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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20:23:41

루이 1세 드 부르봉

<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부르봉 공작
루이 1세 드 부르봉
Louis Ier de Bourbon, Duc de Bourbon
파일:루이 1세 드 부르봉.jpg
이름 루이 1세 드 부르봉 (Louis Ier de Bourbon)
출생 1279년
프랑스 왕국 클레르몽[1]
사망 1341년 1월 22일 (향년 61~62세)
프랑스 왕국 파리
배우자 마리 드 에노 (1310년 결혼)
자녀 잔, 피에르 1세, 베아트리스, 마르그리트, 마리, 필리파, 자크 1세, 잔(사생아), 기(사생아), 자네트(사생아)
아버지 로베르 드 클레르몽
어머니 부르고뉴의 베아트리스
형제 블랑슈, 장, 마리, 피에르, 마르그리트
직위 부르봉 공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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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초대 부르봉 공작. 플란데런 백국의 반란 진압과 백년 전쟁 초기 외교 활동을 수행했다. 부르봉 왕조의 시조이다.

2. 생애

1279년경 프랑스 왕국 클레르몽에서 클레르몽 백작이자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막내 아들인 로베르와 부르고뉴의 장의 딸인 베아트리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블랑슈[2], 장[3], 마리[4], 피에르[5], 마르그리트[6]가 있었다.

1297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은 그는 이 해에 플란데런 백국에서 반란이 발발하자 이를 진압할 군대에 편입되었다. 1297년 8월 20일 푸르네스 전투에서 사촌 필리프 다르투아가 전사하자, 그의 유해를 적에게서 탈취하는 등 큰 용기를 보여 세간의 칭송을 받았다. 1302년 쿠르트레 전투에서 후위대를 이끌었던 그는 참패가 확실해지자 릴로 철수해 더 이상의 손실을 회피했다. 1304년 8월 18일 몽스알페벨 전투를 지휘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플란데런 반란 진압을 이끌어냈다.

1308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와 필리프 4세의 딸인 프랑스의 이자벨의 결혼을 기념하여 조직된 볼로뉴 쉬르메르 마상창시합에 출전해 장 드 샤롤레와 함께 상을 수상하여 두각을 드러냈다. 1310년 10월 1일 어머니가 사망한 뒤 부르봉 가문의 영지를 물려받았으며,1317년 2월 7일 아버지 로베르가 사망한 뒤 전 재산을 물려받았다.

1312년 프랑스 추밀원의 일원이 되었으며, 필리프 4세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와의 조약을 협상하고 플란데런 백국과 에노 백국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는 등 외교 활동을 수행했다. 1312년 빈 공의회로부터 십자군 사령관에 선임되자 십자군을 모으기 위해 리옹으로 갔지만 별다른 진척이 이뤄지지 않자 포기했다.

1316년 6월 5일 프랑스 국왕 루이 10세가 사망한 뒤 유복자 장 1세가 11월 15일에 태어난 후 프랑스 국왕에 올랐지만 5일 후인 11월 20일에 사망했다. 이후 차기 왕위 후보를 놓고 루이 10세의 동생인 필리프 5세와 루이 10세의 딸 이 경합했는데, 그는 살리카법을 앞세워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필리프 5세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필리프 5세가 왕위에 오르는 데 기여했다. 필리프 5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에게 동전 주조 권리를 내렸고, 그의 땅에 있는 금과 은을 자유롭게 쓸 권리도 주었다.

1320년 4월 14일, 루이는 테살로니카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기 위해 부르고뉴 공작 오도 4세에게 40,000 리브르를 제안했다. 오도 4세는 이를 받아들이려 했지만, 타란토의 필리포가 개입하여 같은 금액을 제시했고, 오도 4세가 필리포에게 칭호를 주기로 하면서 실패했다. 1322년 필리프 5세가 사망한 뒤, 필리프 5세의 형제인 샤를 4세가 왕위를 물려받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327년, 샤를 4세의 권유에 따라 자신이 태어났던 클레르몽 백국을 샤를 4세가 왕이 되기 전에 영지로 삼았던 라마르슈 백국과 교환했다. 1327년 12월 27일에 부르봉 가문의 영지가 공국으로 승격되면서, 그는 초대 부르봉 공작이 되었다.

1328년 2월 샤를 4세가 적법한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는 발루아 공작 필리프가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로 등극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지지했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프랑스 대귀족 칭호를 받았다. 얼마 후 플란데런 백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진압군을 이끌고 출진해 1328년 8월 23일 카셀 전투에서 플란데런 반란군을 격파했다. 1329년 필리프 6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꺼리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를 설득하기 위해 런던으로 갔다. 에드워드 3세로부터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돌아온 뒤 필리프 6세로부터 클레르몽 백국을 돌려받았다.

1333년 프랑스 궁정에서 십자군 계획이 재차 거론되었을 때, 자신이 십자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겠다고 자원했다. 그러나 십자군 계획은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1337년 백년전쟁이 발발하면서 불거품이 되었다. 그는 1338년 부터 1340년까지 필리프 6세가 에드워드 3세에 맞서 벌이는 일련의 군사 작전에 참여했고, 아라스 회의 때 전권 대사로 파견되어 에드워드 3세와 협상한 끝에 두 왕국 사이에 2년간 휴전 협정을 맺는 성과를 거두었다. 1341년 1월 22일 파리에서 사망했고, 자코뱅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프랑스 오베르뉴론알프 퓌드돔 클레르몽페랑[2] 1281 ~ 1304, 오베르뉴와 불로뉴 백작 로베르 7세의 부인[3] 1283 ~ 1316, 샤롤레 백작[4] 1285 ~ 1372, 푸아시의 생 루이 수도원장[5] 1287 ~ 1330, 파리 신부[6] 1289 ~ 1309, 나뮈르 백작 장 1세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