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에드먼드 버틀러 Edmund Butler | |
생몰년도 | 미상 ~ 1321년 | |
출생지 | 아일랜드 영지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런던 | |
아버지 | 테오발드 버틀러 | |
어머니 | 조앤 피츠제프리 | |
형제 | 테오발드 | |
배우자 | 조앤 피츠제럴드 | |
자녀 | 제임스, 존, 로렌스, 조앤, 마거릿, 앨리스, 윌리엄 | |
직위 | 캐릭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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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일랜드 영지의 귀족.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잉글랜드 왕국의 편에 섰다.2. 생애
아버지는 아일랜드 대집사 및 명예 궁정 술잔 담당자를 역임한 버틀러 남작 테오발드 버틀러이고, 어머니는 1245년부터 1255년까지 아일랜드 보안관을 역임했고, 1258년 시몽 드 몽포르 등 여러 대귀족과 함께 헨리 3세에게 왕권 제한을 받아들이라고 압박한 존 피츠조프리의 딸 조앤이다. 형으로 테오발드가 있었다. 1285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형 테오발드가 가문의 영지를 물려받았지만, 1299년 형이 자녀 없이 죽자 그가 가문의 영지를 상속받았다. 1303년 어머니가 죽은 후에는 외조부 존 피츠조프리의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에 걸친 영지 일부를 상속받았다.1303년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하려 했지만, 에드워드 1세는 아일랜드 보안관 존 워건이 군대를 이끌고 자신 휘하에서 복무하고 있으므로, 그는 아일랜드에 남아서 그곳을 다스리라고 지시했다. 버틀러는 이에 따라 존 워건의 대리인으로서 1305년 5월까지 재임했다. 이후 1309년부터 1310년까지 잉글랜드에 머물렀고, 에드워드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아일랜드로 돌아온 후에는 1312년 8월부터 1314년 6월까지 아일랜드 재판관으로 재임했다. 그는 이 자격으로 1312년에서 13414년사이에 아일랜드의 우이 브로인 씨족을 상대로 대규모 군사 작전을 수행해 그들을 복종시켰으며, 1313년 미카엘 축일에 더블린의 시종 30명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1315년 2월 아일랜드 재판관을 맡은 버틀러는 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의 동생 에드워드 브루스의 아일랜드 원정에 직면했다. 그는 스코틀랜드군을 격퇴하기 위해 1315년 6월 아일랜드 귀족들을 던독으로 소집했다. 이후 벌어진 던독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버틀러를 물리쳤다. 하지만 이어진 몇 차례의 전투는 양자간의 피해가 누적될 뿐 승패를 가리지 못했고, 그 사이에 대기근이 창궐하면서 식량난에 시달리자 북아일랜드로 후퇴했다.
1316년 초 스코틀랜드군이 다시 남쪽으로 진군하자, 버틀러는 존 피츠토머스 피츠제럴드와 아놀드 르 포어와 함께 킬다어의 스케리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과 맞붙었지만, 이번에도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당시 스케리스 전투를 관찰한 왕실 관리 존 호담은 버틀러가 전투에서 승리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버틀러가 잉글랜드 국왕에게 충성하는지 의심했고, 그와 다른 귀족들에게 인질을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버틀러는 잉글랜드 왕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이 요청에 응했다.
1317년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가 동생을 지원하기 위해 아일랜드에 상륙했다. 이에 버틀러는 더블린을 떠나 먼스터에서 기병 600명과 보병 3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모았고, 먼스터 지주들로부터 병사 수백 명을 추가로 지원받았다. 그는 이 군대를 이끌고 1317년 4월 중순까지 리머릭으로 진군해 스코틀랜드군을 추격했지만, 그들의 강력한 전투력 때문에 전면전을 회피하고 식량 공출대를 습격하는 정도로 그쳤다. 스코틀랜드인들은 버틀러의 영지를 철저하게 약탈했지만, 대기근으로 인한 식량난으로 인해 식량을 마련할 길이 요원헀고, 기대했던 게일인들의 지원도 미비하자 결국 북아일랜드로 후퇴했다. 버틀러는 1318년 4월 존 드 버밍엄에게 재판관 직위를 넘겼고, 존 드 버밍음은 1318년 10월 포하트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에드워드 브루스를 사살했다.
1315년 9월 1일, 에드워드 2세는 티퍼레리에 있는 캐릭온슈어와 로스크리 영지를 버틀러에게 수여하고 캐릭 백작이라는 작위를 줬다. 그러나 그의 영지는 백작에 걸맞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남작들은 그를 백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본인도 그 직함을ㅇ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스코틀랜드군에 맞서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비난을 자주 받았고, 심지어 스코틀랜드인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도 샀다. 하지만 에드워드 2세는 버틀러가 항상 자신에게 충성스럽고 믿음직하게 봉사했으며, 그가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의심할 이유가 없다고 선언했다.
1320년, 버틀러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순례를 떠났다. 이후 잉글랜드로 돌아온 그는 런던에서 몇 달을 보내다가 1321년 9월 13일에 사망했다. 사후 킬케니의 고우란 시 외곽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조앤 피츠제럴드: 초대 킬데어 백작 존 피츠제럴드의 딸.
- 제임스 버틀러(1304 ~ 1338): 초대 오몽드 백작.
- 존 버틀러(1305 ~ 1330): 클로나마이클론의 영주. 티퍼레리 주의 이파와 오파 이스트 자작령의 세습 작위인 케릭 백작을 대대로 물려받은 버틀러 가문의 조상.
- 로렌스 버틀러(1306 ~ 1338)
- 조앤 버틀러(1309 ~ ?): 1321년 제3대 위그모어 남작 로저 모티머의 둘쨰 아들 로저와 약혼했지만, 로저 모티머가 디스펜서 전쟁에서 패배해 반역 혐의로 런던 탑에 수감될 때 그의 아들 로저도 함께 투옥되면서 약혼이 깨졌다.
- 마거릿 버틀리: 드럼라니의 토머스 딜런 경의 부인. 딜런 자작가의 조상.
- 앨리스 버틀러(? ~ 1356)
- 윌리엄 버틀러(? ~ 1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