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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55년 11월 ~ 1356년 1월, 스코틀랜드군과 잉글랜드군이 국경지대의 주요 요충지인 베릭 요새를 넣고 벌인 공방전.2. 상세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에 접한 베릭은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 동부 국경으로 향하는 관문으로,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성공적인 무역 도시였으며, 이곳을 통과하는 양모에 대한 관세는 스코틀랜드 왕실의 가장 큰 단일 수입원이었다. 성벽은 3.2km에 걸쳐 뻗어 있었고, 두께는 최대 40인치(1m), 높이는 22피트(6.7m)에 달했다. 이 성채는 각각 최대 20m 높이의 19개 타워로 보호되었으며, 남서쪽의 벽은 돌다리를 건너 돌 성문을 통해 마을로 들어가는 트위드 강에 의해 더욱 보호되었다. 베릭 성은 베릭 마을 서쪽에 있었으며, 넓은 해자로 분리되었다. 1333년 7월 19일 할리돈 힐 전투 직후 베릭 수비대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항복한 이래, 베릭 성은 잉글랜드군의 국경 요새로 이용되었다.1346년 10월 17일, 데이비드 2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 12,000명이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간절한 부탁을 받아들여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다가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참패했다. 데이비드 2세는 잉글랜드의 포로로 전락했고, 스코틀랜드 귀족 50명 이상이 죽거나 생포되었다. 그 후 데이비드 2세는 오랫동안 잉글랜드의 포로로 남아 있었지만, 프랑스 왕국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에게 잉글랜드를 공격해달라고 압력을 가했다. 외젠 드 가랑시에르가 이끄는 프랑스 기사 60명이 스코틀랜드로 파견되었고,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를 침공한다면 큰 현금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1355년 8월, 스코틀랜드군은 네스빗 무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이후 프랑스 측에서 약속한 현금이 도착할 기미가 없자, 스코틀랜드 측은 그해 9월 말에 잉글랜드 측과 9개월간 휴전 협약을 맺었다. 이후 대부분의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북부에서의 작전에 참전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때 잉글랜드 국경 요새 수비대 상당수가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원정에 합류하기 위해 허가 없이 자리를 떠났는데, 그 중에는 베릭 요새 사령관인 제2대 그레이스토크 남작 윌리엄 드 그레이스토크도 있었다.
휴전 협정이 체결된 지 며칠 후, 프랑스에서 40,000 에쿠스에 달하는 현금이 도착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장성 윌리엄 더글러스, 패트릭 5세 드 던바 등은 프랑스 인사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휴전을 깨고 잉글랜드 북부의 노섬벌랜드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노햄 성 순경이 수비대 일부와 민병대를 이끌고 반격을 시도했지만 격파되었다. 11월 6일, 스코틀랜드 귀족 제2대 앵거스 백작 토머스 스튜어트와 패트릭 5세가 프랑스군의 협조를 받으며 베릭 성을 기습 공격했다. 그들은 얼마 남지 않은 수비대를 무찌르고 성벽을 넘은 뒤 마을에 진입했다. 마을 수비대와 주민들은 베릭 성으로 피신했고, 스코틀랜드인들은 마을을 약탈했다.
하지만 얼마 후 존 코플랜드가 록스버러의 잉글랜드 수비대 일부와 함께 베릭 성에 도착하면서, 베릭 성의 수비는 강화되었다. 그 후 데이비드 2세를 대신하여 스콭르랜드를 이끌던 스코틀랜드 호국경 로버트 스튜어트가 현장에 도착한 뒤 성을 포위하는 걸 직접 지휘했다. 스코틀랜드군은 마을에서 성까지 이어지는 요새화된 다리를 공략한 뒤 성벽을 허물려고 시도하는 동시에 성벽을 넘으려고 공세를 벌였지만, 수비대의 항전에 부딪혀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 한편 에드워드 3세는 피카르디에서 군사 활동을 벌였지만 프랑스군이 회전을 벌이길 기피하는 터라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스코틀랜드군이 베릭을 공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급히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12월 24일 북쪽의 뉴캐슬에 도착한 후 대규모 군대를 집결했다.
1356년 1월 6일 뉴캐슬에서 출발한 에드워드 3세는 베릭 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베릭 마을은 공략된 뒤 스코틀랜드 수비대 130명만 남았으며, 나머지는 그가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찌감치 물러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곧바로 광부들을 동원해 마을을 둘러싼 성벽을 뚫었고, 스코틀랜드 수비대는 협상을 제안했다. 에드워드 3세는 그들이 떠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심지어 그들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약탈물을 가져가는 걸 허용했다. 그 후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군에 보복하고자 스코틀랜드를 향한 최후의 공세를 개시했다(번트 캔들마스).