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08 16:18:39

빌헬름 5세 폰 율리히

이름 빌헬름 5세 폰 율리히
Wilhelm V von Jülich
출생 1299년
율리히 백국
사망 1361년 2월 26일
율리히 공국 니데겐
아버지 게르하르트 5세
어머니 브라반트-아르쇼의 엘리자베트
형제 마리아, 엘리자베트, 하인리히, 리차디스, 발람, 고트프리트
아내 에노의 잔
자녀 게르하르트, 빌헬름 6세, 리차디스, 필리파, 요한나, 이사벨라
직위 율리히 공작, 케임브리지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clearfix]

1. 개요

율리히 공작, 케임브리지 백작.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 왕국 편에 서서 프랑스에 대적했다.

2. 생애

1299년경 율리히 백작 게르하르트 5세와 브라반트 공국 내 아르쇼트의 영주 고드푸르아의 딸인 엘리자베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마리[1], 엘리자베트[2], 하인리히[3], 리차디스[4], 발람[5], 고트프리트[? ~ 1335, 베르크하임의 영주]가 있었다. 1328년 7월 29일에 아버지가 사망한 뒤 율리히 백작이 되었다.

그는 형제 발람을 마르크의 아돌프 2셀 대신 쾰른 대주교로 선임하게 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투자했으며, 133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에 의해 변경백에 선임되었으며, 1337년 백년전쟁이 발발했을 때 황제의 지시에 따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연합하여 프랑스에 대항했으며, 플란데런 전선에서 활동했다. 또한 루트비히 4세의 주요 지지자로서 룩셈부르크 가문에 대적하는 황제를 지원했다. 1340년 에드워드 3세에 의해 캠브리지 백작에 선임되었다. 1347년 루트비히 4세가 급사하자 로마 왕에 오른 카를 4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349년 공작의 강해지는 권력에 위협을 느낀 율리히 기사단이 봉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투옥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민중의 압력으로 인해 1351년 석방되었다. 1352년 하인스베르크-발켄부르크에 상속세를 부과했다. 1356년 카를 4세에 의해 최초의 율리히 공작이 되었다. 한편, 그는 장남 게르하르트와 베르크 및 라벤스배르크의 상속녀인 라벤스베르크의 마가레타[6]와 결혼시킴으로써 베르크와 라벤스베르크를 공국의 영역에 포함시켰다. 1361년 2월 26일 니데겐에 사망했을 때, 장남 게르하르트는 1년 전인 1360년에 사망했고, 차남 빌헬름 6세가 새 율리히 공작이 되었다.

3. 가족



[1] ? ~ 1353, 비르네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2세와 초혼, 클레베 백작 디트리히 8세와 재혼, 사펜부르크 영주 콘라트 2세와 삼혼.[2] ? ~ ?, 세인 백작 요한 2세와 초혼, 하츠펠트 영주 고트프리트 5세와 재혼[3] 1319 ~ 1334, 쾰른 교구장[4] ? ~ 1360, 하바이에른 공작 오토 4세의 부인[5] 1322 ~ 1349, 쾰른 대주교[6] 라벤습르크 백작 오토 4세 폰 라벤스베르크의 딸[7]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의 손자이자 우드스톡의 에드먼드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