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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8:41:16

월터 매니

성명 월터 매니
Walter Manny
생몰년도 1310년경 ~ 1372년 1월 14일 또는 1월 15일
출생지 에노 백국 마스니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에섹스 체스터퍼드
아버지 장 르 보그네
어머니 잔 드 젠랭
아내 노퍽의 마가렛
자녀 토머스, 앤
직위 매니 남작, 잉글랜드 북부 제독, 가터 기사단 단원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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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활약했다.

2. 생애

1310년경 에노 백국 마스니의 영주이자 기사인 장 르 보그네와 잔 드 젠렝의 아들로 출생했다. 4명의 형제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이름과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불분명하다. 고향에서는 고티에(Gautier) 또는 발티에(Vatier)라고 불렀다. 어릴 때부터 에노 백작 기욤 1세의 형제인 장 드 보몽의 수행원을 맡았다. 1324년 아버지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진 생사르도 전쟁에 참여했다가 아키텐에서 전사했다. 훗날 잉글랜드 장성으로서 활동하던 그는 1346년에 아버지의 무덤을 발견하고 발랑시엔으로 이장했다.

1327년 12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왕비가 될 기욤 백작의 딸인 에노의 필리파의 시종으로서 잉글랜드에 도착했다. 잉글랜드 사람들은 그를 '월터 매니'라고 불렀다. 그는 필리파와의 친밀한 관계였다. 필리파가 에드워드 3세로부터 받은 영지의 청지기가 되었고, 1331년 기사 작위를 받고 많은 연금을 받았다. 1332년, 에드워드 3세는 그를 웨일스 할레치 성주이자 메리오네스셔의 종신 보안관으로 선임했다. 그는 이 덕분에 북부 웨일스의 상당 지역에 큰 영향력을 확보했다. 또한 에드워드 3세의 삼촌인 제1대 노퍼크 백작 토머스 브라더튼은 그에게 연금을 지급하고 원수로 선임했다.

1332년, 월터는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원정에 참여해 더플린 무어 전투의 승리에 기여했으며, 록스버그 다리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에서 복무하면서 잉글랜드 해안가를 지속적으로 약탈한 플란데런 해적 장 크라베를 생포한 뒤 1,000 마르크 또는 1,000 파운드를 받고 왕에게 넘겼다. 이후에도 1333년부터 1336년까지 에드워드 3세의 연이은 스코틀랜드 원정에 동행했다. 프랑스의 연대기 작가 장 라 벨에 따르면, 그는 무모한 용기와 수려한 매너로 전투 중에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끌었고, 에드워드 3세는 그의 이 특성에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1337년 8월 백년전쟁이 발발했을 때, 에드워드 3세는 에노에 주둔한 소규모 잉글랜드군을 지휘하던 월터에게 귀환을 명령했다. 월터는 40척의 잉글랜드 선박에 군대와 종자, 무기 및 물자를 싣고 잉글랜드로 돌아가던 중 플란데런의 대형 전함 2척을 요격했다. 이 배에는 글래스고 주교와 150명의 스코틀랜드인, 많은 돈, 그리고 소수의 프랑스 군인들이 탑승했다. 2척의 배는 철저하게 약탈되었고, 글래스고 주교는 프랑스 병사들과 함께 처참하게 살해되어 바닷속으로 던져졌다. 이후 런던에 도착한 월터는 플란데런 백국의 주요 항구도시인 슬로이스를 공략하라는 지시를 받들어 그로스몬트의 헨리와 함께 원정을 준비했다.

월터는 슬로이스 항구 앞에 있는 카잔트 섬을 빠른 시일에 장악한 뒤 슬로이스 시를 공략하기로 했다. 카잔트와 슬로이스에 대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집결한 잉글랜드군은 1,000명의 기사 및 종자, 중장병 500명, 궁수 2,000명으로 구성되었다. 원정군은 런던에서 승선한 후 템즈 강을 따라 하류로 항해하여 그레이브젠드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음날 항해를 재개해 마게이트에 도착했고, 이튿날 카잔트 섬으로 항해했다.

한편, 사전에 잉글랜드군이 쳐들어올 거라는 정보를 입수한 플란데런 백작 루이 1세 드 플란데런은 형이자 사생아인 기 드 리켄부르크에게 카잔트를 수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기는 지역 민병대 5,000명을 모집하고 16명의 남성을 기사로 선임해 다가오는 잉글랜드군의 침공에 대비했다. 1337년 11월 9일, 잉글랜드 선박이 카잔트 섬에 접근했다. 기가 이끄는 수비대는 즉시 제방과 모래 해변에 전투 대형을 결성하고 적이 상륙하기를 기다렸다. 배를 섬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시키게 한 뒤 장궁병들에게 해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적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마침 바람이 잉글랜드군에 유리하게 불고 조류 역시 안정적으로 흘렀기 때문에,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적군을 향해 화살을 효과적으로 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기는 병사들에게 화살이 미치지 않는 지점으로 후퇴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보병과 기사 1,500명이 보트를 타고 상륙했고, 궁수들은 엄호 사격을 위해 전함에 그대로 남았다. 잉글랜드군이 해안에 상륙한 뒤 자신들을 향해 달려들자, 기는 병사들에게 반격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카잔트 해안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던 중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너무 멀리 전진했다가 적병들에게 포위되었고, 그 중 한 명으로부터 강한 타격을 입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월터는 그걸 보고 돌격해 적병들을 흩어지게 한 뒤 동료를 구출했다. 이렇듯 플란데런 민병대는 나름대로 잘 싸웠지만, 오랜 전쟁을 치르면서 숙련된 잉글랜드 병사들의 전투력에 밀린데다 장궁병들의 정확한 사격으로 인해 사상자가 갈수록 늘어나자, 결국 카잔트 마을로 퇴각했다. 잉글랜드 장병들은 그들을 추격해 마을로 들어가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이날 전투에서 플랑드르 민병대 5,000명 중 3,000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혔다. 지휘관 기와 그날 기사로 임명된 이들 다수가 생포되었고, 포로로 잡힌 일반 병사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잉글랜드군의 손실은 알려진 바 없으나 수백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카잔트를 장악했으니 예정대로라면 슬로이스 시를 공격해야 했지만, 월터는 카잔트와 며칠 거리에 있는 볼로뉴 쉬르 메르에 프랑스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잘 요새화된 슬로이스를 섣불리 공격했다가 거기에 묶여있는 사이에 프랑스군의 요격으로 섬멸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포로와 약탈품을 싣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후 에드워드 3세에 의해 북부 제독으로 선임되어 잉글래드 동부 해안의 모든 항구를 통제하고 플란데런 백국에 양모를 중단없이 수출하도록 보장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1338년 7월 에드워드 3세의 군대를 플란데런으로 수송하는 함대 편성에 참여했다. 에드워드 3세가 발랑시엔에서 캉브레로 진군할 때, 그는 50명의 전사를 이끌고 본대에서 이탈한 뒤 모흐따니 시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고, 본대가 캉브레를 포위하는 동안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1340년 6월 24일 슬로이스 해전에 참여해 아군의 대승에 일조했으며, 본군이 투르네 공방전을 치르는 동안 분견대를 이끌고 주변 지역을 습격했다. 이후 왕이 자금 부족으로 인해 공방전을 포기하고 플란데런으로 철수한 후 플란데런 채권자들로부터 빌린 돈을 갚으라는 독촉에 시달렸을 때 왕과 함께 있었다. 에드워드 3세가 플란데런 채권자들 몰래 잉글랜드로 도피할 때 따라갔으며, 1340년 11월 30일 런던에 도착한 뒤 군자금을 제때에 보내지 않은 장관들을 압박해 사임하게 했다. 이후 그는 4천 파운드를 왕에게 빌려줬다.

1341년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을 때, 잉글랜드는 장 드 몽포르를 지지했고, 프랑스 측은 샤를 드 블루아와 잔 드 팡티에브르 부부를 지지했다. 1342년 6월, 월터는 잉글랜드 궁병대 300명을 이끌고 엔봉 공방전을 힘겹게 치르고 있던 장 드 몽포르의 부인인 잔 드 플란데런을 구원했다. 그해 10월 로베르 3세 다르투아가 10,000명의 군인을 이끌고 반으로 진군할 때 100명의 기사와 100명의 궁수를 이끌고 합세했다. 이들은 반 성을 향해 삼면에서 포위 공격했지만, 반 성을 사수하는 임무를 맡은 브르타뉴 마르쉐 영주이자 기사인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이 결사적으로 항전해서 실패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계략을 통해 성을 공략하기로 했다. 어느 날 밤, 로베르 3세 드 다르투아는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와 함께 반 성문 앞에 불을 피워서 수비대의 시선을 그쪽으로 끌어들였다. 그 동안 월터가 이끄는 소규모 장병들이 수비대가 비워두고 있던 성벽을 기어올라간 뒤 성이 함락당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소란을 피웠다. 이에 수비대는 전의를 급격히 상실해 순식간에 와해되었고, 잉글랜드군은 월터가 열어준 성문을 통해 시내로 들어가 여전히 싸우려 하는 적병들을 압도했다. 잔 드 플란데런은 다음날 반에 도착한 뒤 닷새 동안 머물다가 로베르에게 반 성의 권리를 넘기고 월터와 함께 엔봉으로 귀환했다.

한편, 올리비에 4세는 성이 함락되었을 때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는 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격분해 12,600명의 병력을 모아서 반으로 향했다. 그 해 11월 올리비에 4세가 들이닥쳤을 때, 이전 공성전 때 파괴되었던 성벽은 아직 완전히 수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다른 잉글랜드군은 렌으로 가버렸기에 조기에 구원하러 올 수 없었다. 로베르는 최선을 다해 항전했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했고, 중상을 입은 뒤 런던으로 이송되었으나 얼마 후 사망했다. 반은 철저하게 약탈당한 뒤 올리비에에게 재귀속되었다. 이후 월터는 반을 되찾기 위한 원정에 착수한 에드워드 3세의 군대에 복무했지만 뚜렷한 전공을 세우지 못했고, 반 공방전은 1343년 1월 19일 레스트로이트 휴전 협약에 의해 종결되었다.

1345년 8월,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군대에 배속되어 가스코뉴에 상륙했다. 이후 그는 도르도뉴와 가론 계곡으로 진군하는 헨리와 동행했고, 베르주라크 전투오베르슈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는 데 일조했으며, 전력적으로 중요한 요새인 라 레올을 공략했다. 1346년 가론강론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프랑스 남서부의 요충지인 에기용의 수비대에 배속되었고, 그해 4월 1일부터 8월 20일까지 노르망디 공작이자 프랑스 왕위 후계자인 에기용 포위 공격에 맞서 싸웠다. 본래 에기용의 수비를 책임지던 랄프 드 스태퍼드는 그해 7월 에기용 수비를 월터에게 맡기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8월 20일에 장이 북쪽으로 철수하자, 월터는 즉시 출격해 텅 비어 있는 적진을 가장 먼저 공략했다.

이후 에드워드 3세와 합류하기 위해 육로를 통해 프랑스 북부로 향했지만, 생장당젤리 성 인근에서 프랑스군에 체포되었다. 그는 기회를 틈타 탈출했지만, 오를레앙에서 또다시 체포된 후 루브르 또는 샤틀레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러다 1346년 연말에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를 얻은 뒤 1차 칼레 공방전을 치르고 있떤 에드워드 3세의 군대에 가담했다. 그는 칼레 공방전 기간 동안 기사 19명, 종자 91명을 포함한 326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8월 1일 칼레가 마침내 항복했을 때, 에드워드 3세는 시민 대표 6명을 처형하려고 했지만 월터가 이를 막았다. 장 르 벨에 따르면, 그는 에드워드 3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하느님의 어머니를 두고 맹세합니다. 만약 왕께서 이 사람들을 죽이면, 우리는 왕을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의무를 다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여기에 에노의 필리파 왕비도 뜯어말리자, 에드워드 3세는 결국 칼레 대표들을 살려줬다고 한다.

1347년부터 사법위원회와 의회에 참석했으며, 1348년 1월부터 매니 남작으로서 의회에 소환되어 청원을 심의하는 위원회에 포함되었다. 그는 잉글랜드와 플란데런간의 외교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두 국가가 높은 유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했다. 1348년 11월부터 12월까지 칼레와 덩게르크에서 프랑스 및 플란데런 대표들과 협상했으며, 1349년 3월 긴에서 프랑스 대표와 협상했다. 1351년 에드워드 3세를 대신해 에노 백작부인 마가렛 2세와 그녀의 아들인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1세간의 분쟁을 화해시키고자 에노로 향했다. 1353년 말 또는 1354년 초에 노퍽 백작이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아들인 토머스 브라더튼의 딸이며 에드워드 3세의 사촌인 노퍽의 마가렛과 결혼했다.

1347년 이후 월터의 군사 활동에 관한 기록은 매우 단편적이며, 신뢰하기가 어렵다.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월터는 1350년 1월 2일 칼레 성벽 앞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고, 1350년 8월 29일 윈첼시 해전에서 카스티야 해군과 맞섰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연대기에는 이런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1351년 여름 피카르디와 볼로뉴를 공격한 잉글랜드군에 함께 있었던 것과 1355년 아르투아와 피카르디에서 교전했던 것, 1356년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선봉대를 지휘한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

1359년 블란데런에서 병사 1,500명을 모집해 프랑스 원정에 나선 에드워드 3세와 합류했다. 그 직후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으며, 1359년 12월부터 1360년 1월까지 이어진 랭스 공방전과 파리 동쪽과 남쪽 땅에 대한 습격전에 참여했다. 1360년 브레티니 평화 협상 때 에드워드 3세에 의해 협상단 대표가 되었다. 협상은 1360년 5월 브레티니 평화 협약의 체결로 마무리되었고, 그는 10월에 칼레에서 열린 비준식에 참석했다. 1360년 1월 1일 런던에서 포로로 지내다가 풀려나게 된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월터 및 다른 3명의 기사에게 자신을 잘 대우한 것에 보답하고자 보상금을 지불했다.

그후 월터는 평화로운 기간 동안 의회에 항상 참석하면서 왕과 가깝게 지냈으며, 에드워드 3세의 세번째 아들인 곤트의 존과 우정을 나눴다. 1361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순례를 떠났고, 1364년 에노로 여행을 떠났다. 1369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재개되었을 때, 그는 피카르디에서 곤트의 존의 원정에 참여했다. 또한 런던에 카르투지오 수도원을 설립했다. 1372년 1월 14일 또는 15일에 에섹스에 있는 아내의 영지인 체스터퍼드에서 사망했고, 카르투지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에드워드 3세와 잉글랜드에 있던 왕자들, 그리고 많은 귀족과 성직자들이 참석했다. 빈민들도 장례식에 모여서 고인의 유언에 따라 1 데나이온씩 받았다. 곤트의 존은 고인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성직자들에게 미사를 500번 해달라고 주문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