들은 평화를 유지하고 선왕과 '가장 가까운 피를 나눈' 미래의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욜란드 왕비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어 평화를 유지하려 했다.

1286년 11월 말, 욜란드는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이 아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데, 아마도 사산했거나 출생 직후 사망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200여 년간 알바 왕국을 이끌었던 둔켈드 왕조가 단절되었고, 마르그레트가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이제 수호자 6인은 마르그레트를 대신해 왕국을 통치하고 왕위 계승을 보장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애넌데일 백작 로버트 브루스는 여성 상속인을 스코틀랜드의 통치자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발리올 가문과 여러 차례 무력 충돌을 벌였다. 1289년까지 수호자 중 한 명이 병사했고 또 다른 한 명은 살해되었으며, 귀족들 사이의 불화로 인해 이들을 대체할 수호자가 정해지지 않았다. 알바 왕국의 행정과 법률 체계는 허물어졌고, 귀족들 간의 알력 다툼이 심해졌다.

알바 의회는 왕국의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선왕의 처남이었던 잉글랜드 왕국에드워드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아들 에드워드 왕자를 마르그레트와 결혼시키기 위해 마르그레트의 아버지이자 노르웨이 국왕 에이리크 2세와 협상을 시작했고, 자신을 마르그레트의 권리와 안전의 보증인으로 내세웠으며, 에이리크 2세에게 재정 지원을 제공했다. 에이리크는 에드워드 1세의 설득과 로비에 넘어가 자기 딸을 에드워드 왕자와 결혼시키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1289년, 로버트 브루스와 존 1세 드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의 중재에 따라 마르그레트의 통치권을 인정했고, 에드워드 1세는 아들 에드워드 왕자와 마르그레트의 약혼을 확정했다. 그해 11월 6일, 솔즈베리에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마르그레트는 에드워드 1세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에드워드 1세는 알바 왕국에 평화가 찾아오면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다. 1290년 3월, 잉글랜드-알바 왕국 국경 인근 버검에서 의회가 소집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이 자리에서 자기 아들 에드워드와 마르그레트의 결혼을 진행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교황청이 이 결혼을 승인했다고 알렸다.

알바 귀족들은 이대로 가다간 알바 왕국이 잉글랜드에 완전히 병합되고, 잉글랜드 왕이 자기들의 성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할 것을 우려했으며, 알바 성직자들도 자기들이 누리던 특권이 잉글랜드 국왕에 의해 재분배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1290년 7월 버검에서 열린 2번째 의회에서 에드워드 1세에게 자신들이 누리는 특권과 지위를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에드워드 1세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8월 28일 노샘프턴에서 양국의 국경과 특권의 보존을 보장하며, 알바 왕국의 독립과 성직자와 귀족의 모든 자유를 보존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1290년 9월, 당시 7살이었던 마르그레트는 나르베 주교와 토레 하콘손 남작과 함께 배를 타고 노르웨이를 떠나 알바 왕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녀는 도중에 뱃멀미에 시달렸고, 9월 23일 오크네 제도에 상륙한 뒤 일주일간 고통을 겪다가 1290년 9월 26일에서 29일 사이에 나르베 주교의 품에 안긴 채 사망했다. 스콘에 모여서 어린 여왕이 오기를 기다리던 알바 귀족들은 10월에 그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후 여러 야심가가 알바 왕위를 놓고 경쟁했는데, 그 숫자는 14명에 달했다.

1291년 5월 10일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노럼에서 회의가 열렸지만, 다들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바람에 결론이 나오지 못했다. 이때 에드워드 1세 역시 회의에 참석했지만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았다. 이후 귀족들은 에드워드 1세에게 누가 이 왕위 주장자 중 가장 적합한지를 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이 알바 왕국을 안정시켜줄 의향이 있다며, 그 대신 모든 왕위 요구자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로드 파라마운트(Lord Paramount: 최고의 주권자)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해 관철했다.

1291년 6월 6일, 에드워드 1세는 베릭어폰트위드에서 새로운 회의를 소집해 왕위 요구자 14명이 직접 또는 사절을 통해 알바 국왕이 되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게 했다. 이때 마르그레트의 아버지인 에이리크 2세도 알바 왕위를 주장했으며, 딸이 즉시 여왕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해 보상을 요구했지만 기각되었다. 이후 대부분의 왕위 후보자가 배제되었고, 오직 존 발리올과 로버트 브루스만 남았다. 에드워드 1세는 브루스와 발리올이 선택한 사람들로 구성된 대규모 배심원들과 논의한 끝에, 1292년 11월 17일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의 새 국왕으로 선포했다.

존 발리올은 1292년 11월 30일 스콘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뒤, 그해 12월 26일에 에드워드 1세에게 재차 경의를 표했고,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 왕국에 종속된 국가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곤란한 처지에 놓였음을 알게 되었다. 1286년 알락산더르 3세가 사망한 후, 스코틀랜드엔 더 이상 중앙집권적인 행정 기관이 없어서 각지를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고, 로버트 브루스에게 충성하는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은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의 모든 법률과 선언을 무시했다.

여기에 에드워드 1세의 간섭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는 스코틀랜드 행정부 내에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들을 임명했고, 존이 내린 결정 중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독단적으로 취소했다. 게다가 스코틀랜드의 모든 법적 소송은 존이 아니라 자기에게 제기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으며, 1293년 한 해 동안 최소 6차례나 존에게 소환장을 보냈다. 그러던 1293년 중반, 파이프 백작으로부터 상속받지 못한 맥더프라는 스코틀랜드 귀족이 에드워드 1세에게 찾아와서 자신이 당연히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상속 재산을 물려받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에드워드 1세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존은 그 땅은 현재 스코틀랜드 왕이 소유하고 있으므로 그럴 수 없다며 거부했다. 맥더프가 에드워드 1세에게 허락받았다고 밝히자, 존은 그를 투옥했다. 몇 달 후 석방된 맥더프는 에드워드 1세에게 존의 행동을 고발했다. 존은 즉시 런던 의회로 소환되었다. 존은 소환을 미루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런던에 가서 자신을 변호해야 했으며, 맥더프에게 투옥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보상해야 했다.

1294년 5월,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한 자금을 받기 위해 런던에서 의회를 소집했다. 잉글랜드 측 연대기들은 존은 회의에 참석한 뒤 3년간 자기 땅의 수입을 에드워드 1세에게 바치겠다고 약속했다고 하지만, 프랑스에도 막대한 영지가 있던 존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찬성했을 가능성이 희박하기에 진위는 불분명하다. 그 후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에 대한 금수 조치를 내리면서, 존에게 동일하게 조치하고 군대를 제공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존은 이 요구는 너무 지나치다고 여겼고, 스코틀랜드 귀족들 역시 에드워드 1세의 횡포가 너무 심하니 그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295년 말, 존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해 스코틀랜드 의회를 소집했다. 이후 에드워드 1세에게 바쳤던 충성 맹세는 에드워드 1세가 무력으로 협박했기에 어쩔 수 없이 한 것이었다며 무효라고 선언했다. 여기에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사절을 교환했고, 필리프 4세의 조카인 앙주의 이자벨과 자신의 장남인 에드워드 발리올 사이의 약혼을 맺고, 잉글랜드에 대항해 공동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1296년 2월 23일, 스코틀랜드 의회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확정했다. 여기에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에드워드 1세가 잉글랜드 교회의 지배를 놓고 자신과 대립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존의 에드워드 1세에 대한 충성 맹세는 무효라고 선언했다.

존이 자신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했다는 소식을 접한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 침공을 취소하고 스코틀랜드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먼저 자신의 "범죄"에 대해 변론하라며 존을 소환했다. 존이 나타나지 않자, 그는 존이 잉글랜드에 가지고 있던 모든 자산과 토지를 압류하라고 명령했고, 스코틀랜드 왕위에서 폐위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존 발리올의 라이벌이었던 로버트 브루스의 아들인 제6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옹립할 용의가 있다고 밝힘으로써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내분을 유도했다. 이리하여 양자 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3. 경과

존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가 본격적으로 쳐들어오기 전에 선제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1296년 3월 11일 셀커크 인근의 캐던리에 군대를 소집했다. 그 후 제7대 뷰컨 백작 존 코민이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다. 그들은 애넌데일에서 온 많은 보병과 함게 솔웨이 강을 건너 아서렛 마을을 불태웠다. 이후 제6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가 방어하는 칼라일로 진군해 성채를 에워쌌다. 그러나 공성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성채를 공략할 수 없었고, 3월 28일 하루 동안 포위 공격한 뒤 철수했다.

1296년 3월 30일, 에드워드 1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군대를 이끌고 북상해 베릭에 도착했다. 베릭은 1295년 말부터 잉글랜드 함대의 공격을 받고 있었으며, 1296년 3월 육군을 이끌고 온 에드워드 1세에게 포위된 뒤 반복된 공격 끝에 함락되었다. 잉글랜드군은 베릭에 입성한 뒤 철저히 약탈하고 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이후 노섬벌랜드에서 온 잉글랜드 정착민들이 베릭에 정착했다. 존 발리올은 이에 대응해 스코틀랜드 왕국에서 모든 잉글랜드인들을 추방하라고 명령했지만, 스코틀랜드 귀족 대다수가 이에 따르지 않았다. 여기에 로스 백작 윌리엄 2세, 멘티스 백작 알렉산더 스튜어트, 아솔 백작 스트라스보기의 존이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제드버러에서 출격해 헥섬을 포함하여 노섬벌랜드의 수많은 마을, 교회, 수도원을 불태움으로써 베릭에서 잔학행위를 저지른 잉글랜드인들에게 보복했다.

에드워드 1세는 한동안 재정비한 뒤, 1296년 4월 23일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이 이끄는 기병 300명, 보병 2,000명을 던바 성으로 파견했다. 당시 제8대 마치 백작 패트릭 4세 드 던바는 에드워드 1세를 지지했지만, 그의 아내인 마조리 코민은 존 발리올을 추종했고, 던바 성의 수비를 진두지휘했다. 잉글랜드군에는 더럼 출신의 기병 100명이 포함되었는데, 더럼 주교 앤서니 베크가 이들을 지휘했다. 성에 갇힌 스코틀랜드인들은 항복하려 했지만, 우선 몇 km 떨어진 헤딩턴에서 주둔하던 존 발리올에게 사절을 보내 허락을 구하기로 했다. 하지만 존 발리올은 구원군을 보낼 테니 끝까지 싸우라고 답한 뒤, 제7대 뷰컨 백작 존 코민에게 상당한 병력을 맡겨 던바 성을 구원하게 했다.

1296년 4월 27일, 성을 포위 중이던 존 드 워렌은 적군이 던바 성으로 약 3km 떨어진 라머뮤어 힐에 주둔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일부 병력을 남겨둬서 던바 성을 계속 포위하게 했고, 자신은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스코틀랜드군을 향해 진격했다. 이떄 잉글랜드군은 수심이 깊은 스팟 개울을 건너야 했다. 당시 라머뮤어 힐에 주둔한 채 이 광경을 지켜보던 존 코민은 적군이 개울을 건너느라 무질서해진 것을 보고 도망친다고 오판해 전군에 언덕에서 내려가서 적을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군은 언덕을 내려간 뒤 개울을 건너는 과정에서 대열이 흐트러졌고, 그 사이에 전투 대형을 갖춘 잉글랜드군이 기병대를 앞세워 돌진했다. 경험이 풍부하고 잘 훈련된 잉글랜드 기사들은 무질서하게 진군하던 스코틀랜드군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기사 패트릭 그레이엄과 많은 보병들이 피살되었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졌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전투는 짧은 시간만 지속되었으며, 기사 4명이 추가로 생포되었다고 한다.

4. 이후

전투 다음 날, 에드워드 1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주력군이 던바에 도착했다. 이에 던바 수비대는 저항할 의지를 상실하고 항복했으며, 성에 있던 스코틀랜드 백작 3명과 남작 여러 명이 생포되었다. 이후 록스버러, 스털링, 에든버러 등 대다수 성들이 별다른 저항없이 귀순했고, 존 발리올은 스코틀랜드 북부로 도피해 저항을 이어가려 했지만 모든 귀족이 등을 돌리자 1296년 7월 10일 브레친 성에서 항복하고 모든 왕실 휘장을 에드워드 1세에게 넘겼다. 그 후 존 발리올은 장남 에드워드와 함께 런던 탑으로 보내졌고, 던바 성에서 생포된 귀족들과 뷰컨 백작 존 코민, 리처드 시워드, 존 모브레이, 인치마틴의 존, 데이비드 그레이엄, 알렉산더 맨치스, 니콜라스 랜돌프 등도 런던탑으로 보내졌다.

에드워드 1세는 1296년 7월 스코틀랜드 북부로 더욱 진군해 카우어 강어귀를 건너 디 강을 거쳐 에버딘에서 5일간 머문 뒤, 킨토어, 파이프, 벤프, 컬렌을 거쳐 스페이 강으로 이동했다. 7월 26일, 그는 스코틀랜드 모레이 지역의 가장 큰 도시인 엘긴에 도착했다. 그 후 남쪽으로 진군하여 로테스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존 드 켄틸루프와 존 헤이스팅스를 베드녹으로 보내 그 지역을 정복하게 했다. 에드워드 1세는 뒤이어 인버차라흐를 거쳐 킬드루미로로 동행했고, 더럼 주교 앤서니 베크는 로데스에서 왕과 헤어진 뒤 브레머로 진군해 그곳 주민들을 복종시켰다.

에드워드 1세는 8월 22일 이전에 베릭에 돌아온 뒤, 그곳에서 의회를 소집한 후 스코틀랜드 통치에 관한 칙령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스콭르랜드 왕국은 해체되지 않지만, 새로운 가신 왕이 임명되지도 않았다. 에드워드 1세 본인이 "스코틀랜드의 왕"이라는 칭호를 쓰지도 않았다. 그는 스코틀랜드를 몰수된 영지로 간주했고, 워렌 백작 존 드 워렌을 총독으로 세우고, 휴 크레싱엄을 재무장관으로, 아머샴의 월터를 법무관으로, 윌리엄 옴스비를 스코틀랜드 대법원장으로 선임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각지에 보안관과 성주들을 직접 선임하거나 현지 귀족이 그 직위를 맡는 걸 승인했다. 또한 스코틀랜드 왕관, 휘장, 그리고 역대 스코틀랜드 국왕들이 대관식 때 사용했던 운명의 돌런던으로 가져갔다.

1296년 7월과 8월에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진군하던 당시, 많은 스코틀랜드인이 그에게 경의를 표했으며, 8월 28일에는 다른 수많은 스코틀랜드인이 베릭에서 경의를 표했다. 그들의 이름은 <래그먼 롤>에 기록되었다. 하지만 래그먼 롤에 나와 있는 스코틀랜드인 2,000명이 그 자리에 모두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다수는 나중에 대리인을 보내 충성을 서약하는 정도에 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에드워드 1세는 이제 스코틀랜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여기고 프랑스와의 전쟁에 몰두했고, 총독인 워렌 백작은 스코틀랜드에서 한동안 통치하다가 불편함을 느껴 요크셔에 있는 자기 영지로 물러나고 재무장관 휴 크레싱엄이 그를 대신해 스코틀랜드 정부를 이끌었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수월하게 정복했다고 여기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의 전쟁에 몰두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그가 스코틀랜드를 떠난 직후인 1297년,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 등이 이끄는 스코틀랜드인들이 잉글랜드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면서, 에드워드 1세가 세운 스코틀랜드 정부는 전복될 위기에 직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