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로버트 브루스 Robert Brus | |
생몰년도 | 1243년 7월 ~ 1304년 3월 29일에서 4월 4일 사이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 첼름스퍼드 시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컴브리아 올더데일 애비타운 | |
아버지 | 제5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 | |
어머니 | 이사벨라 드 클레어 | |
배우자 | 마조리 캐릭, 마틸다 피츠앨런, 엘리노어 | |
자녀 | 로버트 1세, 닐, 에드워드, 토멋, 알렉산더, 이사벨라, 크리스티나, 메리, 마거릿, 엘리자베스, 마틸다 | |
직위 | 제6대 애넌데일 영주, 제4대 캐릭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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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의 아버지이지만,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잉글랜드 왕국의 편에 섰다.2. 생애
브루스 가문은 노르만족 계열의 잉글랜드 귀족 집안이었다. 이 가문의 창시자는 헤이스팅스 전투에 참전한 뒤 잉글랜드에서 영지를 받았다고 전해지는 기사 로버트 드 브루스로 오랫동안 여겨졌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이 기사가 존재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의견이 강하다. 브루스 가문에서 최초로 확실하게 알려진 조상은 셰르부르 남쪽의 브뤼스 출신인 로버트 1세 드브뤼스다. 그는 헨리 1세의 가신으로, 1106년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헨리 1세로부터 요크셔에 있는 광대한 영지를 받았다. 처음에는 주로 클라로의 와펜타크에 집중된 80개 영지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스켈톤 주변에 있는 30개 영지를 받았다. 여기에 하트와 하트니스에 추가 토지를 구매함으로써, 브루스 가문은 잉글랜드 북부의 강력한 영주로 거듭났다. 한편,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 국왕 다비드 1세가 어린 시절 런던에서 공부할 때 친하게 지냈고, 다비드 1세가 스코틀랜드 국왕이 된 뒤 스코틀랜드의 애넌데일을 받았다.이렇듯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 걸쳐 대규모 영지를 경영했던 로버트 1세는 두 아들을 낳았다. 큰아들인 아담 1세는 잉글랜드 북부 영지를 대거 받았고, 작은 아들인 로버트 2세는 애넌데일과 요크셔 및 더럼의 일부 영지를 상속받았다. 그 후 로버트 2세의 후손인 제4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는 헌팅던 백작이자 다비드 1세의 아들인 데이비드의 딸 이사벨라와 결혼하면서 스코틀랜드 왕실과 통혼했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로버트 브루스는 제5대 애넌데일 영주가 되었으며, 제5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와 초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의 딸인 이사벨라 마셜의 딸 이사벨라 드 클레어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의 아들이 바로 이 문서의 주인공인 제6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다.
로버트는 1243년 7월생이며 에식스의 첼름스퍼드 시 출신이다. 제2차 남작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아버지와 함께 헨리 3세 편에 섰다. 1264년 루이스 전투에서 반군에게 생포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몸값을 지불해야 했고, 1265년 이브샴 전투에서 반군이 패배한 뒤 아버지가 1268년까지 반군을 추적하는 걸 도왔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로버트는 1270년 잉글랜드 왕위 후게자 에드워드 왕자의 십자군에 뒤늦게 참여했다고 한다. 하지만 로버트가 1271년 잉글랜드에 남아있던 걸 볼 때, 그는 십자군에 참여하지 않은 것 같다.
1271년 제2대 캐릭 백작 닐 맥도나의 딸이자 킬콘콰의 아담(? ~ 1271, 제8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다가 전사했다.)의 미망인인 마조리와 결혼했다. 14세기 연대기 작가 포던의 존에 따르면, 로버트는 사냥을 하던 중 마조리를 만났고, 마조리는 그를 자신의 성인 턴베리로 데려간 뒤 그에게 홀딱 반해 15일 동안 로버트를 압박한 끝에 결혼했다고 한다.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3세는 자신의 동의를 기다리지 않고 재혼을 감행한 마조리에게 분노해 마조리가 가진 모든 재산을 몰수하라고 명령했고, 마조리의 주거지인 턴베리 성을 무력으로 접수한 뒤 포르둔 영지에 넘겼다. 그러다가 다시 마음을 바꿔서 마조리가 막대한 벌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영지를 돌려줬고, 그 영지는 이후 브루스 일족에게 상속되었다.
1278년, 로버트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열린 잉글랜드 의회에 참석해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3세를 대신해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1281년, 스코틀랜드 사절의 일원으로서 플란데런 백작 기 드 담피에르의 궁정에 찾아가서, 알락산더르 3세의 장남이자 상속인인 알락산더르와 기의 딸인 마르그리트의 결혼에 관한 협정을 맺는 데 기여했다. 그런데 1281년에서 1284년 사이에, 알락산더르 3세의 세 자녀 데이비드, 마거릿, 알락산더르가 차례로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제 알락산더르 3세의 모든 후손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그의 손녀이자 마거릿 공주의 유아 딸인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 뿐이었다.
알락산더르 3세는 1284년 2월 로버트를 포함한 스코틀랜드 귀족과 성직자들을 스콘에 소집한 뒤, 자신에게 다른 아들이 없을 경우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를 왕위 계승자로 받아들이고 보호하겠다고 맹세하도록 했다. 알락산더르 3세는 1285년 10월 14일 또는 11월 1일 제드버러에서 드뢰 백작 로베르 4세의 딸 욜란드와 재혼했지만, 1268년 3월 폭풍우가 몰아치는 상황에서 아내가 있는 킹혼으로 가려고 밤중에 무리하게 행진하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어버렸다.
이후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은 논란에 휩싸였다. 욜란드 왕비는 아이를 임신 중이었지만, 성별은 알려지지 않았고 미래도 불확실했다. 이제 3살된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는 노르웨이 궁정에서 살았다. 이에 제5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가 이끄는 브루스 가문과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 광대한 영지를 보유했고 알락산더르 3세의 후견인을 맡기도 했던 제5대 발리올 남작 존 1세 드 발리올이 스코틀랜드 왕위를 놓고 대립했다. 두 사람 모두 모계를 통해 스코틀랜드 둔켈드 왕조의 후손이며, 잉글랜드 왕실과 앵글로-노르만 귀족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스코틀랜드에서 막대한 영지를 보유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욜란드 오아비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약속을 귀족들에게서 받아내어 평화를 유지하려 애썼다. 로버트의 아버지 로버트 브루스는 스코틀랜드 섭정을 주장했지만, 의회는 브루스 가문과 발리올 가문은 포함되지 않은 6명의 귀족으로 구성된 섭정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욜란드 왕비가 사산아를 낳은 뒤, 브루스 가문과 발리올 가문을 비롯한 스코틀랜드 대귀족들은 섭정 위원회에게 순순히 복종하지 않았고, 여러 차례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특히 브루스 가문은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리올 가문과 전쟁을 벌였는데, 로버트도 여기에 참여했다. 1289년까지 섭정 위원회에 속한 인사 중 한 명이 병사했고, 다른 한 명은 살해되었으며, 귀족들 사이의 불화로 인해 이들을 대체할 섭정이 정해지지 않았다. 왕국의 행정과 법률 체계는 허물어졌고, 귀족들의 알력 다툼은 갈수록 심해졌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선왕 알락산더르 3세의 처남이었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아들 에드워드 왕자를 마르그레트와 결혼시키기 위해 마르그레트의 아버지이자 노르웨이 국왕 에이리크 2세와 협상을 시작했고, 자신을 마르그레트의 권리와 안전의 보증인으로 내세웠으며, 에이리크 2세에게 재정 지원을 제공했다. 에이리크는 에드워드 1세의 설득과 로비에 넘어가 자기 딸을 에드워드 왕자와 결혼시키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1289년, 제5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와 존 1세 드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의 중재에 따라 마르그레트의 통치권을 인정했고, 에드워드 1세는 아들 에드워드 왕자와 마르그레트의 약혼을 확정했다. 1290년, 마르그레트의 스코틀랜드 여왕 즉위를 확정하는 버검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로버트는 아버지와 함께 증인이 되었다. 그러나 마르그레트가 노르웨이에서 스코틀랜드로 향하던 중 뱃멀미에 시달리다가 오크니 제도에서 사망하자, 스코틀랜드 왕위를 놓고 분쟁이 재차 벌어졌다. 스코틀랜드 왕위를 주장하는 후보는 제5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를 포함하여 총 14명이었다.
1291년 5월 10일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노럼에서 회의가 열렸지만, 다들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바람에 결론이 나오지 못했다. 이때 에드워드 1세 역시 회의에 참석했지만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았다. 이후 귀족들은 에드워드 1세에게 누가 이 왕위 주장자들 중 가장 적합한 지를 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이 알바 왕국을 안정시켜줄 의향이 있다며, 그 대신 모든 왕위 요구자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로드 파라마운트(Lord Paramount: 최고의 주권자)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1291년 6월 6일, 에드워드 1세는 베릭어폰트위드에서 새로운 회의를 소집해 왕위 요구자 14명이 직접 또는 사절을 통해 알바 국왕이 되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게 했다. 이때 마르그레트의 아버지인 에이리크 2세도 알바 왕위를 주장했으며, 딸이 즉시 여왕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해 보상을 요구했지만 기각되었다. 이후 대부분의 왕위 후보자가 배제되었고, 오직 존 발리올과 제5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만 남았다. 에드워드 1세는 브루스와 발리올이 선택한 사람들로 구성된 대규모 배심원들과 논의한 끝에, 1292년 11월 17일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의 새 국왕으로 선포했다. 그 후 제5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는 스코틀랜드 왕위에 대한 권리르 아들 로버트에게 넘겼다.
1295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제6대 애넌데일 영주가 되었지만,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하기 싫었기에 그에게 충성 서약하길 거부했다. 1295/1296년 겨울, 스코틀랜드 국왕의 군대 출동 요청을 무시했다. 이에 존 발리올은 애넌데일을 몰수해 바데녹 영주 존 3세 코민에게 넘겼다. 1295년 10월 6일 에드워드1세에 의해 칼라일 성의 보안관으로 선임되었다. 1296년 봄 에드워드 1세가 자신에게 불복종한 봉신 존 발리올을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코틀랜드로 침공했을 때, 로버트는 자기를 스코틀랜드 왕으로 세워주겠다는 에드워드 1세의 꼬드김에 넘어가 잉글랜드군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특히 던바 전투에서 뷰컨 백작 존 코민이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결국 존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에게 항복하고 왕관과 왕복을 바쳤다.
포던의 존에 따르면, 로버트는 존 발리올이 굴복한 뒤 에드워드 1세에게 스코틀랜드를 자신에게 넘기겠다는 약속을 이행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에드워드 1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우리가 당신을 위해 왕국을 차지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그 후 로버트는 군대를 떠나 잉글랜드로 돌아갔고, 다시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이 벌어지던 와중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한편, 포던의 존은 1298년 폴커크 전투에서 "왕이 된 로버트 브루스"가 에드워드 1세의 군대에 참여해 스코틀랜드군의 측면을 공략하여 잉글랜드군의 승리에 일조했다고 기술했다. 역사학자 아치볼드 던컨은 이 사람은 당시 캐릭 백작이었던 미래의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가 아니라 아버지 로버트 브루스일 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로버트가 정말로 폴커크 전투에 참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로버트는 말년을 리틀에서 조용히 보냈으며, 에드워드 1세의 프랑스 원정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1304년 2월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에드워드 1세에게 항복하자, 애넌데일로 돌아가려고 여정을 떠났지만, 1304년 3월 29일에서 컴브리아 올더데일 애비타운에서 사망했고, 홀름칼트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마조리 캐릭(1254 ~ 1292): 제2대 캐릭 백작 닐 맥도나의 딸이자 제3대 캐릭 여백작. 킬콘콰의 기사 아담의 미망인.
- 이사벨라 브루스(1272 ~ 1358): 노르웨이 국왕 에이리크 2세의 왕비.
- 메리 브루스(1273 ~ 1323): 로클로의 닐 캠벨 경과 초혼, 알렉산더 프레이저 경과 재혼.
- 크리스티나 브루스(? ~ 1356/1357): 크리스토퍼 세튼 경과 초혼, 스코틀랜드 호국경 앤드류 머레이와 재혼.
- 로버트 1세(1274 ~ 1329): 제5대 캐릭 백작, 제7대 애넌데일 영주, 스코틀랜드 국왕.
- 닐 브루스(? ~ 1306): 로버트 1세의 반란에 분노한 에드워드 1세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 에드워드 브루스(1280 ~ 1318): 1313년부터 캐릭 백작. 1315년 ~ 1318년 아일랜드 원정을 이끌면서 아르드리를 칭했지만 1318년 10월 포하트 전투에서 전사했다.
- 토머스 브루스(? ~ 1307): 로버트 1세의 반란에 분노한 에드워드 1세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 알렉산더 브루스(? ~ 1307): 토머스 브루스와 함께 처형되었다.
- 마틸다 브루스(1287 ~ ?): 제4대 로스 백작 휴 드 로스의 부인.
- 마거릿 브루스(1283 ~ ?): 윌리엄 칼라일 경의 부인.
- 엘리자베스 브루스(1286 ~ ?): 윌리엄 디싱턴 경의 부인.
- 마틸다 피츠앨런(? ~ 1330년 이전 사망): 클랜, 오스웨스트리 및 아룬델 남작 존 피츠앨런의 딸. 1295년 9월 19일에 로버트 브루스와 결혼했지만 1296년 10월과 1299년 5월 사이에 이혼했고, 자녀는 없었다.
- 엘리노어(? ~ 1331): 기원은 알려지지 않는다. 로버트 사후 웰스 남작 리처드 웰스와 재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