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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4 20:04:21

기욤 1세 드 에노

파일:기욤 1세 드 에노.png
성명 기욤 1세 드 에노
Guillaume Ier de Hainaut
생몰년도 1286년경 ~ 1337년 6월 7일
출생지 에노 백국 몽스
사망지 에노 백국 발랑시엔
아버지 장 1세 드 에노
어머니 룩셈부르크의 필리파
형제 장, 앙리, 시몽, 마리, 장, 마르그리트, 알릭스, 이자벨, 잔, 마틸드
아내 발루아의 잔
자녀 장, 기욤 2세, 마르그리트, 필리파, 장, 아녜스, 이자벨, 루이
직위 에노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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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노 백국의 백작. 프랑스의 이자벨로저 모티머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를 축출하는 정변을 일으키는 걸 도왔으며, 백년전쟁이 발발했을 때 사위인 에드워드 3세를 도왔다.

2. 생애

1286년경 에노 백국의 수도 몽스에서 에노 백작 장 1세와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5세의 딸인 필리파의 4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장[1], 앙리[2], 시몽[3], 마리[4], 장[5], 마르그리트[6], 알릭스[7], 이자벨[8], 잔[9], 마틸드[10]가 있었다.

초기에 홀란트의 영주권을 맡았고, 질란트의 소유권을 놓고 에노 백국과 분쟁을 벌인 플란데런 백국의 위협에 맞서는 아버지 장 1세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플란데런 측이 촉발한 질랜트 봉기 때 반군을 도우러 온 플란데런 군대를 물리쳤다. 1302년 형 장이 사망한 후, 오스트레반트 백작에 선임되었고 에노 백국의 상속인이 되었다. 1304년 8월 10~11일, 기욤 1세는 지에릭제 전투에서 프랑스 편에 참전해 플란데런 백작 기 드 담피에르의 아들 기 드 나무르를 격파하고 생포하는 데 일조했다. 그해 8월 22일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에노 백작이 되었다. 이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동맹을 맺고 플란데런 백국과의 경쟁을 이어갔다.

그는 백작으로서 세금 징수 문제에서 성직자와 귀족의 학대를 종식하도록 했으며, 겐리 주민들에게 몽스의 법률과 일치하는 법률의 적용을 받는 특권을 내렸다. 1322년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3세가 사망한 뒤 그 뒤를 이은 루이 1세 드 플란데런은 프랑스 궁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친 프랑스 인사가 되었기에, 아벤느 가문에 대한 태도를 극적으로 바꿨다. 그 결과 1323년 3월 6일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플란데런 백작은 질란트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포기했다. 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플란데런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포기했다. 이리하여 플란데런과 에노 백국간의 대립은 종식되었고, 두 사람은 서로 친하게 지냈다. 그 후 기욤 1세는 저지대 국가 내에서 가장 번영하던 브라반트 공국과 대립했고, 플란데런 백국, 헬러 백국과 방어 동맹을 맺고 브라반트 공국에 공동 대항했다.

한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는 1320년대에 장남이자 후계자인 에드워드를 기욤 1세의 딸 중 하나와 결혼시킴으로써 든든한 동맹국을 저지대 국가에 두기를 희망해, 엑서터의 스테이플던 주교를 대사로 파견했다. 1326년 여름, 잉글랜드의 왕비 프랑스의 이자벨은 권신 휴 디스펜서를 축출하고 남편인 에드워드 2세를 폐위시키기 위해 기욤 1세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에노 궁정에 찾아왔다. 기욤 1세는 이자벨의 정변에 필요한 군자금을 지원하는 대가로 자신의 딸 필리파를 잉글랜드 왕비로 삼고 향후 에노가 위협을 받을 때 잉글랜드군이 보호해주기를 희망했다. 이자벨은 이에 동의했고 자신의 장남 에드워드 왕세자와 필리파의 약혼을 주선했다. 에드워드 왕세자와 필리파는 친척이었기 때문에 결혼이 성립되려면 교황 요한 22세의 허락이 필요했다. 이자벨은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는 사절을 교황청에 보냈는데 필리파를 "에노 백작의 딸"이라고만 언급하고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요한 22세는 1327년 9월 두 사람의 결혼을 승인했고, 필리파는 그해 10월 코벤트리 주교의 주례하에 대리로 에드워드와 결혼했다. 이후 필리파 일행은 그해 12월에 숙부인 에노의 장[11]의 호위를 받으며 잉글랜드로 향했고, 12월 23일 런던에 도착한 뒤 민중의 열광적인 환대를 받았다. 1328년 1월 24일 요크 민스터에서 에드워드 2세가 축출된 뒤 새로운 잉글랜드 국왕이 된 에드워드 3세와 필리파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필리파는 에노에서 많은 수행원을 데려왔는데, 그중에는 훗날 백년전쟁에서 맹활약한 월터 매니도 있었다.

1334년 초, 브라반트 공작 장 3세 드 브라반트와 플란데런 백작 루이 1세 드 플란데런이 메헬렌의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다. 이에 기욤 1세는 헬러 백국과 함께 플란데런 백국을 도왔고, 에브뢰 백작 샤를, 에탕프 백작 루이 1세, 알랑송 백작 샤를 2세 달랑송이 장 3세를 도왔다. 이 전쟁은 2년간 이어지다가 필리프 6세가 아미앵에서 중재하면서 평화가 성립되었다. 필리프 6세는 장 3세가 티엘, 헤레바르덴, 잔드베이크를 헬러 백작에게 넘겨주고 그의 딸 마리를 헬러 백작의 아들 레지날트 3세와 약혼하도록 했다. 또한 그의 아들인 기욤 2세는 브라반트 공작 장 3세의 딸인 잔 드 브라반트와 결혼했다. 한편, 기욤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왕좌를 노린 투쟁에서 자신의 딸 마르그리트와 결혼한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를 지지해, 그가 로마 왕 루트비히 4세로등극하는 데 일조했다.

1337년 백년전쟁이 발발하자 사위인 에드워드 3세의 편에 서서 저지대 국가 내 제후들의 연합을 이끌었다. 여기에는 브라반트 공작, 헬러 공작, 율리히 백작, 쾰른 대주교도 포함되었다. 그해 3월 24일, 에드워드 3세는 홀란트 국경을 지키기 위해 1,000명의 군인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그에게 매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그해 3월 7일 발랑시엔에서 사망했고, 아들 기욤 2세가 뒤를 이어 에노 백작이 되었다.

3. 가족



[1] ? ~ 1302, 보몽 영주, 오스트레반트 백작[2] ? ~ 1303, 캉브레의 정경[3] 유년기에 사망[4] 1280 ~ 1354, 부르봉 공작 루이 1세 드 부르봉의 아내[5] 1288 ~ 1356, 보몽 영주[6] ? ~ 1342,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 다르투아의 부인[7] ? ~ 1317, 노퍽 백작 로저 비고드의 부인[8] ? ~ 1305, 네슬 영주 라울 드 클레르몽의 부인[9] 퐁테넬 수녀[10] 니벨의 수녀원장[11] 1288 ~ 1356, 보몽의 영주였기 때문에 보몽의 장으로도 일컬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