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Siege of Cambr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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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39년 9~10월,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캉브레를 포위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한 전투.2. 상세
1338년 7월 22일,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를 향한 원정을 감행하기 위해 자신과 손잡기로 한 플란데런의 항구도시인 안트베르펜에 상륙했다. 그러나 당시 잉글랜드 정부의 자금난이 극심했기 때문에 프랑스를 향할 원정을 감행할 자금과 물자가 턱없이 부족했고, 처음에는 잉글랜드 왕을 환영했던 플란데런 상인들은 자신들에게 돈을 꿔달라고 호소하는 것을 보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의 승인 없이는 외국 영토를 공격할 수 없다며 발을 빼려 했다.설상가상으로 루트비히 4세 마저 프랑스와 협상을 통해 분쟁을 끝내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에드워드 3세는 12,000파운드에 달하는 자금을 수레에 싣고 코블렌츠로 달려가서 황제에게 6000파운드를 지급하고 나머지는 황제의 가족과 측근들에게 뇌물로 뿌렸다. 이에 루트비히 4세는 마음을 달리 먹고 9월 5일 선제후들이 보는 앞에서 에드워드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임명했고, 에드워드의 전쟁은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제국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며 이에 대한 불복종은 황제에 대한 반역이라고 선언했다. 에드워드는 안트베르펀으로 돌아온 뒤 황제 대리인의 이름으로 불복종 시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위협하며 저지대 군주들을 소환했고, 10월 12일 내륙에 있는 소도시 헤르크에서 그들 모두의 충성 맹세를 받았다.
이후 프랑스 침공은 1339년 7월로 정해졌지만, 에드워드는 그때까지 자금을 마련하는 데 실패해 원정을 결행하기도 전에 파산당할 지경에 몰렸다. 에드워드는 플란데런 영주들에게 잉글랜드 채권을 강매했지만, 이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던 중 킹스턴의 부유한 양모상이자 에드워드 3세의 총신인 윌리엄 드 라 폴이 용케도 1만 파운드 이상의 거금을 구해서 왕에게 빌려주면서, 자금난이 일시적으로나마 해소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을 구해준 폴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1339년 9월 20일, 에드워드 3세는 비로소 12,000명의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그가 첫 목표로 삼은 곳은 프랑스 오드프랑스 지역의 노르주에 위치한 캉브레였다. 이 곳은 명목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에 소속된 자유시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캉브레에는 300명의 프랑스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캉브레 주교 기욤 도손이 수장으로 군림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곳을 공략해 루트비히 4세에게 넘김으로써 황제의 지지를 보다 확실히 얻어내고, 필리프 6세가 캉브레를 구하러 달려온다면 즉시 요격해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로 마음먹었다.
9월 26일 캉브레에 도착한 에드워드 3세는 기욤에게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돌아오라고 요구했지만, 기욤은 프랑스에 대한 충성심을 표명하며 거부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이 공성전을 벌였지만, 프랑스 수비대가 대포 10문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결사적으로 항전하면서 공략에 실패했다. 그러던 중 필리프 6세가 두 배 이상의 병력을 콩피에뉴에 집결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에드워드 3세는 포위를 풀고 캉브레에서 물러났다.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가 캉브레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면 즉시 요격하여 끝장내기로 했지만,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의 재정 상태가 지극히 열악하다는 것을 잘 알았고 자신이 캉브레에 대한 이권을 양보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치기라도 하면 루트비히 4세 역시 에드워드를 더는 지원하려 하지 않을 것임을 간파하고 콩피에뉴에서 가만히 있기만 했다. 어떻게든 필리프 6세와 승부를 빨리 보고 싶었던 에드워드는 프랑스 영내로 진입했다. 이에 필리프 6세가 군대를 이동시켰고, 양군은 페론 시 인근에서 마주쳤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이 곳은 필리프 6세의 확고한 영토라서 전장으로 쓰기엔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야음을 틈타 동쪽으로 후퇴했다.
그 후 잉글랜드군은 생캉탱 동쪽의 소도시인 오리니를 점령한 뒤 사방으로 흩어져 성채와 마을과 소도시들을 약탈하고 불태우며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이에 필리프는 10월 17일 에드워드에게 야전으로 한판 붙자는 내용의 도전장을 보냈고, 에드워드는 이를 수락한 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에노 백령과의 국경 방향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는 당초 기스 시의 다리를 통해 우아즈 강을 건너려 했지만, 기스 수비대가 다리 통과를 거부하자 인근의 모든 마을을 불태우고 우아즈 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10월 21일 에노 백령과의 국경 근처에 있는 소도시 라 카벨을 점령한 뒤 도시와 북서쪽의 숲 사이의 경사진 장소에 진지를 세웠다.
10월 22일 프랑스군이 라 카펠에 도착했고, 양군은 곧바로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 그러나 프랑스 장군들이 "우회할 공간은 없으니 정면으로 공격할 수밖에 없고, 정면 공격 시 적 경보병들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잉글랜드 궁수들의 화살 세례를 양쪽에서 받아서 궤멸될 공산이 크니 전투를 미뤄야 한다"라고 진언하자, 필리프 6세는 그 말이 옳다고 여기고 라 카펠에서 물러났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군이 물러나자 필리프가 도망쳤으므로 자신이 전투의 재판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한 뒤 안트베르펜으로 돌아갔다. 그 후 1340년 1월 26일 헨트 시에서 프랑스 국왕 '에두아르'로서 즉위식을 거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